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1화
성 발렌타인 데이.
2월 14일.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렛을 주며 사랑을 고백하거나, 연인끼리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로, 19세기 영국에서부터 시작됬다. 그 이후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그 날을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로 상업적으로 이용해, 지금 상황이 된것으로 알고 있다.
뭐, 그것 말고도 로마의 어느 왕이 결혼을 금지했을때, 발렌티누스 라는 신부가 멋대로 연인들을 결혼시켜주다가 살해당했는데, 그 날을 기리기 위해 초콜릿을 나눠준다. 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아무래도 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럴 일은 적을것 같다.
그렇기에 작년까지도 발렌타인 데이는 그냥 상술일뿐이라고 생각하며 별로 의미깊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마나미를 제외하면 초콜렛이라고는 받아보지도 못했기에 별로 기쁜 날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딱히 종교가 없고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런 로맨틱한 이야기는 오히려 싫다고. 뭐, 하지만 그것도 작년까지의 이야기다. 다들 알다시피, 나에게 연인이 생겼으니까!
"……"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침에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미리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있는 키리노가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심드렁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응? 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하는 생각에 한손으로 얼굴을 만지며 이야기 하니, 키리노는 그 자세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상태로 말했다.
"아니, 그냥 재수 없어서. 신경 쓰지마"
"너는 아침부터 또 왜그러냐…"
신경 안쓰게 생겼냐! 상쾌한 아침부터 재수없다는 소리를 듣는 나도 좀 신경써달라고!
"히죽히죽 대긴…"
"언제 히죽댔다고!?"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고 말하는 키리노에게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러자 키리노는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거두고, 자신의 옆머리를 검지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대답했다.
"그 까만거한테 초콜렛 받을 생각에 완전 한심한 얼굴이거든?"
"크,큭…"
이녀석…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물론 그런 생각을 안했다고 하면 거짓말 이겠지만…
그래. 무엇을 숨기랴! 나는 여자친구가 생긴후 처음으로 온 발렌타인 데이에 완전 기대하고 있다고!
"왜? 또 변명 안해?"
"아아, 그래! 뭐 나쁘냐! 여자친구한테 초콜렛 받을 생각에 완전 기대만빵이거든! 그래서 오늘 오후에 쿠로네코 오니까 그렇게 알아둬!"
꼬우면 너도 남자친구 만들던지! 물론 아버지와 나의 엄중한 심사결과 후에 남자친구로 인정해주겠지만!
"흐응… 그래?"
씩씩대며 말하는 나에 비해 키리노는 꽤나 차분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마치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거든?' 하는 식의 음색으로, 예전의 나라면 분명히 그렇게 알아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보통, 키리노 녀석이 저런식으로 대답한다는건,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때' 다.
"너… 혹시나 하는데,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건…"
"슬슬 지각 아니야?"
"………"
노골적으로 대답을 회피하는 키리노 녀석을 붙잡고 이야기 해봤자, 아무 진전이 없는건 확실하니 나는 그쯤하고 학교를 가기 위한 준비를 마저 하러 내 방에 올라갔다.
아직 봄이 되기 전, 추운 날씨 때문에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내가 옷장에서 꺼낸 옷은, 예전에 키리노가 사준 겨울가디건이었다.
아직도 패션용어 같은 것은 관심이 없기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대학교에 처음 갈때, 내 모습을 본 키리노가 기겁을 하며 그 날, 학교가 끝난 나를 시부야 까지 끌고가서 2시간 정도 돌아다니다가 키리노가 처음사준 옷이다.
솔직히, 그때는 여러군대 돈을 쓸 일이 많았기에, 용돈만으로는 빠듯했고 그 시점에서는 거의 남지 않았으므로 그냥 돌아오려고 했지만 키리노는 '내가 다 창피하단 말이야!' 라면서 지갑을 꺼내더니 자기가 결제했다.
…예전에 나한테 소설의 취재라며 남자가 여자에게 악세사리를 사주는 장면을 재현한다면서 악세라리를 뜯어낼때, 1만엔이나 하는 귀걸이를 뜯겼다고 꽤나 불평했던것 같지만, 그때 이녀석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자기가 코디한 옷을 산 가격은 귀걸이 6개분 이었다.
새삼스럽게, 이녀석의 능력에 놀라는구만. 하긴, 그 많은 오타쿠 물품만 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나오니…
그 후로도 드문드문 옷을 사러 가자며 나를 끌고가는 키리노 때문에 받는 용돈을 최대한 아끼면서(대학생이 되서 늘긴 했지만) 내 돈으로 샀지만, 키리노의 페이스에는 따라갈 수 없어서 결국은 키리노가 사준 옷이 절반정도 된다.
평소에는 꽤 넉넉한 사이즈의 옷이나 편한걸 찾았지만, 키리노의 강의(옷 살때 키리노는 말이 엄청 많아진다)를 들으며 키리노와 다니다 보니 이제는 몸에 딱 맞는 사이즈만 고르게 됬다. 키리노의 도움 없이도 그럴듯한 옷을 코디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고.
그렇게 키리노의 코디감정(……)에서 합격점을 받고, 그 후로 키리노는 나에게 옷으로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말해서 대충 어떤 느낌이었냐면…
'자 그럼, 너 나름대로 코디를 해서 입고 와'
'어, 어떠냐?'
'…다음'
'!? 불합격!? 이유라도 말해주라고 키리노!'
'선생님이라고 불러!!'
같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초기에는 이런걸 맨정신으로 입을 수 있을까… 연예인도 아닌데…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여러번 입다보니 꽤 적응이 됬다.
옷이 날개라고, 여태까지 딱히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이 아니었던 나는 그 후 학교에서 꽤 많이 눈에 띄는, 멋쟁이 케릭터로 정착됬다.
게다가 친구가 된 녀석들 중에 한놈이, 내가 고등학교때 아야세나 카나코, 키리노 때문에 어쩌다 딱 한번 찍었던 독자모델잡지를 가져왔을땐 기절할뻔했다고.
뭐, 나름 관심받는게 나쁜 기분도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1년 전의 나랑은 케릭터가 완전히 다르니까, 사람들 반응이라던지 적응하기 꽤 힘들었다고.
음. 여튼. 내가 그나마 지금처럼 패션센스가 좋아진 것도 그렇지만, 귀여운 여동생이 사비를 털어 처음으로 사준 옷(정확히는 물건)이기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 코디기도 하다.
그렇기에 오늘같은 기념일에 제일 먼저 생각이 나서, 나는 그 옷을 꺼내 입고 내려왔다.
"헤에… 그거 입는구나"
아까부터 준비를 다 하고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키리노는 내가 입은 옷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정말, 교복 입었을 때가 더 편하구만… 사복은 귀찮기만 하고…
"아 응. 말 안했었나? 내가 제일 좋아하거든 이거. 나한테 제일 어울리는것 같기도 하고"
키리노는 작년까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진학했기에, 교복도 쿠로네코가 입던 것과 똑같은 것이다.
솔직히 어디에나 있을법한 평범한 교복이고, 세라복이나 원피스형같이 '교복이 이쁜' 축에는 들지도 않고, 키리노처럼 화려한 여자애에게 어울리지도 않지만, 입은게 키리노 라서 그런지 굉장히 보기 좋았다.
나는 나보고 옷이 날개라고 평가했지만, 이 녀석에 경우는 옷이 아니라 원판이 날개구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흉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돋보이는게 신기하구만………………우리 모교의 여자 교복에 대해 단 하나 칭찬할 점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다른 학교보다 치마가 짧다는 점 정도밖에 없다고.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키리노는 그렇게 말하며 어울리지도 않게 베시시 웃었다.
여기서 또 '너 어디 아프냐?' 같은 대사를 하면 웃기지도 않게 걷어차일것이 분명하기에 따로 말하지는 않았다. 아까 키리노의 말대로, 슬슬 나가봐야 하기도 하고.
"다녀오겠습니다"
"갔다오렴~"
평소같이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하며 뒤에서 여동생 자랑과 내 흉을 보는게 탁월한)어머니에게 그런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들 알다시피 내가 합격한 학교는 치바대학교. 고장의 국립대이기 때문에 등록금이 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노리게 됬다.
그것도 사실은, 공부에 영 관심이 없었던 내가 키리노 때문에 자극받고 공부를 하게 되면서 '대학은 어디에 가지?' 하는 생각에 나름 조사해보니 조금만 더 올리면 내 점수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나서,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된거지만.
여자친구가 생긴후 성적이 떨어질까봐 나름 걱정했었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쿠로네코가 아에 대놓고 '나 때문에 점수 떨어졌다는 말은 하지 말아줘' 라면서 못을 박았기 때문에, 그런 걱정도 없었다. 꽤나 여유있는 점수로 합격했다고.
마나미도 성적이 굉장히 높았으므로(지금의 나보다 높다) 치바대에 들어가는건 문제가 없었다. 마나미도 나와 같은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치바대에 합격했다고 들었을땐 뛸듯이 기뻤다고.
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만나려면 만날 수 있으므로, 아는 얼굴이 늘었다는건 무조건적으로 좋은거라고!
뭐, 같이 통학하는건 내가 대학교에 들어갔으므로, 키리노와는 시간대가 맞지 않기 때문에, 마나미와는 과가 달라서 강의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자연히 무산됬다.
음… 오늘은 초콜릿좀 받을 수 있을까? 작년까지만 해도 마나미한테만 받았으니까. 의리초콜렛이지만…
아까의 내 설명으로 내가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재는 인기있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처음엔 처음보는 여자들까지 말을 걸 정도로 관심을 받았었는데,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는 그런 일은 뚝 끊겼다.
뭐 애인도 있는 주제에 다른 여자에게 초콜릿을 받을 기대를 하냐고 하겠지만… 받아서 나쁠건 없잖아?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전철역까지 걸어가고 있자, 앞에 익숙한 모습의 사람이 보였다.
"여! 마나미!"
"앗. 안녕 쿄우~"
마나미는 고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보는 사람이 다 포근포근한 느낌의 옷을 자주 입는다.
오타쿠 취미에 빠지고 나서 느낀건데, 이런걸 치유계라고 하던가? 반드시 한명쯤은 있어야 하는 케릭터라고. 주인공 입장에서는 말이지…
"오늘은 운이 좋네"
"헤헤. 그러게"
연락은 자주 취했지만, 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마나미와의 대화는 마음이 편했다.
"오랜만에 같이 등교하네"
"응. 그러게"
또각또각.
그것으로 말이 끊기고 침묵속에서, 둘이 걷는 구두소리만 들렸다.
그대로 전철역까지 도착하고, 전철을 기다리고 있으니 마나미가 입을 열었다.
"고코우양이랑은 잘 지내?"
"응"
나는 대답하며 무의식적으로 왼손에 있는 반지를 쳐다봤다.
"쿄우. 학교에서 인기 많지? 우리과에서도 쿄우 이야기가 가끔 나와"
"에, 그래?"
"응. 쿄우도 멋쟁이가 다됬으니까"
마나미는 왠지 모르게 조금은 쓸쓸한듯 대답했다.
별것 아닌데도, 갑자기 마나미가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멀어졌다기 보다, 마나미 녀석이 나를 멀리 보는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딱콩!
나는 가볍게, 마나미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아,아얏! 쿄,쿄우?"
내가 양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교차하듯 잡고 다람쥐 같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마나미의 머리에 손을 올리려고 하자, 마나미는 다시 한번 때리는줄 알고 움찔 했지만. 나는 그대로 마나미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옷입는게 달라졌다고 해도 알맹이는 똑같다고. 멋대로 바뀐사람 취급하지 말아주라"
마나미는 나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마에 손을 댄 그 자세 그대로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리고 전철이 도착하고, 나와 마나미는 전철에 탑승했다.
"그래서 오늘이 벨낸다임 데이잖아?"
"아 응. 그래서?"
역시나 외래어에 약한 할머니 속성은 여전하구만. 신기할 정도의 발음이다.
"쿄우는 여자친구가 있는 몸인데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으니까, 처신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이어이… 설명조냐?"
"그치만~ 임자있는 몸인데도 여자들에게 조코레엣을 받으면서 히죽히죽 대면, 고코우양이 슬퍼한다고 생각해"
"호오, 확실히…"
저번에도 어처구니 없는 오해때문에 위험했었는데,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나.
마나미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두고 마나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조코레엣 안줄테니까"
"!? 진짜!?"
"응. 나는 거짓말 안해"
"그럴수가! 내 소중한 연례행사중 하나를 이렇게 부숴버리다니! 너무한거 아니야!?"
"………쿄우. 화낸다?"
"……죄송합니다…"
웃는얼굴 그대로지만 마나미는 화를 내고 있었다. 솔직히 방금 대화의 어느 점이 마나미를 화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화낸다고 경고하는 마나미의 말엔 무조건적으로 사과를 해야한다.
마나미는, 화를 잘 내지 않는 타입이지만 한번 화를 내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고…
차라리 아야세를 화나게 하는 것이 백배 천배 낫다. 아야세를 화나게 하면 살해당하겠지만, 마나미를 화나게 하면 차라리 죽는게 나을 정도니까…
내가 사과를 하자 기분이 조금은 풀렸는지, 마나미는 화난 기색을 지우고 말했다.
"흥흥~ 이것도 다 벌이니까"
"오,오우…"
아직도 현실에서 흥흥~ 을 하는 희귀한 케이스를 보고도 아까의 마나미에게 쫄아서 별다른 딴죽도 못걸고 불편해하는 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은듯이 전철은 계속해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