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10권.(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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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냐? 그것보다 우산은?"
지금도 하늘에서는 주룩주룩이 아닌 콸콸콸 이라는 의성어가 더 어울릴 정도의 비가 오고 있다. 그런 날씨에 키리노는 우산도 없이 여기까지 온것 같았다.
키리노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은 한올도 빠짐없이 물에 젖어 그 부드러운 얼굴에 붙어있고, 온몸의 피부는 창백하고, 입술은 완전한 파란색이다. 그런 상태의 키리노는 그 작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절대 잠시동안 비를 맞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 아마 최소 30분 이상은 맞지 않았을까.
흠칫. 하고, 저번에 키리노가 핸드폰 소설을 쓸때 리얼리티를 추구한다며 자신의 머리에 물을 쏟아부을때가 떠올랐다. 설마 하지만 이번에도 그런 멍청한짓을 또 한건 아니겠지.
"…………"
키리노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일단 들어와"
대답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단순히 감기가 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대로 쓰러질것 같이 연약하게 느껴지는 키리노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너!"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키리노의 몸은 섬뜩할정도로 차가웠다. 대체, 얼마나 밖에서 비를 맞고 있던 거야?
"…일단, 따뜻한 물로 샤워부터 하고 나와"
나는 키리노의 손목을 잡은채, 그대로 샤워실로 밀어넣었다.
어느정도 공부를 하고 자기전에 한번더 씻을 생각에 조그마한 욕조에는 내가 받아놨던 물이 남아 있다. 평소의 녀석이라면 '네가 사용했던 물에 들어갈빠엔, 죽는게 나아' 같은 소리를 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라서 그런걸까, 키리노는 불만없이 샤워실로 들어갔다.
나는 샤워실 밖에서 키리노가 욕조에 들어가는 소리를 확인한 후, 키리노가 입을 옷을 찾았다.
"마음에 들리도 없겠지만…"
찾아낸 옷은 이런저런 특색도 없는 검정색 츄리닝 바지와 하얀색 티셔츠. 최대한 키리노가 기분 나쁘지 않게 제일 적게 입은 옷을 찾다보니(적어도 키리노 앞에서는 입지 않은) 꽤나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까지 했는데 마음에 안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벗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냐.
"옷. 여기다가 둘테니까 일단 입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샤워실 문 앞에다가 옷을 가져다 놓고 밖으로 나왔다.
한층에 두 가구 밖에 없는 좁디 좁은 복도에서는 마음대로 쉬지도 못한다. 복도에 딱 한개 있는 창문조차도 반대편에 있는 커다란 건물에 가려 바깥의 경치가 보이지 않으니, 조그마한 독방에 갇혀있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둑어둑한 복도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생각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건 키리노는 왜 여기까지 찾아온걸까. 하는 이야기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자, 시간은 이미 8시를 넘기고 있었다. 당연히 부모님과 살던 집에서의 통근시간은 지난 상태였다.
"하아……"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약간의 답답함과 해방감이 느껴지는 그러한 한숨이었다.
그렇게 어느정도 시간을 떼우고 있자, 찰칵. 하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내 츄리닝 바지와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키리노가 우중충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키리노는 아무말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나는 그 뒤를 쫓아 들어가면서 말했다.
"뭐좀 먹을래?"
"…생각없어"
갈라진 목소리. 꽤나 엄청나게 소리를 지른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뭐 이쯤되면, 대충 예상은 간다만… 이 상태로 바로 본제로 들어가기도 좀 그렇고, 좀 분위기를 풀어볼까.
"그러고 보니, 네 맨얼굴 엄청 오랜만에 보는것 같네"
키리노는 이상하게도, 엄청 옅은 화장이기는 하지만 항상 집에서 화장을 하고 지낸다.
언제부터였지? 키리노가 독자모델을 시작하고나서 부터였나. 뭐, 그런고로 키리노의 맨얼굴을 본건 엄청 오랜만이라는 이야기다.
"!!"
그러자 키리노는 덜컥! 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키리노 보다 사이즈가 훨씬 큰 티셔츠라 그런지, 키리노의 동그란 얼굴이 쉽게 가려졌다.
"너는 화장 안하는 쪽이 훨씬 귀여운데"
"……"
키리노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내리며,
"…진짜?"
"거짓말 해서 뭐하냐"
"……"
일부러 키리노의 분위기를 편하게 하려고 이야기를 한것이기도 하지만, 솔직한 본심이기도 했다. 키리노는 화장 안하는 쪽이 더 귀엽다고.
그리고 그런 나의 바램대로 키리노의 얼굴에서 조금, 긴장이 풀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이쯤이면 될까. 나는 천천히, 본제를 입에 담았다.
"그래서, 무슨일인데?"
"………"
"말 안할거냐?"
"……………했어"
"응? 뭐라고?"
그러자 키리노는 고개를 팍! 하고 들며,
"가출했다고!"
"……하?"
키리노의 입에서 나온 너무나도 어이없는 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냈다.
"…잠깐만. 너, 방학도 아니고 내일 당장 등교해야할텐데 가출이라고?"
"그런고로, 여기서 살테니까"
"하아……"
나는 지끈지끈 아파오는 이마를 붙잡고 말했다.
"부모님이 바보도 아니고 여길 모르겠냐?"
"……"
키리노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분하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대체, 가출은 왜 한건데?"
"…싸웠어"
"어머니랑?"
"…응"
"뭐 때문에?"
"…………"
키리노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굳게 닫았다.
어서 말하라고 다그칠수도 있겠지만, 키리노의 성격이라면 오히려 역효과겠지. 키리노도 멍청이는 아니다. 여기서는 키리노 본인이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인 대답을 하는 수 밖에 없겠군.
"어머니는 그렇다 쳐도, 아버지는 어떻게 할건데? 아버지 성격, 너도 잘 알잖냐"
그 말에, 키리노는 대답 없이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아버지는 키리노를 끔찍하게 아끼고 계시지만, 훈육에 있어서는 용서가 없다. 그건 나도 물론이고, 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일텐데.
"진심으로 가출한다고 해도 얼마 못갈텐데 이런 장난식의 가출이 오래갈리가 없잖냐. 그건 나보다 가출한 너가 더 잘 알고있지 않냐?"
그 말대로다.
키리노가 나름대로의 어떠한 각오로 가출을 시도한지는 모르겠지만, 가출을 계획한 시점에서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굳이 가출을 하고 찾아온게 내 원룸이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키리노가 내 상상 이상으로 멍청한게 아니라면, 어떠한 이유가 있는게 분명했다.
"…뭐야. 그래서 지금 당장 나가라고?"
키리노는 눈을 확 치켜들며 그렇게 말했다.
참나. 정말, 하나하나 지는게 없는 여동생이구만.
"내 말은. 이런 의미없는 가출은 그만두는게 좋다는 거지"
설마설마 하지만, 그 아버지라면 옛날의 나처럼 키리노를 삭발시킬지도 모른다고.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다.
"…그럼"
다시 한번 분한듯, 키리노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여기 있을래"
늦은 저녁시간이긴 하지만, 아직 전철이 끊기는 시간은 아니다. 옷만 마른다면 키리노 혼자 집에 돌아갈수도 있을 것이고, 키리노 혼자 가는것이 불안하면 내가 직접 집에 데려다줘도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울것같은 연약한 눈으로 나를 올라다보면서 말하는 키리노의 표정을 보고 안된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뭐, 이런 경우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겠지.
"오우, 마음대로 해라"
혹시나 가출한 여동생을 감싸준게 문제가 된다면, 또 아버지에게 한대 얻어맞으면 될일이다.
아카기 녀석이 이 상황을 듣는다면 나를 '시스콘' 이라면서 매도하겠지. 뭐,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이야기다. 음음. 난 진짜 키리노한테는 약하구만.
무언가, 오래간만에 자신이 오빠라는 감각을 느끼며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우우우웅-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근데, 넌 뭐하고 있냐"
"보면 몰라? 컴퓨터 키잖아"
"…너. 설마설마 하는데, 집에서 에로게임 하다가 들켜서 가출한건 아니겠지"
"내가 넌줄 알아? 자기는 여동생 컴퓨터로 에로사이트나 들어갔던 주제에"
"그거랑은 상관없잖냐!"
"내가 가출한것도, 상관없어"
"그러십니까…"
나는 괜히 계속 말싸움을 하면 머리만 아플것 같기에 이야기를 흐지부지 끝낸후, 책상에서 책을 꺼내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내가 알고있는한, 키리노와 말싸움을 해서 적어도 호각으로 싸울만한 녀석은 쿠로네코뿐이다. 나는 상대도 안된다고.
키리노는 침대 위에서 벽에 등을 기댄채 책을 피는 나를 보더니 말했다.
"뭐야, 당연히 너도 같이 하는거잖아"
"오늘치 다 끝내야해. 나도 자취 시작한게 공부 때문이니까"
남매가 나란히 앉아 하나의 컴퓨터로 에로게임을 하는것도 한두번이 아니기에 상관은 없었지만, 나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채 거절했다.
키리노는 뭔가 불만이 있는듯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지만, 11월에 모의고사가 있기에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키리노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외로 순순히 포기한채 혼자서 에로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슬아슬하게 오늘 계획해둔 분량까지 끝내고 시계를 보니 10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나는 보고있던 책을 접으며, 아직도 에로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키리노에게 말했다.
"내일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그만 자자"
"왜?"
"왜라니… 네 교복 가지러 집에 가야하잖아"
"맞다…"
키리노는 다시 집 생각을 해서 괴로운건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느정도 키리노가 납득한것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경우라면 당연히 키리노가 침대 위에서 잘테고 나는 바닥이겠지. 나는 '뭐, 하루쯤은 어쩔 수 없나' 하는 간단한 기분으로 몇일전에 가져왔던 짐들을 뒤지기 시작했지만,
"어, 어라?"
어, 없다!?"
하긴 있을리가 없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예비 이불까지 가져올 정도로 준비성이 철저한 고등학생은 없을것이다. 이런 상황이 일어날줄 누가 알았겠냐고!
"왜그래?"
그렇게 말하는 키리노는 이미 당연하다는 듯이 내 침대에서 잘 준비까지 끝낸후였다.
제길, 괜히 얄밉네.
"예비 이불이 없어"
"뭐??"
"그렇다고 네 침대에 기어들어가지는 않을테니까 걱정마셔. 대충 옷 껴입고 바닥에서 자면 되니까"
"엣!? 아, 그, 저, 그러니까…"
내가 이것저것 옷들을 주섬주섬 입고 있자, 키리노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자"
라며, 침대의 바닥을 손바닥으로 팡팡. 치고 말했다.
"엉?"
순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사람이 한명 들어갈 정도의 공간을 비워주는 키리노의 모습을 보고… 아니, 잠깐. 뭐라고?
"야, 키리노"
"…왜"
"너 머리. 괜찮냐?"
"아, 진짜!!"
"우옷!?"
발끈한 키리노는 그 상태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잡은후(구체적으로는 내 자명종 시계) 그것을 나에게 던지려고 했다가 천천히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여긴 네 방이니까. 감기라고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키리노, 너…"
"괜히 빚을 만들긴 싫으니까. 시스콘인 너라면 분명 변태같은걸 요구할테고"
"나도 네 몸엔 관심 없거든!?"
그럼 그렇지! 감동해서 손해봤다!!
나는 투덜투덜 중얼거리며 침대위로 올라가, 키리노의 옆에 누웠다.
"……"
"………"
그리 작은 침대는 아니기에 2명이 자는건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좁은감이 들었다.
서로의 등을 마주댄채, 어떻게든 몸을 빼도 서로의 몸이 닿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러고 있자, 왠지 모르게 키리노 쪽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것 같았다. 샴푸고 바디 샴푸고 전부 내가 썻던것과 같은 것일텐데고, 묘하게 더 달콤한 냄새가 나는듯한… 제길 키리노 녀석. 괜히 이상한 말을 해서 신경쓰이게 만들고…
내 등 뒤의 키리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렇게, 조금도 몸을 뒤척일 수 없는 상황에서 번뇌에 빠져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우웅…"
자면 안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옆에 키리노가 있기에 불편해서 그런것인지, 나는 얼마 자지도 못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키리노가 있다는 것을 깜빡 한채, 불편한 자세에서 탈출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등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의 이질감 때문에 키리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으으, 불편해. 차라리 바닥에서 자는게 서로한테 편할것 같은데.
그리고 그 순간,
콰쾅!!
하고, 창문 밖에서 성대한 천둥소리가 들렸다. 쿠쿠쾅! 하고 한차례가 더. 동시에 내 등뒤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강해졌다.
"키리노, 안자?"
"………응"
"불편해서 잠이 안오는거면, 그냥 내가 바닥에서 잘테니까"
"안돼! 절대 안돼!! 내려가면 가만히 안둘줄알아!!"
키리노는 그렇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나의 몸을 끌어당겼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그것은 키리노가 양손을 사용한채 필사적으로 나의 등을 잡고 있는 것이었다.
"엥? 너 설마…"
그리고 그 손은, 엄청나게 떨고 있었다.
"천둥이 무섭냐?"
"~~~~읏!"
좋았어! 키리노의 약점 하나 알아냈다!
"그, 그럴리가… 애, 애도 아니고…"
"흐응. 그래?"
그 키리노의 한마디에 완전히 잠기운이 달아났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장난기가 생길 수 밖에 없다고!
"그러면 난 좀 출출해서 편의점좀 갔다올테니까"
"에, 엣…?"
"혹시 뭐 먹고 싶은거 있으면 사올게"
"아, 그,"
동요하고 있다. 동요하고 있어! 아직도 침대에 누운채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것 자체만으로도 거짓말을 알수있을텐데.
흐흐흐. 키리노 녀석,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나는 키리노를 더 놀려줄 속셈으로 고개를 살짝 뒤로 돌리며 말했다.
"없으면 나 혼자 갔다올ㅡ"
말하다가, 멈췄다.
"어, 어이 키리노!!? 너 우냐!?"
키리노는 소리조차 내지 않은채, 동그란 눈에서 동그란 눈물을 뚝뚝뚝 흘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내 옷을 찢어버릴 기세로 등을 잡은채로 말이다.
"미안! 미안! 농담이야! 농담이니까! 울지마!"
항상 나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며 욕을 하던 여동생의 우는 모습은 오히려 공포라고! 천둥따위보다 배는 무섭다!!
그렇게 키리노를 달래주려고 한참을 당황하던 나는 문뜩,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 키리노와 사이가 좋았던 시절.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초등학교 2~3학년때 정도의 기억 말이다.
키리노는 비오는날을 정말로 싫어했다. 정확히는 천둥번개가 치는 날씨. 딱 지금 같은 날씨다. 그리고 그런날엔 항상 밤에 혼자 잠들지 못해, 몰래 내 방으로 들어와 나와 같이 잔적이 많았다. …뭔가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자물쇠 관리를 안한것 같네.
너무 옛날 일이기도 하고, 키리노와 사이가 나빴을때는 의식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지만, 이 상황에서 키리노의 우는 얼굴을 보니 떠올랐다고 할까… 막연히 내 등뒤에서 천둥이 무섭다며 반쯤 울면서 자던 그 어릴적의 키리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너 옛날엔 천둥이 무섭다면서 내방에 숨어들어왔었지"
나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쉰 후, 훌쩍. 코를 먹으면서 내 등에 눈물을 닦는 키리노에게 말했다.
"이제 다 나은거 아니었어? 집에서는 어떻게 했는데?"
"내방은 메루루가 잔뜩 있으니까 무섭지 않단말이야"
"그러냐"
여러의미로 대단하구만.
천둥소리가 잦아들고 키리노의 떨림이 서서히 멈추고, 나는 다시한번 말했다.
"키리노"
"…왜"
"그래서, 무슨일인데?"
아까와 같은 질문.
아까는 흐지부지 넘겼겠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다시 한번 나의 입지. 오빠로서 여동생을 걱정하고, 실수를 하지 않게 도와줘야 하는 역할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키리노는 나의 등을 다시 꼬옥 잡고는 입을 열었다.
"…여자친구, 만들지 않겠다고 했잖아"
"네가 남자친구가 생기기 전엔 말이지"
남매로서는 조금 위험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우린 그런 약속을 했었다.
내가 소중한 여동생인 키리노가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것이, 여태까지 나를 의지하고 도움을 바랬던 여동생이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것이, 가족을 뺏긴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자 자취하는 집에 여자를 데리고 온다고? 여자친구가 아니면 그런짓 안해! 그런건 오히려 가족이 더 챙겨주는거잖아!"
"그러니까 오해라고. 말을 듣기도 전에 먼저 수신거부하고 이야기도 안들었잖냐"
하지만 키리노는 반대였다. 교활하게도 여동생의 남자친구가 생기는건 용납하지 못했으면서 여자친구가 생긴 나를 인정해줬다. 응원해줬다.
그러면서도, 나와 똑같이 괴로워했다.
키리노의 그런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나는 쿠로네코와 헤어졌다.
물론 지금도 쿠로네코를 만나면 즐겁고 재미있다.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뭐, 가족이라는 것을, 특히 여동생이라는 것을 지키고 싶어하는 것은 이 세상에 '오빠'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구.
"…내 얼굴을 보자마자 질렸다는 표정이나 지었으면서"
"응. 미안하다"
키리노는 이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듯. 무거운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나가고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미칠지경이었는데……"
"너… 외로웠던거냐?"
"읏…! 바보취급 하지마. 너도 내가 없어서 무지하게 외로워 하고 있다고 까만게 이야기 해줬거든?"
그럼 그렇지. 이 타이밍에 키리노가 아무 이유도 없이 나한테 찾아오지는 않았을것이다.
쿠로네코도 참 이상한 말을해서 말이야. 키리노가 저번처럼 외국에 간것도 아니고, 얼굴을 보려면 언제든 볼 수 있는데 내가 외로워할리가…
어라?
그러고 보니, 몇일동안 계속 느껴지던 가슴속 갑갑함과 짜증감이, 거짓말처럼 풀어져있었다.
어이어이, 거짓말이지 이거? 진짜라면 난 대체 어느정도의 시스콘이라는거냐!!!
"…그리고, 내가 외로워하면 안돼? 뭐가 잘못됐어? 자기는 미국까지 날아와놓고"
"느아마앙마얼마아어마아마아"
"…? 뭐야. 왜그래?"
키리노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쿄우스케"
"오, 오우…"
"같이 돌아가자"
키리노의 그 말 역시, 내가 미국으로 날아가 키리노에게 한 말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
거기서 나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뭐가 웃겨?"
"참, 피는 속일 수 없다 싶어서"
"…?"
어렸을때 부터, 우리 남매는 조금도 닮지 않은 남매였다.
생김새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좋아하는 거나 싫어하는 것, 성적도, 취미도, 조금도 닮은점이 없었다. 그 대부분이 내가 키리노에게 모자란 구도였지만.
하지만 이렇게 보니, 우리 남매는 조금도 틀린점이 없었다.
서로에게 애인이 생기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키리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 것이, 내가 자취를 시작한것이, 너무나도 짜증이 나고 외로웠다. 그 상황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때, 우리의 친구인 쿠로네코가 그 등을 밀어줬다.
참나, 진짜 너무 똑같아서 기분나쁠 정도라고.
"키리노"
"응"
나는 후- 하고, 크게 숨을 내신뒤, 키리노에게 말했다.
"같이 돌아가자"
**
그리고 주말.
몇일전까지 내가 살던 자취집에서 모임을 갖겠다는 사오리의 야망은 깔끔하게 부서지고, 우리는 평소처럼 키리노의 방에 모여서 놀고 있었다.
"설마 했지만 한달도 안돼서 자취를 그만두다니… 소인이 생각하던 쿄우스케씨는 그렇게 근성없는 남자가 아니었소만…"
"내가 네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슬슬 궁금하다 야"
그 날 이후, 나는 자취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이야기 한게 없었으면 조금 곤란해질뻔했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나를 믿어주시고, 오히려 키리노에 관한것은 내가 해결하는것이 좋다고 생각하셨다. 그렇기에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설득시켜주셨겠지만, 솔직히 그 정도의 신뢰가 조금은 부담스러운것도 사실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쿄우스케씨"
"아니 뭐…"
내가 대답을 흐리며 옆을 쳐다보자, 키리노 역시 약간 얼굴을 붉힌채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뭐 어쩌다보니. 아무래도 혼자 사는게 여간일이 아니더라고"
"호오. 그렇습니까? 하긴, 식사부터 시작해서 빨래, 청소, 쓰레기버리기 등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한번에 하기엔 힘든 일이지요"
그러자, 옆에서 이야기를 담담히 듣고 있던 쿠로네코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듯한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시스콘"
"윽!?"
그리고 곧바로, 옆에 있는 키리노 쪽으로 스윽.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브라콘"
"윽!? 무, 무슨 소리야 이 똥고양이야!"
"호오. 인정하지 않는거야? 브라콘 여동생양?"
"그러니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
"뭐!?"
아직도 담담한 표정의 쿠로네코는 그렇게 말하더니, 주머니 속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것에 무언가 찔리는것이 있는지, 키리노는 쿠로네코를 향해 조금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뭘 하려는 거야…?"
그러자 쿠로네코는 자신의 핸드폰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조작하며,
"그 날 전화통화한거. 다 녹음해놨으니까"
엥? 전화통화?
"뭔데 그래?"
"넌 닥쳐!!"
키리노는 호기심에 쿠로네코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던 나를 문답무용으로 차버렸다. 아프구만.
쿠로네코는 후후후. 하고 입을 가리고 웃으며,
"브라콘이 아니면 상관없는거 아닐까?"
"틀면 죽인다!! 죽일거야!!"
카악! 하는 기세로 쿠로네코에게 달라들어, 그 양손을 구속하는 키리노.
하지만 쿠로네코는 훗, 하고 웃으며, 한손으로 핸드폰을 조작하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아아 정말. 울고 있는 키리노양의 목소리를 다같이 들어볼까?"
"죽인다고 했지!! 아아 진짜아아아!!!"
'호오호오' 라면서 가까이 다가오는 사오리와, 키리노를 놀리면서 웃고 있는 쿠로네코. 그리고 키리노에게 발로 차이고도 가까이 다가오는 나.
키리노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 정말로 싫어어어어어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