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stall
준의 방. 4명의 로젠메이든이 한 자리에 모여있다. 화창한 바깥 날씨와는 달리 방 안에 감도는 공기는 무거웠다. 모두들, 심지어는 항상 밝게 웃던 히나이치고마저도 얼굴을 굳힌 채, 신쿠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것으로 내 이야기는 끝이야.”
마침내 신쿠의 말이 끝나고, 방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모두가 애써 외면해왔던 사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부여된 숙명. 그녀들이 태어난 이유. 그녀들이 존재하는 이유. 단 한 명의 완벽한 소녀를 탄생시키기 위한 싸움, 앨리스 게임.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히나이치고가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눈은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그럼.... 더 이상 같이 놀지 못 하는 거야? 서로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거야?”
“무슨 소리예요!”
히나이치고가 울먹이며 하는 말에 스이세이세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쿠가 그랬잖아? 파파가 그 것을 원한다고.”
“그런 거 알 바 아니예요!!”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 한 채 고개를 떨구고는 스이세이세키는 외쳤다.
“그래요! 그게 아버님의 뜻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나이치고는 다른 자매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나요?”
“아, 아냐!”
“그래요. 마찬가지예요! 스이세이세키는 아버님이 정말 좋지만..... 다른 자매들도 똑같이 좋아요. 소우세이세키도, 신쿠도, 히나이치고도! 혹시 다른 자매들의 로자미스티카를 빼앗아야 한다면....”
스이세이세키는 고개를 들어 모두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신쿠. 도도한 태도지만 따듯한 마음을 가진, 때로는 의지마저 되는 그녀의 자매.
히나이치고. 순진하지만,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장난을 치고 말지만, 귀여운 그녀의 동생.
그리고 소우세이세키. 그녀의 반쪽, 같이 태어나 지금까지 쭉 함께 해 온 그녀의 쌍둥이.
모두 그녀 자신만큼이나 소중한 자매들이었다. 스이세이세키는 입술을 깨물고는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았다.
“스이세이세키는 앨리스 따위 되지 못 해도 상관없어요!!”
그 것은 그녀의 결의. 그녀가 좋아하는 자매들과 언제나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설령 그 것이 자신의 존재목적을 포기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스이세이세키의 고백에 듣고 있던 다른 자매들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그녀들 역시 그런 생각을 한 가닥 품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밖에 꺼내지는 못 하였다. 그 것은 자신을 부정하고, 아버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말이었기에. 그러나 스이세이세키의 고백으로 그녀들은 용기를 얻었다. 계기는 그 것이면 충분했다. 그 때까지 잠자코 있던 소우세이세키가 먼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래. 확실히 아버님의 뜻은 중요해. 우리들은 언젠가는 서로 싸워야만 하는 운명인지도 몰라. 하지만 최소한 아버님이 직접 우리에게 그런 지시를 하기 전에는 섣부른 판단을 할 필요는 없어. 신쿠, 너의 추론도 단지 추론일 뿐이잖아? 아버님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지레짐작해서는 안돼. 어쩌면 아버님 외에 그 정도 경지에 도달한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소우세이세키의 말은 모순이었다. 그녀들 로젠메이든에게 실망하여 모습을 감춘 로젠이 먼저 모습을 드러낼 까닭이 없었다. 진정한 앨리스가 태어나기 전에는. 결국 그녀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소우세이세키.....”
“설령 앨리스게임을 하게 된다고 해도, 나와 스이세이세키는 신쿠 너의 방식에 따르겠어. 겨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승패뿐. 로자미스티카를 빼앗지는 않을거야.”
“물론이예요!”
“히나도 마찬가지야!”
“너희들..... 모두.....”
신쿠는 벅차오르는 가슴으로 자매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감격으로 일렁였다.
아버님, 로젠을 만나는 것은 모두의 소망. 앨리스가 되는 것은 모두의 바램. 로젠메이든 모두에게 공통된 기원. 그러나 오직 하나에게만 허락된 기원.
하지만 그녀들은 선택했다. 함께할 것을. 모두 함께 앨리스가 되어 아버님을 만나는 길을. 설령 그 것이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고마워, 모두들.”
신쿠의 눈에 맺힌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것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
“또 놀러올게예요!”
인사를 마친 스이세이세키와 소우세이세키는 가방을 타고 날아올랐다. 배웅하는 신쿠와 히나이치고의 모습이 저 아래로 멀어졌다. 그대로 하늘 높이 떠올라 바람을 만끽했다. 초봄의 꽃샘추위 때문인지 아직은 매서운 찬 바람이지만. 그녀들에게는 그저 시원할 뿐이었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앙금을 털어냈기 때문인지 상쾌하기만 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바로 잡으며 스이세이세키는 자신의 쌍둥이 자매에게 말을 건넸다.
“솔직히 안심했어요. 소우세이세키가 동의해주어서.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우리는 쌍둥이잖아? 비록 말을 나누지 않아도 마음은 하나니까.”
“그래요. 우리들은 둘이지만 하나니까요.”
스이세이세키는 방긋 미소지었다. 그녀로서는 특히나 그녀의 쌍둥이여동생과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걱정이었던 것이다. 모두 불안이 풀어진 그녀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런 그녀에게 소우세이세키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모든 자매가 우리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 거야.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은 자매가 둘이나 더 있어. 그녀들과는 싸워야할지도 몰라.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녀겠지만.....”
“......스이긴토.”
다시 부활했다고 하는 그녀들의 첫 번째 자매, 스이긴토. 그녀와는 지난 싸움에서 어쩔 수 없이 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는 그녀의 죽음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자매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 것이 비록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 할지라도.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비극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예요. 모두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는 데는 힘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스이세이세키도 어서 마스터를 찾도록 해.”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갑작스러운 소우세이세키의 지적에 버벅거리며 말을 얼버무리는 스이세이세키. 그녀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아니면 미리 생각해 둔 마스터라도 있은거야?”
“그, 그런거 아니예욧!”
장난기가 서린 소우세이세키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스이세이세키는 화들짝 놀라며 애써 부정했다.
그때였다..
쿠웅!
세계가 일변한다. 눈 앞의 광경이 일그러진다. 공간이 찌그러지며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지각영역을 초월한 소리가 울렸다. 마치 세계가 비명을 지르듯.
그리고 세계는 덧칠되었다.
“이것은.... 대체.....”
스이세이세키는 넋이 나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날고 있던 하늘은 온데간데 없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수정뿐. 시리도록 투명한 수정의 바다. 발 디딜 공간도 없이 오직 수정만이 가득 차 있는 세계.
“이 것은.... N의 필드?”
소우세이세키는 곧바로 이 세계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N의 필드에 존재하는 심상세계 중 하나, 그 것이 지금 눈 앞의 세계. 하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었다. N의 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거울 등의 반사면이 있는 매개체를 이용하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이나 스이세이세키처럼 직접적으로 심상세계로의 문을 여는 것. 하지만 모두 진입하는 방법일 뿐이다. 이렇게 공간 자체가 N의 필드로 변해버리는 방법 같은 건 알지 못 했다.
그때였다.
쿠웅! 쿠웅!
“꺄악~”
“스이세이세키!”
발 밑의 수정이 갑자기 솟아올랐다. 두 자매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그녀들을 따라 수정들이 계속해서 솟아올랐다.
쿠웅! 쿠웅! 쿠웅!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공격. 소우세이세키는 수정들을 박차며 뛰어올라 주변을 살폈다. 그 순간 그녀는 수정들 사이로 재빨리 사라지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누구?”
팟팟팟
그 누군가는 수정들 사이로 얼핏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단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릴 뿐.
“누구지? 나와!”
그 누군가에게 외치며 소우세이세키는 정원사의 가위를 불러내었다. 그리고는 양손에 쥐고 크게 휘둘렀다. 그녀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거대한 참격에 주변의 수정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순간 수정들의 공격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눈 앞의 수정기둥 사이로 천천히 보랏빛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흔들리는 하얀 머리카락. 몸을 감싼 연보라색 드레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에게 특징적인 것은 오른쪽 눈이 있는 자리를 대신한 한 송이 꽃이었다. 하얀 장미는 마치 기생하듯 그녀의 눈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로테스크한 그 모습은 장미로 만든 안대와도 같았다.
“누구지?”
“......누구지?”
소우세이세키의 말을 따라하듯 눈 앞의 소녀가 말했다. 마치 혼자만 있는 공간에서 독백하듯 차분한 목소리.
“넌 누구지?”
“넌..... 누구지?”
거울처럼 그대로 되돌려지는 질문. 소우세이세키는 장미안대의 소녀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로젠메이든 제 4돌, 소우세이세키.”
“.......소우세이세키.”
다른 사람을 비추듯 따라하기만 하던 소녀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는 그녀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는.... 로젠메이든 제 7돌.”
“제 7?”
“키라키쇼.”
4명의 로젠메이든들이 함께할 결의를 다진 날.
수정으로 뒤덮힌 세계에서
마지막 로젠메이든은 다른 자매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