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326: ◆GULJi96aoSzS 2013/09/06(金) 21:01:37.76 ID:6dzN3YYg0
아니, 아무말도 안 할게요.
목숨이 아까우니까.
그래도 그건 사는 거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아직 더 할 말 있어?」
그렇게 말하는 유키노시타의 눈은 「이 이상 아무말도 하지마. 이 이상 아무 생각 하지마」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327: ◆GULJi96aoSzS 2013/09/06(金) 21:07:12.49 ID:6dzN3YYg0
우선은 홍차를 샀다.
이 다음은 책방에 들렸다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도 가자고 해볼까.
아……, 그리고 또 한 곳 들러야 하는구나…….
「유키노시타, 미안한데 조금 더 들렀다 가면 안될까?」
「아까 코마치하고 메일하는 것 같던데 뭐라도 사려고?」
「아니, 책방에 들러서 수학 문제집 사려고. 수Ⅰ 정수 문제만 있는 얇은 걸로.」
그건 그렇고 정수 문제라는 건 왜 그렇게 어려운걸까.
책장을 넘기다 보면 갑자기 첫 문제부터 그렇고 말이지.
수학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갑자기 그런 문제가 나오면 기가 꺾이잖아.
그리고 「정수」라는 이름인 주제에 정답에 √나 허수가 등장한다.
그거 전혀 정수가 아니잖아.
이거 어떻게 된 일이야?
328: ◆GULJi96aoSzS 2013/09/06(金) 21:09:15.68 ID:6dzN3YYg0
「그래. 어느 정도 패턴이 정해져 있고, 등식변형을 적절하게 할 수 있으면 문제는 없겠지만
여러 유형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도 중요해」
「그래, 그래서 내가 혼자 고르는 것보다 같이 찾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응, 나도 같이 골라줄게」
유키노시타는 내가 부탁한 게 기쁜 듯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 미소만큼은 힘을 내야지.
332: ◆GULJi96aoSzS 2013/09/07(土) 00:16:39.02 ID:eLclzfIK0
「그 다음에 괜찮으면 사이제에 들렀다 가지 않을래? 코마치한테 먹고 간다고 메일해뒀어」
「어머, 적극적이네. 너한테 그런 구석이 있을 줄이야……」
하고는 꼬물꼬물대고 있다.
의외로 밀어붙이는 데는 약하구나…… 메모해야지…….
내가 폭군 가장이고 유키노시타는 귀여운 부인인가.
…….
아니, 잠깐. *귀녀(鬼女)판 기본 닉네임이 「귀여운 부인」이었지…….
(*역주 : 2ch의 게시판)
역시 유키노시타는 이쪽이겠지.
갑자기 므흐흐한 시츄에이션 망상이 사그라들고 한기가 들었다.
유키노시타가 수줍어하는 사이에 재빨리 생각을 돌려 눈치채게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아니……. 무리였다.
「말하고 싶은 거 있니?」
유키노시타의 날카로운 감 앞에서 나는 살짝 망상도 못하는 건가.
나한테는 내심의 자유가 용납되지 않는 거냐고?
333: ◆GULJi96aoSzS 2013/09/07(土) 00:18:51.57 ID:eLclzfIK0
탁 트인 곳에 높이 솟아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둘이서 바라보며 에스칼레이터를 올라 책방으로 향했다.
유키노시타의 충고를 따라 수Ⅰ유형문제에 특화된 문제집을 고르기로 했다.
진지한 눈빛으로 찾는 유키노시타의 옆모습은 언제봐도 아름답다.
지금 나 혼자 독차지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에 기쁨이 치밀어오른다.
하지만 유키노시타는 나에게 그런 행복감을 한숨도 느끼게 해주지 않는다.
「히키가야 군, 제대로 찾도록 해. 애초에 네가 지금까지 노력을 게을리해왔으니까 이렇게 된 거 아니야?」
하고 설교를 듣고 말았다.
잠깐은 행복하도록 놔둬도 괜찮을 텐데…….
나는 속이 배배 꼬여 유키노시타에게 장난을 치기로 했다.
334: ◆GULJi96aoSzS 2013/09/07(土) 00:24:48.64 ID:eLclzfIK0
유키노시타가 책꽂이에서 문제집을 꺼내려고 손을 뻗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나도 즉각 손을 뻗어 유키노시타의 귀엽고 작은 손을 만진다.
유키노시타는 꺅하고 소리를 내며 재빨리 손을 움츠린다.
얼굴도 빨갛게 된 게 귀엽다.
그럼, 다시 한 번.
유키노시타가 손을 뻗었다, 지금이다!
하지만 한 번 뻗은 손이 일순 되돌아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손등을 책꽂이를 향해 힘껏 내리친다.
아, 아프다…….
내 못된 장난에 유키노시타는 아주 심통이 나버렸다.
계산대를 향해 걷는 내 뒤에서 언짢다는 오라를 내며 걷는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머리를 굴려본다.
유키노시타와 마음으로 맺어진 사이가 되기는 했지만 결코 여기까지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고는 할 수 없다.
사소한 일로 삐걱대기도 했다.
335: ◆GULJi96aoSzS 2013/09/07(土) 01:10:20.32 ID:eLclzfIK0
계산대에 다다르고 나니 문득 유키노시타의 기척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내 공부를 위해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문제집을 찾아주었는데 조금 너무했으려나.
당황해서 유키노시타를 찾고자 두리번두리번한다.
「히키가야 군, 뭘 찾고 있는 거야? 네가 좋아하는 관능소설이라면 저쪽에 있는데」
내 바로 뒤에서 기척을 죽이고 있던 유키노시타가 인왕도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표정으로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음의 여왕 유키노시타가 흩날리는 강렬한 블리자드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나도 엉뚱한 발언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양쪽 다인지, 가게 안이 순간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336: ◆GULJi96aoSzS 2013/09/07(土) 01:11:41.33 ID:eLclzfIK0
다음 순간, 유키노시타에게 가게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동시에 내 옆으로 돌아온 유키노시타가 얼굴이 빨개진 채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시선이 전부 나에게 꽂혔다.
엑, 뭐지 이 시선?
난 피해자라고.
난 억울하다고, 억울해!
평소 학교 안에서 언제나 발휘되고 있던 나의 스텔스 모드가 여기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