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um
"당신은.... 누구?"
조그맣지만 도톰한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여린 미성. 아직 몽롱한 눈빛으로 미키야를 바라보던 소녀는 몸을 일으켰다. 몸을 덮고 있던 옷이 흘러내려 하얀 가슴이 고스란히 노출되었지만, 깨닫지 못 한 듯 하다. 소녀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어째서 여기에....?"
미키야는 당황하고 있었다. 분명 토우코씨는 이 아이를 인형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어찌된 것인가. 그동안 그는 공방 가람의 당의 직원으로서 많은 수의 인형들을 보아왔다. 그 중에는 사람과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똑같은 인형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이렇게 말하고 움직이는 인형은 없었다.
"나는.... 분명 죽었을 텐데. 그런데 어떻게? 어째서 살아있는 거지?"
소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몸을 만져보았다.. 느껴지는 감촉은 분명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또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몸은 본래 그녀의 몸이 아니다. 구체관절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과 똑같은 부드러운 육체. 무엇보다 본래 그녀에게는 있을 리 없는 부분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아버지가 만들지 않은, 그래서 그녀에게는 결여된 부분. 그녀를 정크(Junk)라 불리게 했던 빈 공간에는 잘록하지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허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소녀의 눈빛이 혼란으로 가득 차 흔들렸다.
"저기.... 괜찮니?"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의 상념을 깨웠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응시했다. 그녀가 눈을 뜨고 처음 보았던 인간은 얼굴 가득 걱정스러움을 담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얼굴, 평범한 목소리, 평범한 옷차림의 평범한 인간.
"이 곳은 어디지?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아니... 저기, 그렇게 한꺼번에 물어보면...."
미키야는 볼을 긁적이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순간 들어 올려진 그의 손을 본 소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너.... 어떻게 그 반지를 가지고 있는 거지?"
"응? 반지라니?"
미키야는 의아해하며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왼 손 약지에는 처음 보는 반지가 끼어있었다. 금색의 장미문양이 달린 작은 반지. 이런 반지를 한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더군다나 약지에 낀 반지가 의미하는 바는 약혼, 결혼을 약속하는 행위. 그 사실에 미키야는 당황해하며 허둥댔다.
"이런 건 한 적 없는데... 끄응, 안 빠지잖아."
빼보려고 힘을 줬지만, 반지는 손가락에 꽉 끼인 듯 빠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째서 너 따위가 나의 장미의 반지를 가지고 있는 거야!!!"
날카로운 외침. 순간 소녀로부터 강한 힘이 폭사되었다.
콰앙~!
"아앗~!!"
"미키야~!"
폭사하는 힘에 미키야는 뒤로 튕겨져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쓰러진 그의 앞을 황급히 료우기 시키가 가로막았다. 소녀에게서 방출되는 강한 풍압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조차 없었다. 방 안의 물건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어째서 네가 나의 미디엄이 되어있는 거지? 계약 같은 건 한 적 조차 없는데!!"
분노에 찬 소녀의 목소리 그녀는 똑바로 선 채 미키야를 응시했다. 소녀의 발은 땅에 닿아있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휘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허공에 떠 있었다.
파아앗~
소녀의 어깨 너머로 어둠이 솟아났다. 그 검은 그림자는 소녀의 새하얀 나신을 가리며 펼쳐졌다. 그 선명한 흑백의 대비는 아찔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마치 배덕의 증표인양. 그 모습에 미키야는 아픔조차 잊고 매혹되어 바라보았다.
결코 작지 않은 작업실을 가득 매운 기운. 칠흑의 날개를 펼치고 그렇게 그녀는 그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죽여주지."
아직까지 쓰러져 있는 미키야를 바라보며 소녀는 손을 치켜올렸다. 그 앞을 료우기 시키가 나이프를 든 채 대치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공간을 지배했다. 대립하는 두 존재 사이에서 더 이상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한 살기가 폭발하려는 순간,
"이런이런.... 적당히들 해 두지 그래?"
문 쪽에서 들려온 한 마디는 그 대치를 깨뜨려버렸다.
두근
익숙치 않은 심장의 박동.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이전의 나의 몸에 심장 같은 것은 없었기에. 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 것은 인지 이전에 존재 그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것. 이 두근거림의 정체는, 이 느낌의 정체는....
두근
그녀는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짧게 자른 하늘색 머리카락. 안경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 몸을 감싼 차색 코트. 미인이라 불릴만한 얼굴을 제외하면 평범한 인간의 모습.
두근
하지만 알 수 있다. 그녀는 나와 동류라는 것을. 인간을 흉내내어 만들어진, 인형(人形)이란 껍데기를 뒤집어 쓴 존재.
두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느낌을 설명할 수 없다. 마치 공명하는 듯 맥동하는 심장.
두근
동족혐오? 천만에. 그런 저열한 것이 아니야. 혐오라는 감정도 어느 정도 다른 존재에게나 품는 감정이다. 마치 거울을 보듯 너무나 닮은 그녀에게서 느끼는 이 감각은...
두근
동질감.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 없어. 그래, 그녀는 곧 나다. 그 것이 지금 이 느낌의 정체...
"미키야, 시키. 자리를 잠시 피해주지 않겠어?"
"무슨 소리야, 토우코. 저 녀석은 미키야를 공격했다고!"
토우코의 말에 시키는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마술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흐음... 그래서 저 아이의 알몸을 계속 미키야에게 보여줄 생각? 뭐, 나야 상관없지만.."
"그, 그건...."
능청스러운 그녀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 해 우물쭈물하는 시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어느새 일어난 미키야가 잡아 끌었다.
"자, 우린 나가 있자. 시키"
"하지만 미키야!"
"자아, 어서어서."
버둥거리는 시키를 끌고 나가는 미키야. 돌아보며 검은 날개의 소녀를 바라보고는 토우코에게 눈을 찡긋 해 보였다.
'.....능글 맞은 녀석'
토우코는 새롭게 발견한 고용인의 일면에 한숨을 쉬며, 작업실의 문을 닫았다. 돌아선 그녀 앞에는 어느새 바닥에 내려선 검은 날개의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만인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너.... 뭐야?"
"뭐야라니. 꼭 물건 대하는 듯한 말투는 그만둬주지 않겠어? 그보다 옷이라도 입는 것이 어때? 고스로리부터 메이드, 무녀복까지 종류별로 다 있는데 말야. 취향대로 골라입도록 해."
인형사는 구석의 옷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든 인형들의 옷이 가득 들어있는 그 옷장은 가히 인형전용의 드레스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대답과 동시에 소녀의 몸을 밝은 빛이 둘러쌌다. 곧이어 빛이 사그라드니 검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치 장례식 때 입는 상복과도 비슷한 검은 옷은 소녀의 흰 피부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호오, 옷 또한 일체였다는 건가? 그래도 약간은 아쉬운걸."
"허튼 소리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당신은 대체 뭐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토우코에게 소녀는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라며 토우코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피어 물었다. 폐 속 깊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토우코는 소녀와 마주했다.
"자아...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스이긴토(Mercury Lampe, 水銀燈)."
"으음... 아무 것도 들리지 않네요. 아무래도 토우코씨가 마술로 소리를 차단한 것 같아요."
아자카는 문에 대고 있던 귀를 떼며 말했다. 잠들어 있던 아자카는 급격한 마력의 흐름을 느끼고 깨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사정을 설명해주자 아까부터 계속 작업실 너머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노력중이다. '마술사' 로서의 호기심이라는 걸까? 평소의 아가씨 같은 모습은 버려둔 지 오래다.
"자력으로 사고와 행동이 가능한 인형이라니... 단순한 빙의인 걸까? 그런 기운은 느끼지 못 했는데...."
어느새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버렸다. 마치 토우코씨가 두 명 있는 기분이라서 난감해진다.
"이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 때 토우코씨가 작업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뒤따라 나오는 것은 예의 그 소녀다. 어느새 그녀는 검은 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꿈 속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모습.
"토우코씨, 그 아이는 대체 뭐죠?"
그 새를 참지 못 하고 토우코씨에게 묻는 아자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한 기세다. 그런 아자카를 진정시키며 토우코씨는 검은 옷의 소녀를 소개했다.
"자, 인사해. 이 아이의 이름은 스이긴토(水銀燈). 보다시피 인형이야. 전설 속의 인형사 로젠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 로젠메이든 시리즈의 제 1 돌(Doll)이지."
그렇구나. 스이긴토라는 이름이었구나. 수은등(水銀燈)이라... 뭔가 특이한 이름이다. 그나저나 정말로 인형이었다니. 그런 장면을 봐버렸으니 믿을 수 밖에 없지만.
"그리고 이 쪽은 료우기 시키. 가끔 나의 의뢰를 맡아주고 있어. 이 아이는 코쿠토 아자카. 나의 제자야. 마지막으로..... 이 곳 가람의 당의 직원이자 너의 미디엄, 코쿠토 미키야 라고 해."
성을 보면 알겠지만 둘은 남매야~라고 덧붙이는 토우코씨. 그런데 미디엄이라니? 아까 이 아이도 나한테 그런 소리를 했었는데.
"그런가. 네가 나의 미디엄이구나."
나에게 다가온 스이긴토는 예의 그 '미디엄' 이란 단어를 입에 담았다.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다행히 아까와는 달리 진정된 표정이다.
"아아, 스이긴토... 라고 해도 좋을까?"
"상관없어."
"나는 코쿠토 미키야. 미키야라고 불러도 좋아.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했지만, 그 미디엄이라는 건 뭐야? 아까도 그 것 때문에 나에게 화가 난 것 같던데."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스이긴토가 아닌 토우코씨가 해주었다.
"그건 내가 설명하지. 미디엄(Medium)이라는 것은 로젠메이든에게 마력을 공급해주는 존재를 의미해. 로젠메이든은 미디엄에게 공급받은 마력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쉽게 말해 마술사와 사역마의 관계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토우코의 말대로야. 너의 왼손에 있는 그 장미의 반지는 나와 너 사이의 계약의 증표. 나의 미디엄임을 증명하는 표식이지."
솔직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들여다 보았다. 활짝 핀 장미가 살아있는 듯 섬세하게 세공되어있는 반지. 하지만 증표니 표식이니 하는 대단한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력? 계약? 나는 그런 것과는 관계없는 일반인일 뿐이다. 아자카도 시키도 당혹을 감추지 못 하는 표정이다.
"말도 안돼요. 오라버니는 마술사도, 마술사용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그 미디엄이라는 것이 되었다는 거죠?"
"아자카의 말대로다, 토우코. 무엇보다도 네가 가져온 인형이 어째서 네가 아닌 미키야와 계약했다는 거지?"
"글세. 남의 인형에 멋대로 손을 댄 벌이 아닐까? 로젠메이든은 사역마와는 달라서 일반인도 충분히 힘을 공급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결론은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라는 것. 이렇게 된 이상 책임질 수 밖에 없나.
"음, 스이긴토. 아직 뭐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잘 부탁해."
무릎을 꿇고 악수를 청했다.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 했는지 눈을 깜박이며 내 손을 쳐다보는 스이긴토. 한참 후에야 마지못한 듯 손을 잡아온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인간이네. 토우코에게 들은 것보다 더 한심하잖아. 미리 말해두지만 미디엄이라고는 해도 단순한 마력공급원일 뿐이야. 나에게 명령을 내릴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아아, 명심할게."
퉁명스러운 그녀의 말을 흘리며 손을 흔들며 악수를 했다. 맞잡아 쥔 그녀의 손은 너무나 작고 매끄러웠다. 마치 부서질 것만 같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미디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