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icht
“안녕하세요.”
“아아, 좋은 아침이네.”
코쿠토 미키야는 한 손에 서류뭉치를 든 채 공방, 가람의 당 안으로 들어섰다. 의자에 앉아있던 토우코가 몸을 돌리고는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감기는 다 나으신 건가요?”
“응. 너무해, 미키야. 문병 한 번 안 오다니.”
“겨우 하루 동안의 감기인데 무슨 문병입니까. 게다가 스이긴토의 간호를 하라고 한 것은 소장님인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하아, 알았어. 매정한 녀석 같으니.”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리는 토우코. 미키야는 난처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일 수 밖에 없었다. 감기로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지, 오늘의 그녀는 평상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스이긴토는 안 온 거야?”
“예. 아무리 감기가 나았다고는 해도 찬바람을 쐬면 좋지 않으니까요. 집에 남겨두고 왔어요.”
“호오, 지극정성이네.”
“놀리는 것은 그만둬주세요. 오늘은 전에 맡기신 일을 보고하러 온 것이니까요.”
“그거라면 성배의 건이었지?”
“예, 그렇습니다.”
스이긴토가 미키야의 미디엄이 된 날, 토우코는 미키야에게 성배에 관한 자료수집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오늘 그가 가져온 서류뭉치는 그 건에 관한 보고서였던 것이다. 미키야로부터 보고서를 건네받은 토우코는 그 묵직한 무게에 놀랐다.
“상당히 많은데, 이거.”
“당연하죠. 한 달이나 걸려서 완성한 것이니까요.”
“그렇게 힘든 일이었어?”
미안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토우코. 미키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힘들다기보다도 애초에 범위가 너무 넓었어요. 성배라고 불리운 물건이나, 그와 유사한 물건에 대한 전승이 셀 수도 없이 많더군요. 보고하는 데만 점심시간을 넘겨버릴지도 모르니, 빨리 시작하도록 하죠.”
“아아, 알았다.”
토우코는 안경을 벗으며 답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말투도 바뀌었다. 뿐만 아니다. 지금의 그녀는 차가운 언동, 차가운 사상, 차가운 이론,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존재. 그야말로 완벽한 마술사로서의 존재.
하지만 이미 그런 모습을 많이 보아온 미키야는 개의치 않았다. 토우코의 앞에 마자 앉아, 가져온 여분의 보고서를 펼치며 목을 가다듬는다. 꽤 긴 시간 동안의 설명이 될 터였다.
“성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승이 있어요. 하지만 한 가지 일관된 점이 있습니다. 성배는 영생, 불노불사, 사자소생의 권능이 담긴 상징이라는 점이지요. 바로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 조사했습니다.”
사무실에는 미키야의 낭랑한 목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배는 크리스트교에서의 성배입니다. 크리스트교에서 성배는 두 종료예요.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했다는 술잔.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피를 담은 잔입니다. 후자의 전승은 로마의 백인대장 롱기누스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산헤드린이라는 유대공의회의 일원이었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그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를 받은 잔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같이 보는 전승도 있어요.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한 술잔으로 요셉이 예수의 피를 받았다는 거죠. 어쨌든 이 요셉은 훗날 성배를 가지고 유럽으로 가게 됩니다.”
“유럽이라.... 그렇다면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아더왕 전승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단 공통점을 짚어본다면.....”
그렇게 해서 시작된 성배에 대한 보고서는 3시간 가량이나 이어졌다. 그 것도 미키야의 분류에 따르면 직접적으로 ‘성배’라고 명명된 물건에 대한 전승만을 이야기했는데도 그 정도의 시간이 소비된 것이었다. 사실 당연한 것이 미키야의 말대로 같은 전승이라도 매우 다양한 변형이 존재했다. 일례로 아더왕의 성배탐색 전승만 해도 수십가지나 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아더왕이 사실 여성이었다는 전승 또한 있었지만, 애초에 중요한 것은 아더왕의 성별이 아니므로 미키야는 간략히 이야기하고 넘어갔다.
성당기사단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성당기사단 관련내용은 전승이라기보다는 은비주의자들의 발언과 저서가 주된 출처인지라 여러 가지 설이 난무했다. 공통점이라고는 단지 성배는 성당기사단의 성의 보관되어 있고, 성당기사단은 성배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왔다. 심지어는 Discovery채널의 성배관련 다큐멘터리나, 1989년 개봉한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인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까지 다루어졌으니까. 토우코가 생각하기에도 후유키시의 성배전쟁 같은 마술사들만의 행사를 제외하면, 사실상 성배에 관한 모든 자료의 총집과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방대한 정보로군. 하지만 결국 확실한 것은 없다는 건가.”
“애초에 진위여부부터가 불분명하니까요. 이것으로 ‘성배’라는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사항은 끝입니다.”
미키야는 목이 마른지 물을 한 컵 따라 마시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성배와 유사한 모티브는 세계각처의 전승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면 힌두교의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암리타입니다.”
“힌두교라면 인도인가. 크리스트교와는 동떨어져있는걸.”
“예, 그렇습니다. 신화에 의하면 본래 인도의 신, 데바들은 전능의 힘이나 영생을 갖추지 못한, 인간과 같은 필멸의 존재였다고 합니다. 이 때 이 암리타가 등장하게 되죠.
“신들이 원래는 임모탈이 아니었다는 건가.”
토우코는 흥미를 나타내었다. 그녀의 혼잣말을 미처 듣지 못한 듯, 미키야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던 데바들은 영생의 감로수, 암리타를 만들어 마시라는 비쉬누신의 조언을 듣게 됩니다. 암리타는 젖의 바다를 휘저어서 만드는 것이었죠. 하지만 데바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탓에 아수라들과 동맹을 맺습니다. 함께 과업을 수행한 후에 공평하게 영생을 누리기로 한거죠. 여기서 재밌는 것은 젖의 바다가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잠시 목을 가다듬고 미키야는 말했다.
“세계가 탄생하기 전. 창조의 브라흐마, 유지의 비쉬누, 파괴의 시바. 섭리에 닿아있는 위대한 트리무르티들이 존재하기도 전.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른 것과 그른 것, 빛과 어둠, 깨끗함과 더러움도 없던 그저 혼돈의 바다. 혼돈은 만물의 어머니이며, 생명의 원천이며, 거대한 젖의 바다. 모든 것은 그 속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개념이죠?”
“그것은!!”
토우코가 눈을 빛냈다. 이전까지보다도 더욱 진지한 얼굴을 한 채, 미키야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런 토우코를 주시하며, 미키야는 말을 이었다.“
“데바와 아수라들은 만다라 산을 뽑아 거대한 뱀 바수키에 묶어서 젖의 바다를 휘젓기 시작합니다. 천년의 세월에 걸친 대작업이었죠. 하지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이 세상의 모든 불순한 것들이 모여진 독(毒)이었습니다. 결국 시바신이 독약을 마시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죠. 하지만 그 독은 시바신조차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무서운 독이었기에, 삼키지는 않고 목에 저장해 두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었죠. 그리고 젖의 바다에서부터 생명의 암소, 술의 데비 바루니, 밤하늘의 달, 비쉬누의 반려 락쉬미, 그리고 무수한 압사라(요정)등의 생명이 탄생했죠. 마지막으로 마침내 암리타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아수라들이 암리타를 가로채가게 됩니다. 비쉬누신은 절세의 미인 모히니로 변하여 아수라들을 유혹해 암리타를 되찾아왔죠. 그리고 암리타는 데바들만이 마시게 되고, 그들만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
“뭐야, 그건. 결국 아수라들은 이용만 당한건가. 위대한 트리무르티께서 한쪽 편만 들다니 말이야.”
“신화인 이상 악마들이 패배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죠. 어쨌든 이 이야기를 성배와 비교해본다면 젖의 바다가 성배이고 암리타가 바로 성배로부터 얻게 되는 영생의 권능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암리타가 성배 자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토우코씨라면 무척 흥미 있어 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 그건 확실히 관심이 가는데.”
미키야의 말에 토우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 모습을 본 미키야의 안경 너머로 득의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밖의 전승을 살펴보면....”
미키야의 설명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어느덧 시간은 점심 때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동안 무수한 전승들이 그의 입을 통해 말해졌다. 주로 창세신화와 관련되거나 신이 권능을 얻게 되는 내용이 많았다. 이를테면 북유럽신화에서 비밀의 샘을 마시고 지혜를 얻은 주신 오딘 등등.
“특이한 점은 이런 성배와 유사한 모티브를 가진 전승에서 성배역을 하는 신물(神物)이 돌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그리스 신화를 살펴볼까요. 남편인 크로노스가 자식들을 계속 잡아먹자, 레아는 막내 제우스를 낳고는 돌을 아기라고 속여 크로노스에게 삼키게 합니다. 이로써 제우스는 살아남아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삼켜진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구해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크로노스는 시간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다른 신들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 하고 소멸했지만, 제우스만은 돌로 인해 시간의 흐름을 피하고 마침내 시간을 굴복시켜 영생을 얻었다. 그 후 다른 신들을 죽음에서 부활시켜 함께 영생을 누렸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거죠.”
“영생과 사자소생인가. 확실히 성배의 권능이로군.”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다시 크리스트교의 성배로 돌아가 보도록 하죠. 은비주의자들 중에는 요셉이 가져간 것은 마력이 깃든 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배는 섬광을 방사하는 발광체였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배는 라피스 엑실리스, 즉 하늘에서 떨어진 돌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하늘의 상징적 의미는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겠지만요. 혹은 성배는 루키페로스의 돌로 불리기도 합니다.”
“즉 성배가 잔의 형태가 아니라 돌의 형태일 수도 있다는 건가.”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죠.”
드디어 미키야의 두꺼운 보고서도 마지막 몇 장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토우코는 안경을 다시 쓰고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이것으로 마지막이네. 배고파죽겠어. 빨리빨리 마무리하고, 밥 먹자아~~”
그녀도 장시간 보고를 듣는 일이 지겨웠던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미키야는 그런 그녀의 말을 일축했다.
“천만에요, 소장님. 본론은 지금부터인걸요.”
“에.....?”
안경을 올려 쓰며 눈을 빛내는 미키야. 그의 시선은 똑바로 토우코의 두 눈을 향해있었다. 꿰뚫어보려는 듯 한 그 눈빛에 토우코는 당황했다.
평상시의 어수룩한 미키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를 계속 주시하며, 미키야는 빠른 속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1307년 성당기사단은 필립왕에 의해 와해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후 성당기사단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여러 단체들이 나타나게 되죠. 음모론으로 널리 알려진 프리메이슨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전통성을 인정받은 단체는 로젠크로이츠-장미십자회라는 조직이었습니다.”
쉴 틈 없이 토해져 나오는 이야기. 미키야는 토우코가 미처 반응할 틈도 주지 않았다.
“이 단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서는 1614년 독일 카셀에서 출간된 Fama Fraternitatis(파마 프라테르니타티스)입니다. 설립자는 1378년 태어난 독일 기사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 문서에 따르면 그는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성묠르 찾아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 후 다마스커스, 이집트, 페즈로, 스페인에 가게 됩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라비아, 터키를 두루 여행한 것입니다. 그동안 연금술, 카발라, 신지학을 배웠다고 합니다. 발렌틴 안드레아라는 사람의 저서 ‘로젠크로이츠의 화학적 결혼’에서는 그가 현자의 돌을 발견했다고 나옵니다. 이 ‘돌’은 성배와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이후 독일로 돌아온 로젠크로이츠는 성령의 집이라는 저택을 세우고, 7명의 단원을 받아들여 장미십자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장미십자회를 상징하는 문양의 이름은 로자미스티카. 신비의 장미라는 뜻이죠. 그리고 그는 1484년 106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120년 후 그의 무덤이 발견되게 됩니다. 입구에는 POST CXX ANNOS PATEBO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해석하면 ‘120년 후에 나는 나타날 것이다’ 라는 뜻이라고 하죠. 그 무덤은 일곱 면과 일곱 모퉁이로 이루어진 방이었는데,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곳임에도 신비로운 빛으로 환하게 밝혀 있었다고 합니다. 중앙에는 원형제단이 있었는데 제단에는 ‘네쿠아쿠암 바쿰’ 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해석하면 ‘공(空)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폭풍이 몰아치듯 계속되던 미키야의 말이 끝났다. 그는 지친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윽고 미키야는 토우코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아, 토우코씨. 설명해주실까요. 이 번 조사가 스이긴토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요.”
미키야의 추궁에 토우코는 차마 마주보지 못 하고 시선을 돌렸다. 볼을 긁적이며 딴청을 부리는 토우코.
“하하, 미키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물쩍 넘기려 하지 마세요. 스이긴토의 미디엄이 된 이후, 로젠메이든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확실히 정보가 너무 적더군요. 하지만 로젠메이든이 로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총 일곱의 인형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디엄 역시 일곱이겠죠? 그리고 스이긴토를 처음 만난 날, 그녀는 로자미스티카라는 단어를 언급했었지요.”
애써 모른 척하려는 토우코였지만, 미키야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 물론 풀네임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하지만 크리스티안, 크로이츠 모두 크리스트교를 나타내는 말. 따라서 둘을 제외하면 로젠이라는 이름만 남게됩니다.”
잠시 숨을 고른 미키야는 말을 이었다.
“장미십자회의 창시자 로젠과 전설 속의 인형사 로젠. 일곱의 미디엄과 일곱의 장미십자단원. 스이긴토가 언급한 로자미스티카와 장미십자회의 상징 로자미스티카. 제가 스이긴토를 만난 날, 토우코씨가 부탁한 성배관련 조사와 성배를 보유한 것으로 추측되는 장미십자회. 마지막으로 토우코씨 같은 마술사의 숙원인 공(空)과 성배의 관계, 로젠의 무덤에 적혀있던 네쿠아쿠암 바쿰이라는 문구. 분명히 서로 관계가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유사성이 많다면, 어린애라도 의심해볼만 하지요?”
단호한 어조. 토우코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키야의 질문에 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한숨을 쉬며 그녀는 말했다.
“하아, 미키야. 직원으로서 그런 질문은 월권행위 아니야?”
“저는 스이긴토의 미디엄입니다.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알았어. 말해주지. 하지만 명심해줘. 어디까지나 이건 추측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토우코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설 속의 인형사 로젠. 그가 추구한 완전한 소녀 앨리스. 그리고 로젠메이든에 대해서.
“그렇게 해서 로젠은 모습을 감추었지. 앨리스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 실망한 채로.”
“......무책임한 사람이군요.”
토우코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내 짐작 이상이었다. 작년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마술사들의 소망이 얼마나 치열한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스이긴토는 어째서 저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걸까요?”
“분면 너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던 거야. 너는 그녀에게 있어 첫 번째이자 유일한 미디엄이니까. 아니, 그것만이 아니지. 네가 그녀를 소중히 아끼는 만큼, 그녀도 너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답이겠지.”
그런 것이었나. 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그 정도로 의지가 되지 못 하는 존재였나, 하고.
“스이긴토는.... 항상 앨리스가 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그녀는...... 앨리스가 되지 못 한 자신을 비관하고 있는 건가요?”
조심스레 토우코씨에게 물었다. 스이긴토의 밝은 모습 너머로 느껴지는 어둠. 나의 착각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이야기대로라면 그녀는 정말로 마음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우코씨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 그녀의 소망은 앨리스를 만들지 못 했기에 모습을 감춘 아버님, 로젠을 만나는 것일 거야.”
“하지만 로젠은 이미 죽었어요. 물론 어디까지나 장미십자회의 로젠과 인형사 로젠이 같은 인물이라는 전제하에서의 이야기지만, 무덤도 발견되었다고요.”
“이런. 아직 이쪽의 일은 잘 모르는구나, 미키야. 마술사에게 있어서는 육체의 죽음이 곧 존재의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아. 아라야를 기억하지? 그 녀석도 육체를 바꾸어가며 몇백년을 살아온 존재야. 하물며 로젠은 전설로까지 불리는 인형사. 죽기 전에 자신이 만든 인형으로 옮겨갔을 가능성도 농후하지.”
그제서야 생각났다. 눈 앞의 토우코씨도 한 번은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었던 존재. 즉 그 말은 로젠이 지금도 살아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비록 모습은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스이긴토에게 작은 선물을 해주기로, 하지만 그 전에 약간 걸리는 일이 있었다. 그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토우코씨에게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로젠은 로젠메이든을, 앨리스가 되지 못 한 그녀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나의 물음에 토우코씨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한 치의 주저 없이 말했다.
“마음은 똑같아. 모든 건 같아.”
“같다?”
“인형에 담긴 마음은 전부 같아. 애정을 쏟는 한 계속 살아가지.”
“애정.....”
“애정이 사리지면, 없어지고 말지. 미아가 되고 말아. 어떤 아이든지.”
“그렇다면.... 로젠은, 로젠메이든에게 애정이 있을까요?”
“애정이 없다면 인형은 만들 수 없어. 그녀들처럼 훌륭한 인형은 특히.”
“하지만 로젠은 떠나갔잖아요. 앨리스가 되지 못 한 그녀들을 남겨두고서.”
“떨어져 있어도, 멀리 있어도, 애정은 남아있어. 애정은 쏟고 있어. 이 것은 인형사로서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말할 수 있어. 로젠은 그가 만들어낸 인형들을, 그녀들은 계속 사랑하고 있어.”
“그렇군요.”
토우코씨의 말로 나는 결정을 내렸다. 굳은 다짐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토우코씨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미키야?”
“그렇다면 제가 로젠을 찾아내겠어요.”
“뭐?!”
“로젠을 찾겠어요. 그런 무책임한 인간. 자식을 버리는 부모나 다름없습니다. 얼굴에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안돼요!”
“무리야! 모습을 감춘 마술사를 찾아내는 것은 가은 마술사라도 힘들어. 하물며 일반인인 너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겠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왼 손을 들어올린다. 약지에 끼워져 있는 장미의 반지. 나와 스이긴토를 맺는 인연의 끈. 그 것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온기 같은 건 있을리 없지만,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스이긴토의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어요. 단순히 제가 그녀의 미디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미 저에게 소중한 가족 중 하나예요. 그러니까.....”
다시 고개를 들고 토우코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그녀의 바램을 이루어주고 싶습니다.”
미키야는 가람의 당을 나갔다. 아오자키 토우코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 안에서 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젖히자 하얀 천장만이 보인다.
“의외였어. 설마 미키야가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예상범위 밖이야. 어디까지나 오차수정범위 안이긴 하지만.”
미키야가 성배관련조사 건으로 인해 로젠메이든과의 관계에 의심을 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로젠을 찾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 하지만 큰 변수는 아니었다. 아무리 ‘찾기’에 재능을 가진 미키야라고 해도 일반인에 불과하다. 로젠이 모습을 감춘 방법은 마술이 관여한 것. 일반적인 조사방식으로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계획에 영향을 준다고 보기 어려웠다.
“어쨋거나 일단은 이 정도로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토우코는 미키야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앨리스 게임. 로자미스티카를 빼앗기 위한 로젠메이든 간의 싸움.
덕분에 스이긴토에게 추궁당할 걱정은 없었다. 스이긴토가 꺼려한 것은 자신이 싸워야한다는 사실이 미키야에게 알려지는 것이었으니까. 단순히 로젠메이든에 관한 것이라면 상관없을 터였다. 더군다나 미키야는 ‘선물’이라고 언급했으니, 로젠의 소재를 파악하기 전에는 스이긴토에게 자신이 이야기해주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터였다. 선물은 주기 전까지는 상대에게 비밀로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말야, 미키야.”
토우코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이 붙은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연기를 내뿜는다.
“확실히 애정이 없으면 인형을 만들지 못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야.”
애정이 없으면 인형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인형은 모두 그 안에 제작자의 사랑이 담겨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오늘따라 담배 맛이 유난히도 썼다. 그러나 지금의 토우코에게는 그 쓴 맛이 오히려 위안이 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그동안 꺼낼 수 없던 생각을 토해낼 수 있었다.
“만들다만 인형의 경우는 어떠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과연 그 안에도 사랑이 담겨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