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usammentreffen
미키야와 스이긴토를 남겨둔 채 료우기 시키는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아직은 추운 공기가 그녀의 몸을 다시 감쌌다. 기모노에 점퍼 하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정말 부실해보이는 옷차림이었지만, 시키는 개의치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땅을 딛은 그녀의 발이 향한 곳은 상점가 방향이 아닌 맨션의 뒤쪽이었다. 햇빛도 제대로 비치지 않는 그늘진 뒷골목. 사람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쓰레기통을 뒤지는 도둑고양이들이 갑작스러운 사람의 출현을 경계할 뿐.
시키는 조용히 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빠져나온 그녀의 손에는 작은 나무토막 같은 물건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그 것을 꼭 말아 쥐고는 한 번 손을 털었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시린 빛을 발하는 칼날이 튀어나왔다. 시키는 그대로 나이프를 들어올려 눈 앞의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스팟~
본래대로라면 베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종이를 자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금이 그어졌다. 선명한 검은 색 선을 경계로 주변 풍경이 왜곡되어갔다.
그리고 부서졌다.
“이런이런. 극동에는 마술이 뒤떨어진다고 단장님이 말씀하셨는데, 순 거짓말이었잖아! 이렇게 쉽게 들켜버리다니 말야.”
아무도 없을 터인 골목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낭랑한 소년의 목소리. 장난기마저 깃든 어조였다.
부서지는 풍경의 파편들 사이로 소년은 모습을 드러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은 귀밑에서 짧게 잘려있다. 색소가 없는 듯 혈관이 비치는 붉은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의 허리에는 고풍스러운 황금빛 칼자루를 가진 서양식 장검이 검집에 넣어져 매달려있었다.
“무슨 목적이냐. 남의 집 주변에 결계까지 치다니. 무엇을 노리는 거지?”
“아하, 누나.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저 감시하고 있었을 뿐이야.”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소년의 반응에 시키는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토우코가 또 쓸데없는 일에 관여한 모양이군. 마술사들의 일에 일반인을 끌어들이는 것은 금기일텐데. 이 집 주인은 마술과는 관계없다. 수작을 부리려거든 토우코의 공방에 가서 알아봐!”
“미안하지만 잘못 짚었어, 누나. 나는 마술사가 아니야.”
“뭐....?”
“나는 말이지...... 기.사.라고!!”
악센트를 주어 강조하는 소년. 그러나 시키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황급히 몸을 피했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자리에 대각선으로 소년의 칼이 베어들어왔다. 시키가 피해내자 소년은 감탄한 듯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한데, 누나. 내 공격을 이렇게 깨끗하게 피해낸 건 단장님 빼고는 누나가 처음이야.”
“너 이 녀석....!!”
“아, 갑자기 공격했다고 너무 화내지는 말아. 단장님이 말씀하시길 무기를 꺼내는 그 순간부터 싸움이 시작된다고 했거든. 먼저 칼을 꺼낸 건 누나가 먼저라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소년. 지금 이 상황이 즐거운 듯 하다.
“그러고보니 자기 소개를 안 했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롤랑이라고 합니다. 아가씨의 이름을 여쭈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이제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예를 갖춰 자신을 소개하는 소년. 그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시키는 얼이 빠져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료우기 시키.”
“헤에, 시키 누나였구나. 그럼 잘 부탁해. 혼자 일본에 와서 그 동안 싸움다운 싸움도 못 해보고 심심했다고. 단장님도 없고 말야. 누나 같은 실력자는 드무니까.....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
말을 마치고는 롤랑은 다시 시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시키의 단검으로는 롤랑의 장검을 받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길이의 차이도 문제지만, 그 이전에 그 안에 실린 무게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결국 시키는 몸을 비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시키의 몸을 롤랑의 검은 계속 쫒아왔다. 단순히 피하기만 해서는 뿌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상대할 수 밖에 없나.’
일전의 사건에서 료우기 시키는 사람을 죽여버렸다. 인간은 일생에 한 사람 밖에 죽일 수 없다. 인간은 일생에 한 명 분의 죽음만을 등에 질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시키는 더 이상의 살인을 할 수는 없었다. 비단 그녀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닌, 그녀 대신 죄를 짊어진 그를 위해서라도.
‘하지만..... 죽이지 않고도 제압할 방법은 많아!’
다시 한 차례 소년의 검이 휘둘러졌다. 이번에는 허리를 가르는 횡베기. 좁은 골목길에서 소년의 장검을 피하기는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시키는 보았다.
양 다리에 두 개, 등에 하나, 중심보다 약간 왼쪽 흉부에 하나. 죽음이라는 이름의 선을.
그리고
검 끝에 하나, 블레이드를 가로질러 세로로 하나, 손잡이의 가드 직전에 하나. 예정된 결말을 나타내는 절단면을.
유령처럼 천천히, 그러나 빠르게 시키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움직였다.
스윽~
소리조차 없이 소년의 검끝을 나이프가 베었다. 그것으로 소년의 공격범위는 줄어들었다. 그 안으로 시키의 나이프가 파고든다. 횡으로 움직이는 소년의 칼날에 시키의 나이프 역시 따라 움직이며 베어갔다. 세로로 가르고 들어오는 나이프에 의해 소년의 검이 두 쪽으로 벌어져간다.
마지막으로 시키의 나이프가 가드 위쪽의 절단면을 베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시키의 나이프는 계속 위로 움직였다. 그 칼끝이 멈춘 곳은 소년의 목 앞이었다.
땡강! 땡강! 땡그랑~!
그제서야 잘려진 소년의 칼조각이 땅바닥에 쇳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소년의 손에 들린 장검은 네 토막의 쇳덩어리로 해체되었다. 이 모든 것은 단 한순간에 일어난 일.
신기(神技)!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에 대어진 칼날조차 의식하지 못한 듯 소년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두 번 다시 이 곳에 얼씬거리지 마라. 그 때는 갈라지는 것은 칼이 아니라 네 몸이 될 테니까.”
나직한 시키의 경고. 그 속에 담긴 위협 때문인지 소년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시선을 바로잡아 눈 앞의 시키를 응시하는 소년. 그러나 그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듯 오히려 희열에 찬 표정이었다.
“강철을 벨 수 있는 검을 원한다면, 강철을 벨 수 있는 실력을 쌓아라. 단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지. 하지만 설마 정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순간 시키는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소년의 눈동자에 방금 전까지의 장난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느껴지는 것은 압도적인 존재감. 그녀의 본능이 고하고 있었다. 지금 눈 앞의 상대는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을.
파앗!
자신의 직감에 따라 시키는 망설이지 않고 뒤로 몸을 튕겼다. 그녀가 있던 공간을 소년의 검이 호를 그리며 베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시키의 몸은 반토막이 되었을 것이다.
“역시 대단하군. 이런 오지에서 그대와 같은 상대를 만나다니. 기사로서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앳되고 장난기 서린 목소리는 사라지고, 진중한 어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소년의 손에 들린 검은 시키에게 잘린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검 자체가 달라져있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자루, 그 곳에 박힌 수정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자루에서 뻗은 검신은 원래보다 더 커져있었다. 소년의 몸집으로는 들고 있기조차 벅찰 정도로. 그리고 검신 전체에 은은히 어려있는 성광(聖光).
“놀랐는가. 본디 듀렌달의 본체는 검신이 아닌 그 자루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듀렌달의 진정한 모습. 부디 용서해주게나, 이국의 기사여. 그대와 같이 강철을 베는 실력을 지니지 못 한 나로서는, 강철을 베는 이 검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네.”
스스로를 롤랑이라고 칭했던 남자는 천천히 검을 들어올려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모습에 시키는 신음을 삼켰다.
완벽히 달라진 남자의 기도. 그에게서 풍기는 위압감. 검이 바뀐 것과 마찬가지로 눈 앞의 남자도 바뀌어 있었다. 흡사 무언가에 덧씌워진 것처럼.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미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선이 눈 앞의 남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는 실 같은 균열만이 간혹 나타나 있을 뿐.
“네 녀석..... 인간이냐?”
“그런 것은 이 대결에 의미 없는 것. 생사의 경계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전력을 다한 투구뿐.”
시키는 나이프를 가슴 앞으로 내밀어 상대에게 겨누었다. 손잡이는 역수로 쥔 채, 상대에게 눈을 맞춘다. 눈 앞의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최대한으로 당겨진 활시위가 놓아질 순간만을 기다리듯, 골목 안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라지만 지금은 곤란하겠어, 누나.”
다시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소년. 진지했던 얼굴에는 어느새 싱글벙글한 웃음이 저어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다시 변해버린 모습. 긴장하고 있던 료우기 시키의 몸이 풀려버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 하고 비틀거렸다.
“무.....무슨 수작이냐!”
“아하하~ 나의 피앙세께서 돌아오셔서 말야. 숙녀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기사의 도리가 아니잖아?”
당황한 시키의 추궁에 씨익 미소지으며 대답하는 소년. 그리고는 그대로 폴짝 뛰어올랐다. 다시 담벼락을 박차고는 근처 주택의 지붕 위로 올라선 롤랑.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도약력이었다.
“미안해, 누나. 사과의 뜻으로 다음부터는 감시하지 않을게. 대신에 꼭 다시 놀아줘야해!”
손까지 흔들며 소리친 소년은 그대로 폴짝폴짝 뛰어서는 저 너머로 사라져갔다.
“......뭐였지, 저 녀석.”
남겨진 료우기 시키만이 맥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후일담 : 스이긴토는 과연 시키의 죽을 먹었을까?
“다녀왔어.”
“시키, 왜 이리 늦은거야?”
“조금 일이 있어서.... 바로 만들게.”
“만들다니? 뭘?”
“잠시 기다려봐, 스이긴토. 시키가 맛있는 것을 만들어줄거야.”
“맛있는 것?”
“응, 기대해도 좋아.”
잠시 후
“우웁... 맛 없어. 뭔가 밍숭맹숭하네, 이 죽이란 음식은. 요구르트라도 넣었으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스이긴토, 죽에 요구르트는 좀.....”
“상관없어. 원한다면 해 주지.”
잠시 후
“에엑?! 뭘 어떻게 한 거야?”
“죽에 요구르트를 넣고 끓였다.”
“이런 건 사도(邪道)라고! 유산균이 죽어버린 요구르트 따위, 요구르트가 아니야!!”
“........”
“저, 저기..... 시키?”
“뭐, 뭐야? 그런 무서운 얼굴로.”
“잔 말 말고 먹어!!”
“우악, 시키. 진정해!”
“꺄악! 뭐, 뭘 억지로 쑤셔넣는... 우, 우웁!!”
결국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