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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 ◆GULJi96aoSzS 2013/09/15(日) 21:01:37.02 ID:uhzeDYYe0
만나기로 한 벤치에 도착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유키노시타는 없었다.
여전히 뭘 살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겠지.
단지 의례적인, 어찌되든 상관없는 선물 교환인데 뭘 그리 진지한지 모르겠다.
그런 유키노시타의 모습을 상상하고 혼자 웃고 말았다.
하지만 언제나 성실하고 열심이라 바보 같을 정도로 정직하고 서투른 유키노시타 유키노를 나는 사랑한다.
557: ◆GULJi96aoSzS 2013/09/15(日) 21:03:22.61 ID:uhzeDYYe0
100엔 샵 안에 들어가 첫 코너 통로부터 차례대로 유키노시타를 찾는다.
회색 플라스틱제 장바구니에는 드문드문 물건이 들어있다.
「선물 다 골랐어?」
등 뒤에서 말을 걸자 유키노시타는 깜짝 반응하더니 약간 늦게 돌아섰다.
「……누구야? 놀라잖아.」
내 얼굴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서 이런 말을 내뱉는다.
「아무리 존재감이 없다곤 해도 날 가볍게 책망하지 말아 줄래.」
그건 그렇고, 유키노시타는 대체 뭘 골랐을까?
신경 쓰여 장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려고 하자 말없이 노려보더니 등 뒤로 숨겼다.
558: ◆GULJi96aoSzS 2013/09/15(日) 21:05:35.36 ID:uhzeDYYe0
바구니 안에는 문고판 미니 사전이 들어 있었다.
표지에는 「사자성어」「유의어」「경조」 같은 게 쓰여 있다.
정말이지 유키노시타다운 선택이다.
축제 잿날 같은 때 상점가 제비뽑기로 꽝이 나오면 유감상을 수여받는 경우가 있다.
그 물건 자체가 매우 유감스러운데 둘 자리가 마땅치 않은 쓸데없는 물건이면 더욱더 유감스러운 기분이 된다.
그래서 나는 혹 내가 선택한 게 당첨돼도 괜찮도록 뻥튀기와 주스를 골랐다.
이거라면 형태도 남지 않고, 맛있게 먹어치울 수 있다.
무지 실용적이면서 현실적이다.
나는 「사자성어」「유의어」「경조」이라고 하는 이런 유에 대해서는 일단 상식을 갖고 있다.
기왕이면 현저하게 결여되어 있는 유이가하마나 우리 코마치한테 가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559: ◆GULJi96aoSzS 2013/09/15(日) 21:08:04.23 ID:uhzeDYYe0
「그런데 너 래핑 봉투 갖고 있어?」
「아니, 누구한테 선물할 일이 없어서 없어.」
왠지 꼼지락꼼지락하면서 그렇게 대답한다.
「자질구레한 물건이 들어갈 만한 거라면 아까 샀으니까 이따가 한 장 줄 게. 무늬도 다 다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티 안 내는 배려를 보이자 유키노시타는 내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한 듯,
「응, 고맙게 받을게.」
하고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그런 기우도 이제 곧 끝이다.
유키노시타는 내가 그렇게까지 생각할 걸 눈치 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567: ◆GULJi96aoSzS 2013/09/16(月) 00:15:18.75 ID:j357faEb0
× × × ×
유키노시타는 쇼핑을 마친 뒤 헤매지 않고 벤치로 왔다.
입점 전에 몇 번이나 위치를 확인한 게 주요한 듯 했다.
내 옆에 걸터앉아 래핑 봉투와 부속품인 리본, 실을 건넸다.
이다음은 수열 문제집을 사고 홍차를 마시면 오늘 예정은 종료다.
저번 방문했을 때 부끄러운 일이 있었던 서점에 들렀다.
수I 정수 문제만 실린 문제집을 이전 여기서 샀는데 이게 꽤 괜찮았다.
덕분에 정수 문제와는 저항 없이 맞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같은 시리즈의 수열 문제집을 구입했다.
아마도 이후에도 이 시리즈를 한 권씩 격파하면서 공부하게 되겠지.
오늘은 유키노시타도 자기가 쓸 문제집을 찾을 여유가 있어서 전화번호부과 같은 두께의 *아카혼(赤本)을 휙휙 넘겨보고 있다.
(역주 : 대학수학용 문제집의 한 종류)
그리고 내가 고른 것보다 훨씬 어려워 보이는 국공립이과수학이라고 쓰여 있는 문제집을 한 권 골랐다.
568: ◆GULJi96aoSzS 2013/09/16(月) 00:18:27.98 ID:j357faEb0
계산을 마치고 무척이나 단골이 된 홍차전문점에 들렀다.
집에서도 공부하면서 틈틈이 마시게 된 샹파뉴 로제를 둘이서 맛보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된 것일까. 둘이서 몇 번이나 이렇게 컵을 맞대고 보내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이게 몹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된다고 해도 분명 언제까지고 신기하게 느껴질 테지.
티컵 수면에서 한들한들 흔들리는 내 얼굴을 보면서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키노시타는 시종 평온한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569: ◆GULJi96aoSzS 2013/09/16(月) 00:30:10.50 ID:j357faEb0
× × × ×
케이요선에 승차해 귀가에 오른다.
오늘은 처음부터 유키노시타와 이렇게 지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갈 때 자전거를 타지 않고 버스를 이용했다.
그래서 오늘도 유키노시타와 같은 역에서 내려 집 앞까지 배웅할 수 있었다.
동지도 끝나고 일몰이 조금 늦어졌지만 변함없이 해는 짧고 차창으로 칠흑의 하늘이 보였다.
어둠을 밝히는 인공적인 빛이 잇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간다.
이제 슬슬 배고픈 코마치가 돌아올 시간이다.
코마치한테는 어제 만들어둔 카레를 데워 먹으라고 메일을 보냈다.
578: ◆GULJi96aoSzS 2013/09/16(月) 07:04:17.39 ID:j357faEb0
× × × ×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는 법이다.
나와 유키노시타는 지금, 케이요선에서 흔들리며 귀가하고 있다.
나는 오늘 아침 자전거가 아닌 버스로 소부선 역까지 이동한 까닭에 돌아가는 길도 이렇게 같이 유키노시타와 둘이서 옆에 앉아 갈 수 있게 되었다.
동지를 지나 일몰이 조금 늦어졌다고 하지만 변함없이 해는 짧다.
차창으로 시커먼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 어둠을 밝히는 인공적인 빛이 잇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간다.
이제 슬슬 배고픈 코마치가 돌아올 시간이다.
어제는 오늘 귀가가 늦게 되는 걸 고려해 미리 카레를 여유롭게 만들어 두었다.
코마치한테는 그걸 데워 먹으라고 메일을 보냈다.
유키노시타에게는 코마치한테 메일을 보냈다고 알리는 것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이다.
외톨이 동지, 이렇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편안하다.
언제까지고 이런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렇게 기도하는 동안 무정하게도 전차는 내릴 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