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übsal
시 외곽의 야산. 자정에 가까운 시간.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는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어둠에 싸여있다.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외진 공터. 이런 시각, 이런 날씨에는 더더욱 사람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곧이어 수풀을 헤치고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흰색 머리카락이 이색적인 소년. 다른 한 명은 소년의 허리춤 밖에 오지 않는 작은 여자아이. 여자아이는 특이하게도 산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늘거리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지를 입은 소년보다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이야?”
“응! 여기서 단장님을 만나기로 했어.”
공터에 들어선 소년은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소녀 역시 소년 옆에 다가와 앉는다. 그런 소녀를 보며 소년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춥지 않아? 산바람이 싸늘한데.”
“별로. 우리들에게 그런 감각은 실재하지 않아. 있다면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어 의사감각을 느끼는 것에 불과해.”
“아, 그랬지. 참....”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소년. 그런 그의 시선이 문득 소녀의 얼굴로 향한다. 손을 들어 슬쩍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소녀의 뺨에는 긴 흉터가 나있었다.
“이거..... 치료하지 않을 거야?”
“.....남겨두고 싶어. 그녀를 이길 때까지. 이 것은 결의를 다지는 상징.”
“그렇구나. 동쪽 말로 와신상담이라고 하던가.”
소녀의 대답을 들은 소년은 얼마 전 배운 새로운 말을 언급하며 방긋 웃었다. 하지만 이내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저기.... 미안해.”
“.......?”
난데없는 소년의 말에 소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내가 좀 더 강한 미디엄이었다면. 그래서 너에게 더 많은 힘을 공급해 줄 수 있었다면..... 그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나는 역시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가 봐. 단장님께도 맨날 꾸중이나 받고. 이제는 키라키쇼, 너의 발목이나 잡다니. 너는 정말 강한데, 순전히 나 때문에....”
소년은 자조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 얼굴에는 한껏 미안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 모습에 키라키쇼라 불린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하고.
할 수 없이 키라키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다리로 서서 팔을 올리자. 소년의 얼굴이 손에 닿았다. 소년이 지금 앉아있기에 가능한 자세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소년의 고개를 자신에게로 돌렸다. 이마와 이마가 맞부딪쳤다. 눈과 눈을 바라보며 키라키쇼는 말했다.
“잘 들어, 롤랑. 내가 진 것은 순전히 나의 기량미숙 때문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롤랑이 부적해서 그런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괜히 이상한 생각하면서 풀 죽지 마. 그럴 필요 전혀 없으니까.”
소년은 놀랐다. 소녀가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나 길게 표현한 적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녀가 감정을 표현한 적이 있기라도 했을까. 소년의 놀람과는 관계없이 키라키쇼는 말을 이었다.
“이번으로 나도 내가 부족한 점을 알았으니까. 다음엔 꼭 이길 거야. 알았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소년은 입을 한껏 벌리며 웃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소년은 두 팔을 벌려 소녀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에헤헤~ 역시 키라키쇼는 나를 좋아하는구나~”
“잠깐! 이야기가 왜 그렇게.... 우웁! 숨막혀!”
“나도 사랑해애애애~~~”
“우우웁, 우웁!”
호들갑 떠는 소년의 애정공세. 키라키쇼는 품에 파묻힌 채 버둥거릴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체격차이가 컸던 만큼, 그 몸부림은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그때였다.
“이런, 롤랑. 기사로서의 예를 지켜야지. 숙녀분께서 곤란해 하시지 않느냐.”
낭랑한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훼방꾼에 놀란 소년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 틈에 키라키쇼는 얼른 빠져나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새로 나타난 인물을 바라보았다.
롤랑과 마찬가지로 하얀 머리카락, 붉은 눈의 소유자. 다른 점이라면 그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온다는 것과 훨씬 큰 키라는 것. 20대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섬세하면서도 각이 진 얼굴의 준수한 미남이었다.
그러나 키라키쇼는 청년에게서 왠지 모를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에 대한 불안감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롤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한껏 반색을 한 채 청년을 보고 있었다.
“단장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가는 롤랑. 단장이라 불린 청년은 자신의 앞에 다가와 선 소년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어주었다.
“오랜만이구나. 잘 있었느냐?”
“예, 그렇습니다! 아, 그래. 키라키쇼, 인사 드려. 이 분이 바로 단장님이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키라키쇼는 쭈삣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청년은 그런 그녀를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호오, 그녀가 키라키쇼로군.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야. 가방 속에서 자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헤에, 그러셨어요? 키라키쇼. 뭐 해? 이쪽으로 와.”
청년에게 거리를 두려던 키라키쇼였지만, 롤랑의 재촉에 한 발 더 앞으로 내밀었다. 아니, 내밀려 했다.
“큿!”
그녀를 노리고 날아든 공격. 키라키쇼는 급히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키, 키라키쇼!”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롤랑은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 소녀의 안전을 확인한 그는 검을 뽑아 들고는 주위를 경계했다.
“단장님! 적의 습격인 것 같습니다. 어서 전투태세를!”
롤랑은 아직까지 멀뚱히 서 있는 단장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그는 검을 빼어들 생각도 않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찰 뿐이었다.
“이런, 성격이 급하군. 오랜만에 만난 단원과 재회의 시간은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우후훗~ 기다리는 건 질색이라서~”
고혹적인 여성의 목소리. 그녀는 천천히 단장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였다.
“너는....!! 너는 누구지?”
경악에 찬 키라키쇼의 외침.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그저 단장의 눈빛이 그때까지의 부드러움을 버리고 광폭한 야수의 눈으로 변했을 뿐.
“하긴 상관없겠지. 그럼 시작하도록 할까.”
“아아, 그래. 앨리스 게임의 시작이야.”
키라키쇼를 바라보며, 그녀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은 희열. 잔혹하게 죽어갈 사냥감에 대한 기대에 찬 환희. 그녀에게 있어서 눈 앞의 소녀는 결코 동격의 존재가 아니었다. 단지 그녀를 완성시키기 위한 부품 중 하나일 뿐.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그만두어 주십시오!”
롤랑은 눈 앞의 남자에게 외쳤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키라키쇼의 수정의 세계.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면서 그녀가 자신의 힘을 발현한 것이었다. 공중에서는 두 인형이 서로의 힘을 충돌시키고 있었다.
“어리석구나, 롤랑. 지금 이 싸움은 앨리스게임이라는 신성한 의식이다. 앨리스로 부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 그녀들은 언젠가는 서로 싸워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거다. 단지 그 날이 오늘이 되었을 뿐.”
“그런....!!”
롤랑의 말에도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단지 두 인형의 모습만을 눈으로 쫒을 뿐.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를 속이신 겁니까? 탐색전만 하라는 명령은 모두 이 것을 위해서였습니까?”
“천만에. 기사는 남을 속이지 않는다. 그 것은 단지 키라키쇼에게 자격이 있느냐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을 뿐.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탈락이다.”
“그렇다면.... 키라키쇼를 죽이겠다는 겁니까!”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롤랑.”
남자는 소년을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누구를 죽이고 말고는 나의 권한이 아니다. 단지 승자가 패자의 로자미스티카를 빼앗는 것뿐. 지금 이 싸움도 만약 키라키쇼가 승리한다면, 살아남는 것은 그녀 쪽이다. 그야말로 공정한 힘과 힘의 겨룸인 것이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굳건한 태도. 롤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그의 말에 잘못된 점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짧은 안목으로도 알 수 있었다. 두 인형간의 싸움은 키라키쇼 측이 현저하게 밀리고 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상대는 그녀를 그저 가지고 놀고 있는 것 뿐 이었다. 애초에 승부는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콰아아아앙!
순간 강렬한 충격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땅에 파묻힌 키라키쇼의 모습이 보였다. 주변에는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크레이터가 패여 있었다. 충돌시의 충격으로 그 부근의 수정들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그녀를 향해 상대는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롤랑에게 그 모습은 악마와도 같이 느껴졌다.
“키라키쇼!”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는 롤랑. 손에는 그의 검 듀렌달을 치켜들고 있었다.
채앵!
그러나 그의 검은 단장이 들어 올린 검집에 의해 가로막혀다. 동시에 롤랑의 배에 강한 발길질이 가해졌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은 뒤로 날아가 땅에 굴렀다. 고통에 이를 악무는 롤랑의 귀에 남자의 나무라는 말이 들려왔다.
“무슨 짓이냐, 롤랑. 신성한 대결을 방해할 셈이냐. 기사의 칭호에 부끄러운 줄 알아라.”
‘기사’ 그 단어를 들은 순간 롤랑의 이성이 끊어졌다.
“닥쳐!”
소년의 머리 속에서 그 동안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영화필름처럼.
처음 눈을 뜬 것은 유리수조 속. 그 당시의 그에게 사고나 감정은 없었다. 그저 백지와도 같은 상태.
그 후로도 아무런 의식 없이, 그저 기계처럼 검을 휘두르며 몸을 단련했다.
그 생에 의미가 생긴 것은 한 소녀와의 만남.
작은 가방 속에서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이 아이는.....?”
“이름은 키라키쇼. 너는 앞으로 그녀의 미디엄이 된다.”
그제서야 소년에게 목적이 생겼다.
살아가는 의미가 생겼다.
그의 검은 오직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휘둘러질 것을 맹세했다.
비록 그녀는 계속 잠들어 있었지만.
소년 혼자만의 약속이고 맹세였지만.
그리고 수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동방의 이 작은 땅에서
소년은 소녀가 눈을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여쁜 황금색 눈동자.
조그마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제서야 소년의 이상은 현실이 되었다.
소녀는 소년의 공주님.
소년은 소녀를 지키는 기사.
그렇다. 소년은 ‘기사’였다.
하지만..... 그 칭호가 이제는 소년을 얽매고 있었다.
“닥쳐! 닥쳐! 닥치란 말이다!!”
그 것은 차라리 절규였다.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그 들끓는 감정을 이기지 못 하고 더욱 붉게 변했다.
“뭐가 기사냐!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런 작은 약속조차 지키지 못 하는 것이 무슨 기사냐!”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서이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 그대는 작은 정에 흔들려 대의를 그르칠 셈인가!”
“닥치란 말이야!!”
다시 한 번 소년은 거칠게 내뱉었다.
“뭐가 대의냐! 그런 것 따위 나는 몰라! 자신의 레이디조차 지키지 못 하는 것이 기사라면.....”
소년은 자신의 검을 치켜들었다. 그 끝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이에게 향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기사를 버리겠다!!”
타오르는 눈동자로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며 소년은 외쳤다.
그런 소년을 바라보며 남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상급자에 대한 무례. 명령불복종. 기사의 이름을 더럽히고 스스로 부정한 죄. 즉결처분을 당해도 부족할 정도다. 그러나.....”
스르릉~
천천히 남자는 칼을 뽑았다.
“그대가 흥분한 상태임을 고려하여, 처분은 보류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신성한 대결을 방해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그녀를 돕고 싶다면.....”
남자의 검 역시 소년을 향했다. 시리도록 차가운, 그러나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 태워버릴 것만 같은 열기가 담긴 칼의 끝이 소년을 가리켰다.
“나부터 쓰러트려라.”
“하아아아앗!”
검과 검이 맞부딪혔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각자가 지키고자 하는 정의를 위해서.
‘롤랑.....’
귓가에 들리는 쇳소리. 결국 그 바보 같은 소년은 단장이라는 자와 겨루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의 실력으로는 결코 그 남자의 상대가 되지 못 한다.
“크읏....”
과도한 충격 때문인지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이었지만, 애써 바닥을 짚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힘내야만 했다. 그가 저 남자에게 다치기 전에 내가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했다. 그러나 상대는 가만히 기다려주지 않았다. 복부에 강한 발길질이 가해진 것이다.
“커헉!”
그대로 뒤로 날려져 바닥을 굴렀다.
“아직 움직일 여력이 있나 보네. 쓰레기 주제에!”
비웃는 목소리. 상대는 조금도 지치지 않은 여유로운 모습이다. 나의 전력을 다한 공격조차 그녀에게는 장난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아..... 슬슬 끝내줄게. 나의 일부가 되렴.”
한발한발 다가오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 하지만 아까 전의 충격으로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이젠.... 끝인가. 그래. 어느 쪽이든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승부가 결정되면 그와 그 남자의 싸움도 멈출 것이다. 그가 다치는 일도 없다. 이것으로 모두 잘 된 거다. 그런 생각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키라키쇼!”
그가 나를 불렀다. 너무나 큰 외침에 귀가 아플 정도다.
“일어서! 일어나서 저런 녀석 간단히 쓰러뜨려 버리라고!”
미안해. 나로서는 역부족이야.
“주저앉지 마! 이대로 끝낼 셈이야! 약속했잖아. 모든 일이 끝나면 같이 놀러가기로!”
미안해.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나는.... 그 때 너에게 청혼할 거야.”
롤랑, 그게 무슨....
“네가 인형이라도 상관없어! 애초에 나 역시 너와 같은 만들어진 존재인걸. 너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여자야!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이고.... 유일하게 사랑할 여자야! 앨리스라고? 그런 건 상관없어! 너는 이미 나의 앨리스니까! 나에게 있어서 누구보다도 완전한 소녀니까! 사랑해! 너 없이는 나는 살 수가 없다고!”
롤랑, 나는.... 나는.....
“그러니까..... 같이 싸우자!”
그리고 나와 그의 마음은 하나로 이어졌다.
파아앗!
롤랑의 왼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윽한 보랏빛 향기가 주위에 맴돌았다. 그 근원은 그의 손가락에 끼인 장미의 반지.
빛은 키라키쇼에게서도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몸 속에 있는 로자미스티카로부터 강한 힘이 흘러넘쳤다.
“이건.... 미디엄의 힘인가!”
좀 전까지 여유로운 모습이던 상대는 그 빛이 눈부신 듯 차마 마주보지 못 하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몸에 충만한 기운을 느끼며 키라키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자신했다. 지금 이 힘이라면 이길 수 있다고.
키라키쇼는 고개를 돌려 롤랑을 바라보았다. 롤랑은 고개를 돌려 키라키쇼를 바라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싱긋 웃었다. 키라키쇼로서는 처음 짓는 진심 어린 미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둘은 다시금 자신과 겨루던 상대를 바라보았다.
“2라운드의 시작입니다!”
“2라운드의 시작이다!”
둘은 동시에 외쳤다.
키라키쇼의 앞에서 생겨난 수정의 창이 단 하나의 목표를 노리고 날아갔다. 하지만 상대의 공격에 마치 모래처럼 허물어졌다. 그 여파는 키라키쇼가 있던 자리에도 미쳤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근처의 수정을 통해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확실히 지금 상태에서도 저쪽이 강해. 하지만 승산은 있어.’
그녀에게는 3번의 전투경험이 있었다. 횟수로 본다면 적을지도 모르지만, 그 대신 그녀는 로젠메이든 다섯과 겨루어보았다. 그 결과 그녀들의 공격패턴을 숙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바로 전에 있었던 싸움, 스이긴토의 승부가 그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떤 로젠메이든보다도 다양한 패턴의 공격을 선보였던 스이긴토. 지금 상대 역시 다양한 공격방식을 구사하고 있지만, 스이긴토의 경우와 큰 차이가 없었다. 비록 가끔 나오는 음파와 풍압의 공격은 익숙치 않은 것이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이긴토와의 승부로 인해 키라키쇼는 자신의 약점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그녀는 상대의 페이스를 점차 흩어놓을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흐름은 상대방이 주도하고 있다. 비록 미디엄과의 공조로 인해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된 키라키쇼였지만, 여전히 상대에게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자매는 지금의 그녀조차도 훨씬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키라키쇼에게는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조커가 있었다. 발동시간은 길지만 대신에 절대적인 위력을 가진 비장의 수. 승부의 향방은 그것에 달려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오직 그것 하나를 위한 것이었다.
“짜증나는 녀석. 어디 있는 거냐!”
저 멀리서 상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지금까지 부서진 수정의 잔해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것이야말로 키라키쇼가 쳐놓은 덫이었다.
“얼어붙은 안개와도 같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라.”
나직한 키라키쇼의 목소리. 그녀의 말에 응하여 상대의 주위에 있던 수정파편들이 부서져 흩날렸다. 마치 물방울 같이 작은 조각들로 나뉘어져 비산했다.
일부는 상대에게 붙어서 그녀의 움직임을 둔하게 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달라붙은 수정조각들이 스쳐 상처를 냈다.
일부는 주위에 허상을 만들었다. 수십개의 키라키쇼의 환영이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상대를 향해 주변에 남아있던 모든 수정기둥들이 솟구쳤다.
“이.... 쓰레기 따위가!”
그런 공격들조차 상대를 잠시 묶어둘 수 있었을 뿐. 둔해진 몸으로 수정기둥을 피하던 그녀에게서 강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기둥들이 부서진다. 공기 중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바람에 날려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붙어있던 나머지 조각들도 폭사된 기운에 의해 떨어졌다.
“죽여버린다!”
멀리 떨어져 있는 키라키쇼를 발견한 그녀는 분노의 감정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며 덮쳐왔다. 눈 깜박할 사이에 바로 앞까지 날아온 그녀의 공격이 키라키쇼에게 가해졌다. 그러나 이미 키라키쇼는 자신의 수정 속에 들어가 있었다.
빠직!
물론 그렇다해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수정의 큰 금이 그어졌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키라키쇼의 오른쪽 눈은 완전히 뜨여있었다. 그리고 지금 수정의 표면으로도 그 힘이 발현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파아아앗!
활짝 만개한 장미 속으로 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시선은 눈 앞의 상대에게 향해있었다.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상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쿠구구구구
온 세상이 얼어붙었다. 시야가 미치는 곳 모두가 거대한 수정들로 뒤덮여버렸다. 세계가 그대로 결정으로 화했다.
수정이 들어차있던 세계는 수정 속에 갇혀버렸다.
“후우....”
키라키쇼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당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눈 앞의 상대는 키라키쇼에게 공격을 가하던 모습 그대로 수정 속에 갇혀있었다. 부릅 뜬 눈이 경악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을 뿐. 그녀는 그대로 수정 속에 얼어붙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키라키쇼가 가진 비장의 수.
수정의 마안.
사물, 생명, 심지어는 세계조차도 결정화시키는 마안.
모든 것은 수정으로 변하여 그 속에 갇혀버린다.
시간과 공간조차 얼어붙은 절대의 감옥.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영원의 감옥 속으로.
어느덧 두 남자의 싸움도 멈춰있었다. 키라키쇼는 천천히 그들에게 날아왔다.
“키라키쇼....”
롤랑은 한껏 안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반겼다. 키라키쇼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단장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검을 거두십시오. 엘리스게임은 저의 승리입니다. 더 이상 두 사람이 싸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에 단장은 치켜들었던 검을 내렸다. 그러나 검집에 꽂지는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표정으로 키라키쇼를 바라보았다.
“어리석군.”
“......?”
“승부는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거나 혹은 그럴 수 조차 없는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야 결정되는 것. 역시 그대는 미숙하군. 앨리스가 될 자격이 없어.”
“무슨.....!!”
콰직.
“아.... 아아.....아.....”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에 잡히는 것은 차디찬 쇠붙이.
“아.... 아윽....”
이건 뭐야? 어째서 이런게 내 눈에서 나와 있는 거야?
“크.... 으으으.....”
남아있는 왼쪽 눈의 시선이 그 쇠붙이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보았다. 그 끝에 달려있는 동그란 구슬 같은 물체를.
“아.... 아..... 아아.....”
그 것이 자신의 오른쪽 눈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키라키쇼의 의식은 꺼져버렸다.
“쓰레기 주제에 제법이었어. 그런 수를 감춰두고 있었을 줄은.”
키라키쇼의 뒤통수에 꽂힌 칼은 그대로 그녀의 오른쪽 눈을 꿰뚫고 빠져나와 있었다. 검 끝에 박힌 눈알이 덜렁거린다.
“덕분에.... 제법 아팠어. 알겠어? 아팠단 말이야!”
콰드드득
소녀는 손에 쥔 칼자루를 돌렸다. 그에 따라 칼날 역시 돌아가며 키라키쇼의 머리를 으스러뜨렸다. 구멍이 바스라지며 넓어진다. 속에 든 장치들이 제자리를 잃고 망가진다.
“하지만.... 그래봤자 이젠 끝이야.”
콰직!
소녀의 다른 한 손이 키라키쇼의 등을 꿰뚫었다. 그 속을 이리저리 헤집던 손이 이윽고 원하던 것을 찾고는 빠져 나왔다.
털썩
그제서야 구속에서 풀려난 키라키쇼의 몸이 낙하했다. 땅에 떨어진 그녀는 힘없이 나뒹굴었다. 동시에 매개를 잃은 수정의 세계가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파편들은 마치 세례하는 것처럼 소녀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보랏빛 광채를 발하는 돌을 그대로 입으로 삼키는 소녀. 희열에 찬 표정이었다.
“이걸로 로자미스티카는 모두 3개. 얼마 남지 않았어. 아하하하~”
소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리 속이 텅 빈 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온 몸은 돌이라도 된 듯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은 슬로우 영상처럼 비추어질 뿐이었다.
검에 머리가 꿰뚫린 키라키쇼.
가슴에 손이 박힌 키라키쇼.
떨어지는 키라키쇼.
땅바닥에 널부러진 키라키쇼.
머리 속에서는 계속 같은 영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터벅
드디어 소년의 몸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 것은 소년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동인형처럼 기계적인 움직임. 소년은 그대로 다리만 움직여 키라키쇼 ‘였던 것’의 옆에 다가섰다.
퀭하니 뚫린 눈
가슴에 난 구멍
아무런 표정조차 없는 얼굴의 부서진 인형이 그 곳에 있었다.
“그만 돌아간다.”
“저 아이는 어떡할 거야?”
“지금은 충격이 클테니, 나중에 데리러 온다.”
“흐음.....”
두 남녀의 말소리.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간다.
‘기다려.’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기다리란 말야.’
이제는 소리조차 희미해진다.
“우아아아아압!!”
비명인지, 절규인지, 혹은 통곡인지조차 알 수 없는 괴성과 함께 소년은 내달렸다. 주변은 보이지 않았다. 그 시야에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소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빼앗은 소녀. 앞에 걸어가는 그녀의 등을 향해 소년은 검을 휘둘렀다.
서걱!
그러나 소년의 검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검을 쥐고 있던 오른 팔이 잘려나갔기 때문에. 땅에 떨어진 칼이 잘려진 팔과 함께 바닥에 뒹굴었다. 곧이어 날아든 발길질에 채인 소년 역시 바닥에 뒹굴었다.
“커헉!”
팔을 베인 상처 때문인지, 차인 충격 때문인지 극심한 통증에 소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잘려나간 어깨에서 빠져나가는 피 때문인지 의식조차 혼미해졌다.
“수치인줄 알아라, 롤랑. 숙녀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뒤에서 기습까지 하다니. 이것만은 용서할 수 없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대가 저지른 다른 죄에 대한 처벌은 후에 결정하겠다. 그때까지 근신하고 있어라.”
그런 건 몰라. 그녀를 돌려줘. 그녀를 살려내란 말이야!
소년의 외침은 단지 속에서만 맴돌 뿐,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혼미하던 의식은 발소리가 멀어짐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투둑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을 적셨다. 그 감촉이 소년의 의식을 암흑 속에서 일깨웠다. 감겨있던 소년의 눈이 뜨였다. 우중충한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보였다.
“끄.....윽...”
신음과 함께 소년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한쪽 팔만으로는 일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상처에서 계속 느껴지는 통증이 움직임을 방해했다. 결국 소년은 누운 채로 꿈틀거리며 한쪽 팔을 이용해 기어갔다. 진흙탕이 된 바닥인지라 몸이 더럽혀졌지만, 지금 소년은 그런 걸 신경 쓰지 못 했다.
“키....라...키.....쇼”
소년의 머리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 존재를 애타게 부르며 소년은 계속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를 수 있었다. 비록 진흙에 얼룩져 더럽혀졌지만, 아직 선명한 보라색 드레스의 소녀.
“왜... 이런 곳에 누워 있....는 거야. 옷....이 더러워....지잖아.”
남아있는 하나의 팔만으로 소녀를 끌어안으며 소년은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키라키쇼.... 비가 내리잖아. 그만 돌아가....야겠어. 그러니까.... 이만 일어나.”
그러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어나.... 눈을 떠봐.”
그러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 나.... 이젠 함부....로 끌어안지 않을게. 얌전히 있을....게. 떠들지도 않을게. 그러니까.... 놀리지 말고 그만 일어나.”
그러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눈을 떠.....”
그러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으흐흑.... 으아아아아~~~~”
소년의 얼굴을 적시는 것은 눈물인가. 아니면 빗방울인가. 어쩌면 지금 내리는 비 자체가 소년의 눈물인 것 일까.
아마 그 모두일지도 모른다.
인적 없는 야산은 조용하기만 하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어버린 이의 울음소리만이 빗소리에 섞여 흘러내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