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10권. 15화
그러자 쿠로네코는 조금 놀란듯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흥. 쓸데없는 참견이야"
라며,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 쿠로네코의 뒷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럼, 금방 갔다 올테니까"
"응"
저번에 편의점에서 사온 찻잎을 꺼내 간단히 차를 탄후, 내 침대 위에 앉아 손가락을 꼬물꼬물 거리고 있는 쿠로네코에게 건내줬다. 딱히 비싼 찻잎도 아니고 내가 차를 잘 끓이는 것도 아니어서 자신은 없었지만, 컵을 받아들여 차를 한입 마신 쿠로네코는 긴장이 풀린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행이네.
그 후, 나는 밖으로 나와 곧바로 원룸건물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향했다.
"에… 어디보자…"
나는 현관문부터 보안장치가 걸려있는, 어제 처음본 구조의 유리문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저번 카나타씨가 비밀번호 같은것을 입력한 패널을 자세히 보니, 그 옆에 각 방의 호수가 써져있었다. 조금 고민을 했지만 '뭐, 괜찮겠지' 같은 생각을 하며 카나타씨의 방인 303호를 꾹 누르자, 전화 연결음 같은 신호음이 나기 시작했다.
「네에. 누구세요~?」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찰칵. 하고 마치 전화가 연결된것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늘어진듯한 목소리. 기계 너머에서 나는 목소리지만, 나는 그것이 카나타씨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 네, 코우사카인데요"
「아~ 응응. 무슨 일이야 쿄우스케?」
"갑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저번에 쿠로네코를 소개시켜달라고 했잖아요?"
「응? 아~ 그 귀여운 나이트메어? 쿠로네코라고 부르는 거야? 난 언제든 환영이야~」
"그게, 이미 와 있거든요. 지금 괜찮나요?"
「응?」
인터폰 너머의 카나타씨는 '어라라?' 같은 소리를 내더니,
「뭐 상관없겠지~ 나도 바쁘지 않은건 요즘밖에 없고. 지금 당장도 괜찮아~」
"네 그럼, 바로 올게요"
「응응~」
아까 쿠로네코가 혹시나 카나타씨를 만나지 못할까, 하고 걱정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사실 나도 오늘은 안될것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말이다.
카나타씨는 유명한 애니메이션의 원작자. 그러니 아마 우리같은 학생들과는 다르게 꽤나 바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미리 약속을 한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이라는 어린아이같은 억지를 부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난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고, 그런 나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집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쿠로네코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한걸음에 내 방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카나타씨가 지금 당장도 괜찮대!"
"그,그래?"
아직도 침대 위에 앉아 내 이야기를 들은 쿠로네코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지만, 나에게 들뜬 모습을 보이기 창피한건지 이내 평정을 가장했다.
잠깐… 그것보다, 뭔가 달라진거 같은데…?
"저기, 쿠로네코"
"무슨일일까?"
왠지 조금 텐션이 올라가있는 쿠로네코에게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무시하고 넘어갈수는 없군.
"너, 나 없는 사이에 뭔가했냐?"
"무, 무무무슨 말을 하는거야 당신은?"
당황하고 있다. 분명히 당황하고 있다.
내가 눈을 -_- 모양으로 만들고 방안을 훑어보자, 쿠로네코는 당황한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쿠로네코, 너 설마…"
"그,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
"내 방, 또 청소했어?"
바로 어제, 쿠로네코가 돼지우리 같았던 내 방을 청소해줬기에 그렇게 크게 변한점은 없었지만 주인인 나의 눈에는 그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씩 흐트러져 있다던가, 내용물이 반쯤 찬 쓰레기통이 치워져 있다던가, 그런거 말이다.
"바로 어제 청소해줬는데 미안하네. 앞으로라도 깨끗하게 정리할테니까"
"……뭐, 응…"
그 후, 무언가 오묘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는 쿠로네코를 재촉해 카나타씨의 집으로 갔다.
"아, 어서와~"
카나타씨는 듣는 사람이 긴장이 풀어지는것 같은 약간의 맹한 목소리로 우리를 반겨줬다. 그리고 역시나, 평소보다도 훨씬 긴장하고 있는 쿠로네코는 '저, 저기!' 라고 하더니,
"아, 안녕하세요!"
우와, 나 쿠로네코가 존댓말 하는거 처음봐.
"응응, 일단 들어와~"
"실례할게요"
"시,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쿠로네코와 함께 신발을 벗고 있자,
"뭐야? 손님이야?"
방의 안쪽에서 다른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내 손님이야~"
"별일이네. 언니한테 손님도 오고"
"응. 내 작품 팬들!"
"켁"
켁. 하고 노골적으로 실망했다는 듯한, 약간 건방진 여자아이의 목소리. 아마도, 그때 내가 복도에서 들었던 대화의 주인공중 하나일것이다. 언니가 푸딩 먹었다고 무지하게 화내던 그 녀석 있잖냐.
뭐, 이 동생양이 자신의 언니의 직업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팬인 우리가 오타쿠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으음. 아마도 그쪽이랑은 관련이 없는 사람인가. 그럼 좀 불편할텐데.
그런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카나타씨는 내 앞에서 양손을 앞으로 모아 미안하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미안~ 나쁜애는 아닌데, 말이 좀 험한 동생이라"
"하하… 뭐, 괜찮아요"
우리집에는 더 말이 험한 녀석이 있습죠.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정말, 어서 나와서 인사라도 하고 들어가~"
"쳇쳇, 알았다구"
동생양은 그렇게 말하며, 살짝 문이 열려있는 방문을 천천히 열며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과연 이렇게 속이 깊고 자상한 언니가 있는데,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이길래 저렇게 성격이 다른걸까… 하고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자,
"어? 쿄우스케?"
"푸-흡!!!!"
무지하게 익숙한 얼굴이 말을 걸어왔다.
"응? 뭐야, 아는사이야 카나코?"
"뭐, 뭔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했더니!? 자매였어!!?"
"뭐가 익숙한 얼굴이야 멍청아"
카나코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언니의 뒤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자 봐. 붕어빵이지?"
라며, 자신의 언니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잡아 양갈래 모양으로 만들었다.
세상에, 이리 보니까 똑같잖아!! 눈매랑 분위기만 달라!!
"그것보다, 너 우리 언니 작품 팬이었어? 역시 너도 오타쿠였……"
싱글벙글 웃으며 언니의 머리카락을 주물럭이며 장난을 치면서 말하던 카나코의 목소리가 뚝. 하고 멈추더니, 언니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며 굉장히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누구야? 그 여자"
"아, 소개해줄게. 얘는…"
내가 카나코에게 쿠로네코를 소개시켜주려고 하자, 쿠로네코는 내 앞으로 손을 뻗어 나의 말을 저지시켰다. 내가 얼떨결에 말을 멈추자, 쿠로네코는 나의 팔에 매달리더니,
"여자친구인데, 무슨 문제라도?"
얘는 갑자기 또 뭔소리래!?
"이,이익…"
그러자 카나코는 이를 꽉 깨물고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얘는 또 왜!?
"이 로리콘 변태 강간마!! 내 팬클럽 제 1호인 주제에, 여, 여친이 있어!!?"
팬클럽 1호랑 여자친구가 있는거랑 무슨 상관이냐 이 오타쿠 아이돌아!! 아니 그것보다, 애초에 지금은 애인사이도 아니라고!
이를 꽉 깨은채 나를 물어뜯을 기세로 카나코가 소리를 지르자, 쿠로네코는 내 팔에서 천천히 떨어지며 아무렇지도 않듯이 말했다.
"는 농담이고. 여동생이야"
"……"
"………"
순식간에 멍한 표정이 된 카나코는 "에…, 저기…" 라며 중얼거리더니,
"그, 그랬어? 난 또… 뭐야, 농담이라고 하기엔 악질이잖아. 친남매가 여자친구라는 농담같은걸 하다니!"
그 후 카나코는 "마실거라도 가져올게!" 라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나는 옆에 있는 쿠로네코의 귀에 고개를 숙여, 조그마한 목소리로 귓속말했다.
"(어이 쿠로네코. 대체 무슨 생각이냐?)
"(왜? 당신과 하나도 안닮은 동생보다야 잘먹힐것 같은 거짓말인데)"
"(그건 그렇지만… 왜 하필 여동…)"
꼬집
"(아팟팟팟팟!!)"
"(……그럼 당신이야 말로, 저 여자랑은 무슨 관계일까)
"(키, 키리노 친구야!!)"
"(……………)"
쿠로네코는 뭔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뭔가 뚱한 표정으로 매우 천천히 나를 꼬집고 있던 손을 내렸다.
반쯤 눈물이 고인채로 쿠로네코가 꼬집었던 팔을 쓰다듬고 있자, 나의 시선에는 양손에 내가 찾아준 노트와 펜을 들고 있는 카나타씨의 모습이 들어왔다.
"뭐하고 있어요…?"
"응? 아아 신경쓰지마~ 일종의 직업병이라. 히히"
그리고 카나타씨는 자신의 작업실에 우리를 안내해줬다.
그대로 얼마간 구경을 하고 있자, 마실것을 가져온다고 하던 카나코는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서양 과자와 함께, 향기가 좋은 차를 타 왔다.
"짠~ 기다렸지!"
"어라, 카나코. 이거 너가 꽤나 아끼는 과자 아니야?"
"응? 신경쓰지마 신경쓰지마~ 언니 손님이라고 온 사람이 나도 구면이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래? 후후후"
카나타씨의 의미심장한 웃음에도 카나코는 히힛. 하고 웃으며 과자 하나를 입에 넣고 말했다.
"그럼 그렇지. 너가 여자친구가 있을리가 없었어"
"그렇습니까…"
"너같은 평범남이 역시 애인이 있을리가 없지?"
"두번말했겠다!!?"
평범한건 인정하겠지만, 아무리 나라도 면전에서 그러면 상처받는다고 임마.
"응응. 그래서? 마스… 뭐였지? 하여튼, 우리 언니 작품의 팬이신 쿄우스케씨는 여기까지 멀리에서 찾아온거야?"
"아, 별로 멀지는 않아. 바로 옆… 아파아앗!!?"
이번엔 허벅지에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옆을 쳐다보니, 쿠로네코는 나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취같은거 이야기 하지 마)"
"(끄덕끄덕)"
그제서야 멀어지는 쿠로네코의 손.
그건 그렇고, 뭔가 쿠로네코도 요즘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는것 같다고 정말…
카나코는 탁자 아래에서 벌어지는 그런 상황을 알지도 못한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내 팬 1호이자 명예회장인 주제에 평생 여자친구가 없으면 무슨 추태야"
"거 미안하네. 그것보다, 명예회장까지 된 기억은 없는데"
그런 이야기를 옆에서 꽤나 맛이 좋은 홍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듣고 있던 카나타씨는, 정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이 휙, 하고 이야기를 던졌다.
"아까부터 팬 1호니 하는데, 무슨 말이야?"
"당연히 이 카나코님의 기분나쁜 오타쿠 팬클럽이지!"
"오타쿠?"
"응! 아키하바라에서 메루루 이벤………………"
말을 하던 카나코의 목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
카나코는 시퍼런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언니가 있는 방향으로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저, 저기 언니? 이, 이건 말이지…"
"(히죽)"
"히,히익!"
"역시나,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던 메루루 코스튬 플레이어 카나카나양은, 우리 카나코였구나~?"
"그, 그러니까 이게…"
카나코는 양팔을 휘적이며 무언가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카나타씨는 오히려 태양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는 내 작품활동 도와줄거지? 구체적으로는, 내가 만들어준 옷을 입는다던가"
"싫어 멍청아! 그런걸 할리가 있냐!!"
"그러고 보니, 부모님이 카나코만이라도 집에 왔으면 좋겠다는데"
"…죄송합니다"
'우우…' 하면서 완전 울상이 된 카나코는 거기서 나를 찌릿 하고 노려봤다.
……아니, 자기가 자폭해놓고 왜 나한테 책임을 전가하냐.
"흑, 하여튼 걱정마. 내 팬 1호이자 명예회장인 매니져가 평생 여자친구가 없는건 나한테도 창피한 일이니까, 정 못하면 나라도 사귀어주지 뭐"
"그러니까 명예회장 한적 없대도 그러… 아파아아아아!!?"
또냐! 또 꼬집는거냐 쿠로네코!!
"(…매니져라는건 또 무슨말일까)"
"(나, 나중에! 나중에 설명해줄테니까!)"
이거, 허벅지에 100% 멍들었다! 장담할 수 있다고!
"…흥"
쿠로네코는 나의 허벅지에서 손가락을 떼며, 카나코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의 여자친구 문제를 당신이 신경쓸 필요는 없어"
"하아아아아?"
그러자 카나코는 상대를 업신여기는 듯한 목소리로 반응했다.
이미 키리노의 도발에 단련된 내가 봐도 짜증이 날 정도의 숙련도가 높은 도발이다. 완벽하군.
"그럼 여동생양이야 말로 자기 오빠의 여자친구 문제에 신경쓸 필요는 없는거 아니야?"
"…우리 오빠는, 여동생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는걸 무지하게 걱정하는 시스콘이라 말이지"
그렇게 말하고, 쿠로네코는 힐끗 나를 노려봤다.
어, 어디까지 이야기한거냐 키리노!!
"푸핫. 그럴리가~ 남매라는건 전부 거의 원수지간이라구"
한쪽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킥. 웃고 있던 카나코는 "아" 하고 중얼거리더니,
"아니다. 안그런 녀석도 있었지"
"안그런 녀석?"
"내 친구중에, 키리노라고~ 나보다 살짝 덜 귀여운 녀석이 있는데 말이야. 매일 자기 오빠이야기만 해서 엄청 귀찮다니까. 겉으로는 욕을 해도, 누가 봐도 좋아하는 거잖아 그거"
"뭐…?"
"그러고 보니, 요즘 뭐래더라? 오빠가 자취를 시작했다고 했나? 그래서 학교에서 완전 울상이라니까. 보는 쪽이 우울해질 정도로 컨디션 최~악"
카나코는 히죽히죽 웃으며, 나의 여동생. 키리노에 대해 이야기 했다.
키리노가 학교에서 내 욕을 하는건 그렇다 치더라도, 뒤에 말은 무슨 의미지?
그러자 번뜩 하고, 아야세의 말이 떠올랐다.
'키리노. 요즘 컨디션이 안좋은것 같으니까 잘 부탁드려요'
……설마,
키리노가 컨디션이 안좋은게, 내가 자취를 시작했기 때문?
"응? 쿄우스케? 뭘 멍하니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과자를 오독오독 먹으며 의아하다는 듯이 말하는 카나코에게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지금 당장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
"그럼 잘가~ 가끔 놀러와도 괜찮으니까 매니져!"
"또 기회가 된다면 말이지"
그 후, 한참동안 쿠로네코와 카나타씨의 오타쿠 토크가 시작됐었다. 마스케라를 몇번이나 정독한 나로서도 도저히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는 고차원적인 이야기라 기억에 남는건 하나도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슬슬 날이 어두워 질때쯤, 모든 이야기를 끝낸 쿠로네코는 얼굴이 반질반질하다고 느낄 정도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어때, 카나타씨, 좋은 사람이지?"
"응. 만나서 영광이었어"
카나코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아, 그리고 여담으로. 허벅지에 이미 멍이 들어있다. 제길.
"어라, 비오네"
쿠로네코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나오니, 투둑, 투둑. 하면서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쿠로네코, 우산 있어?"
"일기예보 정도는 보고 다니는게 좋아"
쿠로네코는 자신의 학교지정 손가방에서 조그마한 접이식 우산을 꺼내면서 말했다.
뭐, 나는 일기예보같은건 안보는 습관이니까.
"그럼, 역까지 바래다줄까?"
"………"
하지만 쿠로네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우산도 피지 않은채 얼마 오지 않는 비를 맞고 있었다.
"쿠로네코?"
"원래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뭘?"
"그 여자에게 빚이 있는건 사양이니까. 이건, 그때의 빚을 갚는것일 뿐이야"
"키리노한테 무슨 빚이라도 졌어?"
"당신은 얼마나 멍청한걸까. 빚이라고 하면 그것밖에 없잖아"
빚이라니… 쿠로네코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거지?
"…마츠도로… 찾아와 준거…"
"아…"
그런 나의 멍청한 표정을 봤는지, 쿠로네코는 고개를 숙인채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그거라면, 쿠로네코의 표현법으로는 '빚'이겠네.
그러자 쿠로네코는 휙, 하고.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 그 이후로 여동생. 만난적 있어?"
그 이후.
아마, 쿠로네코와 아야세가 찾아왔었던 그 날을 말하는 거겠지.
"아니, 없어"
"그게 무슨 문제인지 아직도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키리노 녀석은 전화도 안받고…"
"변명하지마"
쿠로네코는 나의 말을 끊으며, 일갈했다.
"변명이라니? 그건 딱히 내가 잘못한것도 아니잖냐. 게다가, 이쪽은 전력을 다해서 사과하려고 했었다고? 그런데 전화도 안받고, 멋대로 수신거부나 하는 녀석을 내가 찾아가서 사과라도 해야된다는 말하고 싶은거냐?"
그러자 흠칫. 하고 쿠로네코가 살짝 어깨를 떨며 몸을 움츠렸다.
말을 하고 보니,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화가 난듯한 목소리였다.
"…미안. 조금 흥분했었나봐"
약간 겁을먹은듯한 쿠로네코에게 사과했지만, 쿠로네코는 아직도 살짝 몸을 떨고 있었다.
"쿠로네코…"
"당신은 바보야"
"………"
빗줄기는 점점더 강해져, 슬슬 옷이 젖는게 걱정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쿠로네코는 우산을 피지 않은채 말한다.
"저번, 그 여자의 작품이 도작당했을때와 마찬가지야. 당신은…… 왜 자신의 기분조차, 자신의 마음조차 모르고 있는거야…?"
쿠로네코와 함께 출판사에 갔을때. 쿠로네코는 내가 키리노를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나도 모르고 있던 감정. 그 감정의 이유를 몰랐기에, 나는 알게 모르게 키리노를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로네코는 지금도, 내가 그때와 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
"저주야"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쿠로네코는 그제서야 팡, 하고 우산을 폈다. 이미 교복의 어깨부분은 충분히 젖어 있었지만, 쿠로네코는 그런건 전혀 신경쓰지 않은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동생이랑 화해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괴로운 일생을 살게 될거야"
"………"
"대답은?"
"…오, 오우…"
"그럼"
쿠로네코는 빙글, 하고 몸을 돌리더니, 아주 조그마한, 겨우 들릴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힘내"
**
쿠로네코를 보내고, 나는 비에 홀딱 젖은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라고 해도, 내 원룸이지만.
"하아…"
딱히 저녁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주 조그마한 욕조에 반쯤 몸을 담궈 비 때문에 내려간 체온을 올리고 침대위에 눕자, 괜히 또 갑갑한 마음과 함께 여러가지 말들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고 있지만, 오빠에겐 말해주지 않을 거에요'
조금 짓궂은 아야세의 한마디나,
'그러고 보니, 요즘 뭐래더라? 오빠가 자취를 시작했다고 했나? 그래서 학교에서 완전 울상이라니까. 보는 쪽이 우울해질 정도로 컨디션 최~악'
농담인지 거짓말인지도 모를, 카나코의 장난스러운 한마디나.
'당신은…… 왜 자신의 기분조차, 자신의 마음조차 모르고 있는거야…?'
심장에 파고드는것 같았던, 쿠로네코의 한마디.
조용히 창문을 쳐다보자, 이미 비는 엄청나게 많이 오고 있었다.
몇일내내 느껴지는 갑갑한 기분.
나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아야세와 쿠로네코.
세상을 잠겨버릴듯한 엄청난 기세로 오는 비.
그런것들 때문에, 갑자기 엄청나게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공부나 하자"
결국, 나는 그런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공부를 하려고 했다. 뭐, 공부를 하려고도 자취를 한거니까.
그렇게 책을 펼치고 펜을 들자,
띵동.
하고, 누군가 벨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네에, 나가요"
내 마음을 추수리는것 만으로 이미 한계였기에, 나는 아무런 생각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엔,
"키리,노…?"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몸이 홀딱 젖은 키리노가, 고개를 푹 숙인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