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ämmerung
"키라....키쇼...?“
스이세이세키는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지막 자매. 그녀와의 만남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 뿐이었다. 이제야 겨우 싸우지 않을 것을 다짐한 그녀에게는 채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닥쳐온 시련이었다.
“스이세이세키, 조심해!”
“꺄악!”
다시 한 번 솟아오르는 수정에 스이세이세키는 황급히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잠시 동안 중단된 시간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공격은 아까 전보다 더욱 거세졌다.
“잠깐만!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아요!”
스이세이세키는 공격을 피하면서, 키라키쇼에게 간절히 외쳤다. 그러나 장미안대의 소녀는 그런 그녀의 외침을 듣지 못한 듯, 가만히 선 채 무표정한 얼굴로 쌍둥이자매를 바라볼 뿐이었다.
“부디 이야기를 들어줘요!”
스이세이세키의 외침을 찢으며 다른 것들보다 거대한 수정이 그녀를 향해 솟구쳤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인공정령을 불렀다.
“스이드림!”
부름에 응해 나타난 초록빛의 정령. 그와 함께 그녀의 손에 들린 정원사의 물뿌리개. 그 것을 매개로 하여 그녀의 힘이 발해졌다.
콰아악!
녹색 빛이 흩뿌려지자 바닥에서 거대한 줄기들이 자라났다. 그 넝쿨들은 그대로 수정들을 에워싸서 공격을 차단했다. 그에 만족하지 않고 그녀는 물뿌리개에 더더욱 자신의 힘을 불어넣었다.
“이야기를......”
그리고 그대로 장미안대의 소녀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들으라니까예욧!!”
쿠구구구구!!
더 이상 줄기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굵은 넝쿨들이 한데 모여 키라키쇼에게 날아갔다. 서로 몸을 꼬차 창처럼 뾰족한 그 끝은 금방이라도 소녀의 몸을 꿰뚫을 듯 했다. 키라키쇼는 가만히 한 손을 들어올렸다. 강대한 공격을 맞이하는 것 않는 조용한 움직임. 그녀의 작은 손으로는 거센 줄기의 창을 막기는 커녕 가리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콰가가가
줄기들은 채 소녀의 몸에 도달하지도 못 했다. 소녀의 작은 손에 가로막혀 그 이상 넘어가지 못한 채, 갈기갈기 흩어져버렸다.
“마, 말도 안돼!!”
스이세이세키가 경악의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이 너무도 쉽게 무산된 것이다. 그런 그녀가 주춤한 틈을 타고 다시 수정의 공격이 이어졌다.
“스이세이세키!”
재빨리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우세이세키는 정원사의 가위를 휘둘렀다. 스이세이세키를 노리던 수정들은 그 일격에 부서졌다.
“아무래도 대화는 틀린 것 같군. 우리들의 막내 여동생은 언니 말을 듣지도 않는 고집쟁이인 것 같아.”
소우세이세키는 힘있게 가위를 바로 잡았다. 근처의 수정을 발로 차며 뛰어올라 키라키쇼를 향해 돌진했다.
“그렇다면, 힘으로라도 관철시키겠어!!”
가위를 치켜든 팔에 팽팽히 힘이 들어갔다. 마치 활시위를 당기듯 그 탄성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소우세이세키는 키라키쇼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돌진하는 속력. 그녀의 완력. 팔을 휘두르는 탄성. 가위의 무게. 그리고 그녀가 지닌 로젠메이든으로서의 힘.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한 일격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 꽂혔다.
콰앙!
폭음과 함께 그 충격파만으로 근처의 수정들이 박살나며 날아갔다. 소우세이세키의 푸른 기운과 키라키쇼의 하얀색 기운이 격돌했다. 좀 전과 마찬가지로 키라키쇼는 단지 한 손만으로 공격을 막고 있었다. 소우세이세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몸 속 깊숙한 곳의 로자미스티카로부터 그녀가 가진 모든 힘을 쥐어짜내었다.
“꿰뚫어라아아앗!!”
소우세이세키의 외침과 함께 순간적으로 증폭된 푸른 기운이 보라색 기운을 밀어버렸다. 그 길을 따라 소우세이세키는 가위를 내리꽂았다.
캉~!
그러나 그녀가 가른 것은 키라키쇼가 아니었다. 어느새 그 자리는 투명한 수정기둥이 대신하고 있었다.
“아닛??!!”
경악하는 소우세이세키. 그런 그녀의 뒤편에서 유령처럼 소리 없이 키라키쇼가 나타났다. 무방비한 그녀의 등을 향해 키라키쇼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뻗어난 수정의 창이 그 끝을 소우세이세키에게 향했다.
카앙!
“크윽!”
소우세이세키는 재빨리 몸을 돌려 가위의 몸체로 공격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미처 중심조차 잡지 않은 갑작스러운 방어로는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꿰뚫리는 것만 면한 채, 그녀는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떨어지는 그녀를 노리고 바닥의 수정들이 탐욕스러운 이빨을 드러내며 솟아올랐다.
“소우세이세키!”
스이세이세키의 물뿌리개가 그녀의 쌍둥이 자매를 향해 뿌려졌다. 곧바로 자라난 넝쿨들이 소우세이세키를 감싸 그녀를 보호했다.
“고마워.”
“천만에요. 그보다 싸움에 집중해요!”
소우세이세키는 재빨리 넝쿨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곧바로 수정들이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넝쿨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래서는.... 이래서는 끝이 없어!’
자신을 덮쳐오는 수정들을 다시 한 번 부수며 소우세이세키는 생각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는 듯 더욱 거세진 수정들의 공격은 그녀들이 채 키라키쇼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못 하게 했다.
‘이 세계.... 이 세계 자체가 적이야!’
적은 키라키쇼만이 아니었다. 수정으로 가득 찬 세계.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정들 하나하나가 그녀들에게 강렬한 적대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언제 어떤 수정이 공격해 올지 몰랐다. 쉴 틈도 없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더군다나 공격방향은 주위 360도와 바닥을 포함한 거의 전 범위. 안심할 수 있는 곳은 공중 정도 뿐이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정작 키라키쇼 자신은 지금껏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미안대의 소녀는 처음 그녀들의 공격에 대응한 것을 제외하면, 그저 방관자처럼 서 있을 뿐이다. 현재 전황은 그녀들이 수정들의 공격에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태. 하지만 키라키쇼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하면 상황이 순식간에 뒤집어지리라는 것쯤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스이세이세키! 이대로는 불리해. 물러나자!”
“알았어요! .......어라?”
소우세이세키의 말에 따라 이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 힘을 행사한 스이세이세키. 하지만 이내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 박에 없었다.
“서둘러, 스이세이세키!”
“그, 그게..... 문이 안 열려요!”
“그게 무슨?!”
난데 없는 스이세이세키의 말에 소우세이세키는 의아함을 느꼈다. 황급히 그녀 자신도 N의 필드의 문을 열기 위해 시도했다. 그리고 이내 당혹할 수 밖에 없었다.
N의 필드를 연결하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을 열려는 그녀의 힘은 분명 작용했다. 그러나 열리려는 문을 어떤 힘이 계속 닫아버리는 느낌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큭!!”
“소우세이세키!”
당황하는 소우세이세키의 빈 틈을 노려 수정이 파고들었다. 서둘러 방어했지만 미처 다 막지는 못 하고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 충격에 중심을 잃은 소우세이세키는 그만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크윽... 방심했어. .....응?”
신음을 흘리며 일어서는 소우세이세키. 그런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비쳤다.
“이, 이 것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녀와 똑같이 생긴 얼굴의 인형. 단지 좌우가 바뀌었을 뿐 똑같이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 것은 주변에 솟아있던 수정의 표면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었다.
“이 것은.....혹시?”
소우세이세키의 뇌리에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무산으로 돌아간 그녀의 공격. 사라진 키라키쇼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투명한 수정기둥이었다. 그리고 사라짐과 동시에 기척도 없이 그녀의 뒤에 나타났다. 뒤편의 수정기둥 사이로.
소우세이세키는 생각에 집중했다. 어쩌면 그녀는 이 상황을 타개할 실마리를 잡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보다 더 전의 일. 그녀들은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이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이번에는 방금 전의 일. 문은 어떤 힘에 의해 계속 닫혀버리며, 열리지 않았다.
“뭐하고 있는 거예요! 멍하니 서서!!”
소우세이세키를 덮치는 수정들을 막아서며 스이세이세키가 외쳤다. 소우세이세키는 그런 그녀를 향해 부탁했다.
“스이세이세키, 잠시만 시간을 끌어줘.”
“에? 그게 무슨 소리예요?”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아, 알았어요! 오래는 못 버티니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아요.”
스이세이세키의 대답을 뒤로 한 채 소우세이세키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힘을 안정시켰다. 두 다리를 굳건히 땅에 디딘 채, 천천히 가위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렘피카!”
그녀의 부름에 응한 인공정령이 푸른 빛을 내뿜으며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소우세이세키는 천천히 그녀가 지닌 힘을 일깨웠다. 서두르지 않고 그녀의 힘을 인공정령과 정원사의 가위와 공명시키며 끌어올렸다.
우우웅~
렘피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빝이 더욱 강해지며 주위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정원사의 가위에서 줄기줄기 푸른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녀의 힘, 렘피카의 힘, 정원사의 가위의 힘이 하나가 되었다.
“하아아아압!!”
콰아아앙!!!
소우세이세키는 정원사의 가위를 힘껏 땅에 내리 꽂았다. 천지가 진동했다. 하나가 된 세 힘이 세계를 파열시켰다. 그녀를 중심으로 수정의 대지가 산산이 부서져갔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쩌적! 쩌저적!
공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떨어져나가는 공간의 파편들 너머 푸른 하늘이 보였다.
“스이세이세키, 지금이야!”
“알았어요!”
소우세이세키는 스이세이세키를 불렀다. 다시 공간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두 소녀는 열린 틈을 향해 뛰어들었다.
휘이이잉~
그리고 그녀들을 맞이한 것은 아직 초봄의 차가운 바람이었다.
“살아난.......거군요.”
다행히 키라키쇼는 쫓아오지 않았다. 스이세이세키는 그제서야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안도할 수 있었다. 과도한 힘의 소모로 인해 몸 전체에 피로가 몰려왔다. 한숨을 내쉬며 스이세이세키는 소우세이세키에게 물었다.
“후우, 아까 그건 어떻게 한 거죠? 세계에 금이 가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N의 필드의 세계는 비록 규모는 작을지라도 엄연히 하나의 세계. 따라서 그 세계에 균열을 가져오는 행위는 이미 마법의 영역이다. 아무리 소우세이세키의 힘이 자매들 중 강한 편이라고 하지만, 본래 그녀의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야. 키라키쇼의 세계는 편법이었기에 가능했을 뿐.”
“편법?”
“그래. 애초에 그 세계는 임시적인 것이었어. 그녀의 능력은 수정을 다루는 힘. 그녀는 수정의 반사면을 이용해서 이 세계에 N의 필드에 존재하는 그녀의 심상세계를 구현시켰던 거야.”
“그렇군요. 그래서 우리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세계에 들어와 있었던 거네요.”
“그래. 그리고 일단 심상세계를 구현시킨 후에는 그 안에 존재하는 수정들의 반사면을 이용한 지속적인 백업으로 세계의 복원력을 막고 있었던 거야. 결국 일정공간의 수정들을 모두 없애버리면, 복원력에 의해 심상세계는 자연히 부서지게 되는 거지.”
“어쨌거나 터무니없는 능력이네요. 항상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장을 만들 수 있다니. 만약 우리 둘이 아닌 1:1의 상황이었다면......”
스이세이세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생각한 가정의 결과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기에, 그 것을 말하기에는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소우세이세키가 한 것 같은 광범위 공격은 상당한 준비시간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가 지켜주지 않는 한 쓸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혼자였다면 탈출 같은 것은 꿈도 못 꾼 채, 처절하게 농락당하다 부서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굳이 그런 가정까지 할 필요도 없어. 하다못해 키라키쇼가 직접 나섰더라면 우리들은.....”
그녀들의 마지막 자매는 끝내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이 강자의 여유인지, 아니면 이번은 그저 인사에 불과할 뿐이라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정들을 막아내기에도 급급했던 그녀들로서는 만약 키라키쇼와 직접 싸우게 된다면 막을 자신이 없었다. 잠시 경험했던 그녀의 힘은 최소한 그녀들 이상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소우세이세키가 경험한 키라키쇼의 이동술. 수정의 반사면을 이용한 수정간의 순간이동은 단순한 힘의 비교 이전에 승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결국 진심으로 나오는 그녀를 상대하는 것은 그녀와 그녀의 세계 전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우세이세키는 고개를 들었다. 키라키의 세계 속에서 시간이 상당히 지체된 듯, 어느새 저멀리 해가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그녀의 얼굴에 황금빛 그림자를 비추었다.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소우세이세키는 입을 열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일까. 이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마지막 자매, 아무도 모르는 7번째. 그녀와의 만남은..... 우리 자매들이 모두 눈을 떴다는 증거.”
“그래요. 드디어 시작된 거군요.”
“그래, 시작된 거야. 진정한 앨리스 게임이.”
이윽고 그녀들마저 떠난 하늘. 하늘은 이제 타오를 듯 더욱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시작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Dämmerung
그 것은 황혼(Abenddämmerung) 동시에 여명(Morgendämmerung)을 뜻하는 말.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내포하는 말.
그리고 지금 그녀들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