바다 9화
"별로 신경 안쓰지 않을까?"
오히려 '평범남 주제에 여자친구라니 역시 평범녀? 재수~' 같은 소리를 할거 같은데. 뭐 마나미랑 그런 관계가 될리는 없겠지만.
"......"
아야세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제 수영교습이 끝났는지 물에서 올라오는 쿠로네코와 키리노를 보고 말을 삼킨듯 했다.
"인생상담,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응? 나 별로 한것도 없는데."
"뭐 그런 인생상담 이니깐요."
아야세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에 대한 상담인지도 모르겠고, 문제가 해결된거 같지도 않지만 적어도 아야세는 묘하게 시원한듯한 얼굴이었다. 인생상담이 아니라 카운슬링인데 이거.
"진짜.. 독한 여자네. 거기서 손을 갑자기 놓아버리다니.."
"괜찮잖아? 어느정도 자극이 있어야 배우는것도 빠른 법이야.
그런 잡담을 하면서 올라오는 키리노와 쿠로네코는 역시나 정말 사이가 좋아 보였다.
"벌써 다 배운거야?"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키리노는 평소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헷헤! 내가 누군데! 수영교습 같은것도 나한테 걸리면 껌이라고!"
"... 막무가내긴 했지만, 확실히 도움은 됬어."
약간 어이없어 하는 쿠로네코였지만, 확실히 자기 입으로 도움이 됬다고 말을 했다. 뭐라고 할까. 딱히 쿠로네코만 그런것도 아니지만 이녀석들, 확실히 감정표현이 솔직해졌다.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저녁 먹지 않을래?"
응?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됬나. 키리노의 말을 듣고 보니, 슬슬 배가 고픈것 같기도 했다.
"그럼 다같이 바베큐 파티로 결정이오!"
사오리는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타이밍 좋게 난입하며 말했다.
"물론 아야세양들도 부디 오셨으면 좋겠소!"
"다같이 먹는게 즐거우니까 말야!"
벌써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건가 대단하네. 키리노 까지 합세하여 흥을 돋구니, 저쪽도 불만이 있을리가 없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어쩌다보니 4인 여행이 아니라 7인 여행이 되버렸지만 즐거우면 만사 오케이려나. 그렇게 다같이 우리가 숙박할 팬션앞까지 온후, 사오리가 아마도 팬션의 주인이라고 예상되는 인물과 전화통화를 하고 나서 꽤나 큰 바베큐 그릴이 준비됬다.
그 후 언제 가져왔는지 팬션의 냉장고에 한가득 있는 새우, 소세지, 돼지목살, 소고기, 고등어, 버섯들을 옮겨서 구울 준비를 했다. 분명 네명이서 놀러올 예정이었는데, 양을 보건데 절대 4인분은 커녕 10인분도 더 나올것 같은 양이었다.
음식같은것도 사오리가 전부 책임진다고는 했는데 이정도로 호화스러울줄은.. 그리고 팬션앞에 있는 나무로 된 길다란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꽃피우면서 바베큐 파티가 시작됬다.
뭐,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나는 굽기 담당이라고.
"새우 떨어졌으니까 더 구워"
"예이"
"선배, 고등어도 부탁해"
"예이예이"
뭐 나도 구우면서 한두점 주워먹기는 하지만.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여자들의 무리를 보니, 아야세는 오타쿠팀과도 마찰없이 웃으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쿠로네코와는 어느정도 관계가 있었지만, 사오리의 숨겨진 모습이라도 본걸까 아야세는 특히 사오리와 친해진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카나코도 마찬가지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오리는 리얼 아가씨니까 말이야. 가장한 케릭터지만 카리스마도 있고. 그런점을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저..."
"응?"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왔는지 브리짓이 자기 접시를 들고 내 앞에 있었다.
"브리짓 뭐 필요한거라도 있어?"
"아뇨, 저.. 매니져는 안드세요?"
찌잉. 얼마나 가정교육을 잘 받은 아이란 말인가. 여기서 나를 챙겨주는건 브리짓밖에 없다. 이대로만 커다오.
"뭐 고기 구울 사람은 필요하니까. 구우면서 나도 먹고 있으니까 걱정마."
"아까부터 봤는데 매니져, 통 먹질 않으세요.."
브리짓은 그렇게 말하며, 자기가 들고 있는 접시에서 방금 내가 구워서 대령한 통통한 새우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나에게 내밀었다.
"응?"
"앙~ 하세요."
바베큐 그릴용 장갑을 끼고 있어서 받지도 못하기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밀어 브리짓이 내민 새우를 받아먹는 순간
휘이이이익~
사오리의 휘파람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됬다. 에.. 뭔가 사오리를 빼고는 전부 표정이 안좋은데. 딱히 뺏어먹은건 아니라고!?
"자, 매니져."
분위기를 못읽는건지, 브리짓은 얼어붙은 나에게 다시 고기를 집어 젓가락을 내밀었다.
"아니 저, 이제 괜찮다고 할까.."
"아아~~"
식은땀을 흘리며 내가 대답하는데, 비교적 여태까지 조용했던 카나코가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듯 큰소리를 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나에게 집중됬던 시선들은 카나코에게 돌아갔다.
"오늘 너무 뛰어놀아서 그런데 로니져 마사지좀 해줘. '평소처럼' 말이야."
"뭐가 평소처럼 이냐!"
어이 카나코 너 임마! 그거 저번에 아야세한테 해코지 당한다고 무서워 할때 나랑 동반자살로 쓰던 소재 아니었어!?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거야!?
"너 설마.."
"무, 무슨 소릴까 선배."
"카나코한테 손대면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했을텐데요.."
분노한 세명과는 대조적으로 히죽히죽 웃고있는 카나코와 눈이 마주쳤다. 이 망할꼬맹이가!! 피부가 따끔따끔해질 정도의 살의를 세명에게 받으며 뭐라고 변명을 하려고 하는데
변명할게 없다!?
뉘앙스가 저래서 그렇지 단지 사실이냐 아니냐 라고 하면 사실이잖아!
"하하.. 아니 그게 말이야.. 아 고기 타겠다.."
화제전환으로는 빵점의 애드리브를 날리고 고기를 뒤집는 동안 (이미 몇개는 타버렸다) 바로 테클이 들어올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그릴을 내려보던 내가 뭔일인가 하고 고개를 살짝 올리자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긴 한데 오빠. 그 '결혼해달라는' 성희롱은 그만해주세요."
이건 또 무슨... 난데없이 아야세의 돌발행동에 나와 키리노, 쿠로네코는 입을 쩍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 나는 방금 집게 떨어트렸으니까.
"무무무무무무무무무무무무무무슨 소리야!? 너 내 친구한테 찝적댔어!?"
"아니 그.. 뭐랄까.."
얼굴을 시뻘겋게 말하며 분노하는 키리노를 두고도 제대로 된 변명을 할 수 없었다. 반 농담이긴 했지만, 이것도 사실이냐 아니냐를 말하자면 사실이니까.
쿠로네코는 뭔가 말을 잇지도 못할 정도로 어이가 없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물컵을 들어 물을 마시려고 하고 있었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나를 노려보던 키리노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는듯, 눈을 크게 뜨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긴 한데 너, 미국까지 쫓아와서 '난 네가 없으면 외로워 죽을것 같다고!' 라고 한거 진~짜 기분 나빴어."
"푸훕!"
콜록콜록 대며 성대하게 물을 뿜은 쿠로네코는 바로 나를 노려봤다. 역시나 이것도, 사실여부만 따지면 사실이니까.
거의 울기 일보직전의 나는 고기가 타는것도 상관 안하고 이 사태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만일 신이 있다면, 나에게 이런 시련을 내린 신을 저주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엔 쿠로네코가 담담히 말했다.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긴 한데 선배 침대. 눕기 불편한데 바꿀 생각 없어?"
"..........."
이번에는 여태까지 재밌다는듯 지켜보던 사오리와 카나코까지 입을 쩍 벌리고 심각한 표정이 됬다. 그리고 나의 자제력도 이미 한계.
"이제 싫어~!!!!!!!!!!!!!!!!!!!!!!!!!!!!!!!!!!!!!!!!!!!!!!!!!"
뭐야 대체!? 벌칙게임!? 나는 고기고 나발이고 진짜로 울면서 팬션안으로 도망갔다.
"... 언제까지 삐쳐있을거야 선배."
어찌더된 저녁을 다 먹고나서, 다들 사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로 충분히 어두워진 해변가에서 사오리가 준비한 폭죽놀이를 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애들은 다 즐겁게 폭죽을 터트리면서 놀고 있지만, 나는 아까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혼자 떨어져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마당에, 화려하게 마지막을 장식했던 쿠로네코가 와서 나를 달래려고 하고 있었다. 뭔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쿠로네코는 해변가라는 장소 때문에 더욱 에로게임의 히로인 같이 느껴졌다.
"내버려둬..."
젠장. 이정도로 침울한건 10년만인가. 아야세에게 수신거부 당한걸 깨달았을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쿠로네코는 몇초간 아무말 없이 내 옆에 서있다가 다시 말했다.
"어떻게 하면 선배의 마음이 풀릴까?"
쿠로네코의 물음에, 별 상관없지만 왠지 모르게 아까 아야세가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우리 남매는, 이 눈썰미 좋은 고양이에게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았었지. 아마 쿠로네코라면 그것에 대한 해답을 알지도 모른다.
"그럼.. 물어볼게 있는데."
나는 웅크려 앉아있는 상태에서 아까 아야세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말인데, 키리노한테 애인이 생기면 내가 어떻게 할것 같냐?"
"음.."
뭐 이것에 대한 나의 대답은 쿠로네코에게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쿠로네코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쿠로네코는 몇초간 생각하는듯 하더니, 당연하다는듯 나에게 말했다.
"아마, 패지 않을까? 상대 남자를"
"......"
...진짜 사기안인거 아니야?
쿠로네코가 나의 심리상태를 맞췄다는 거에 어이가 없어하면서도, 나는 착실하게 다음 질문도 했다.
"그럼, 나한테 애인이 생기면 키리노가 어떻게 할것 같아?"
"글쎄... 잘 모르겠는걸."
쿠로네코는 표정하나 안바뀌고 덤덤하게 말했다. 뭐랄까 의왼데, 이 쿠로네코가 모른다고 할줄은.
"그러냐.."
뭐 쿠로네코라고 정말로 모든걸 알 정도로 만능은 아닐테니까 말이야. 나는 자포자기 식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궁금하면 시험해 보지 않을래?"
"시험?"
뭘 어떻게 하면 시험을 해 볼 수 있는건데?
그런 말을 하면서 몸의 방향을 살짝 돌린 쿠로네코는, 어두운 탓도 있겠지만 완전히 바다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당신과 내가, 가짜연인이 되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