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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GULJi96aoSzS 2013/09/06(金) 19:45:49.01 ID:6dzN3YYg0
아까까지 바로 옆에 있던 유키노시타가 떨어진 탓일까.
좀 쌀쌀함을 느낀다.
문득 그 온기의 원천으로 눈을 돌리자 유키노시타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혹시 내 쳐다보는 걸 느끼고?
그런 생각으로 가볍게 쇼크를 받고 있다가 발밑이 춥다는 걸 눈치 챘다.
유키노시타의 자세는 훌륭해서, 꼿꼿이 등을 펴고, 검은 니삭스를 신은 가늘고 긴 다리도 똑바로 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뻗어 있다.
그 모습은 마치 그림과도 같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서도 내 눈은 정직했다.
시선이 위쪽으로 위쪽으로 향한다…….
니삭스와 스커트 사이는 뭔가 두근두근하는구나…….
아,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소부 고교는 냉난방완비이지만 방과 후 하교시각이 가까워지면 난방이 꺼진다.
바지를 입고 있는 나와 스커트인 유키노시타가 느끼는 추위도 다르겠지.
315: ◆GULJi96aoSzS 2013/09/06(金) 19:49:14.53 ID:6dzN3YYg0
문고본을 50페이지 정도 읽은 쯤에서 어느 쪽이라 할 것 없이 책을 덮는다.
이제 슬슬 하교시각이다.
나는 유키노시타의 컵도 같이 닦고 선반에 2개 바싹 붙이듯이 올려 놓는다.
부주의하게 또 깨지지 않도록 신중한 손놀림으로 행한다.
컵을 올려놓기 전에 일단 치워놓은 3인용의 홍차통을 들어 원래 장소에 세팅하려고 했다.
통이 가벼운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기색을 감지했는지 유키노시타는 이렇게 말했다.
「슬슬 그 홍차도 사서 채워놔야겠네」
319: ◆GULJi96aoSzS 2013/09/06(金) 20:46:03.30 ID:6dzN3YYg0
× × × ×
둘이서 이렇게 케이요 선에 타서 외출하는 건 벌써 몇 번째일까.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마침 쾌속이 왔지만 한 번 그냥 보냈다.
쾌속으로 가면 정차역이 한 역 줄어서 약간 빨리 도착하지만, 왠지 모르게 완행전차에 타고 싶었다.
유키노시타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특별히 이의는 없었다.
외톨이 동지, 그다지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다.
딱히 말할 내용이 없는 게 아니다.
그저,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
별것 아니지만, 둘에게는 소중한 시간이다.
320: ◆GULJi96aoSzS 2013/09/06(金) 20:47:20.36 ID:6dzN3YYg0
와인레드색의 띠가 붙은 차량에 타고서 바로 코마치에게 저녁 먹고 간다는 메일을 보냈다.
「설마라고는 생각하지만, 상대는 히라츠카 선생님이야?」
유키노시타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견제를 해온다.
전에는 진지하게 히라츠카 선생님과의 관계를 의심했으니까 말이지.
「아니, 코마치야」
나에게는 바람 필 정도의 주변머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래」
라고만 대답하고 그 이상은 파고 들지 않았다.
또다시 기분 좋은 침묵의 시간이 잠시 이어졌다.
321: ◆GULJi96aoSzS 2013/09/06(金) 20:49:45.62 ID:6dzN3YYg0
내릴 역에 도착하자 나는 아까의 추궁에 대한 복수를 하듯
「한 정거장 더 타고 갈까」
하고 농담을 던져 보았다.
하지만 즉각 반격을 당한다.
「너 아직 뭔가 찔리는 게 있나 봐?」
귀신 같은 표정으로 가만히 노려본다.
나는 공포신문을 한 회분 봤을 때 같이 생명의 등불이 약해진 느낌이 들었다.
322: ◆GULJi96aoSzS 2013/09/06(金) 20:53:37.67 ID:6dzN3YYg0
역을 나서자 휭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왔다.
무의식 중에 코트의 옷깃을 세웠다.
소금 냄새와 함께 겨울의 발소리도 날라 왔다.
유키노시타는 턱 언저리에 손을 대고 나와 자신의 목덜미를 비교해본다.
이윽고, 푸른 바탕에 하얀 눈의 결정인지 순록 같은 게 새겨져 있는 목도리로 손을 뻗는다.
휘익.
찬바람이 또 한 줄기.
이번에는 유키노시타의 손을 세차게 때린 듯, 후하고 하얗게 된 숨을 불어 손을 녹였다.
323: ◆GULJi96aoSzS 2013/09/06(金) 20:55:43.97 ID:6dzN3YYg0
쇼핑몰에 들어가 항상 가는 홍차전문점으로 향했다.
아주 낯이 익어버린 점원이 의미를 담은 웃음을 지으며 맞이한다.
나도 유키소시타도 약간 부끄럽다.
오늘은 처음부터 살 게 정해져 있다.
헤멜 것 없이 3인용 홍차의 통을 손에 쥔 유키노시타는 계산대로 향했지만 나는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니?」
유키노시타가 돌아봤을 때 나는 샹파뉴 로제의 통을 들고 있었다.
324: ◆GULJi96aoSzS 2013/09/06(金) 20:57:54.10 ID:6dzN3YYg0
「……, 어, 그건?」
「내 거야」
최근 서툰 수학 공부를 시작한 덕에 스트레스를 자주 느낀다.
유키노시타와 같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책상에 앉지만 속이 뒤집어 지고는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MAX 커피는 공부를 끝내고 상쾌한 기분일 때를 위해 남겨두고 싶다.
그리고 이 샹파뉴 로제를 마시면 유키노시타를 생각하며 힘을 낼 수가 있을 것 같다.
325: ◆GULJi96aoSzS 2013/09/06(金) 20:59:35.42 ID:6dzN3YYg0
「나도 살까……」
턱에 손을 얹고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는 유키노시타.
뭘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표정이 무너져 있다.
유키노시타의 마음속을 읽고자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째려보듯이 돌아서더니 무표정하게
「뭐야?」
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