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 감옥 실험 2화
어둡고 텅빈 가게 안에서 해리는 핏줄을 타고 흐르는 아드레날린과, 미친듯이 가슴을 때려대는 심장을 느낄 수가 있었다. 퀴렐 교수가 설명을 끝냈고, 해리의 한 손에는 모든 것의 열쇠가 될 자그마한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이것이다, 오늘 이 시점 이후로 해리는 마침내 한걸음 내딛게 되는 것이다. 그의 진정한 첫 모험. 헤쳐나가야만 하는 던전, 맞서싸워야 하는 악의 정부, 그리고 구출을 기다리는 여인. 정상적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두렵고, 내키지 않아야 하겠지만 해리는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책에서나 읽었던 사람들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태어날 때부터 그의 운명이라고 본능적으로 느낀, 영웅의 길을 걸어나게 될 날을. 라이스틀린 마제레, 가 아니라 킴벌 키니슨이나 캡틴 피가드, 혹은 '썬데라의 라이오노'가 앞서 닦아놓았던 그 길에 발자국을 남길 날을.
아침 일찍 일어나 만화를 시청했던 해리의 뇌가 아는 바로는, 어른이 되면 미친듯한 힘을 얻어 대충 세상을 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어른들을 보면서 자라던 해리의 뇌는 그런 이들을 롤모델로 삼아버리고 말았고, 해리는 슬슬 성장하고 싶은 참이었다.
그리고 이 서사시에서, 첫번째 모험부터 영웅이 무언가의 대가로 순수함을 일부 잃게 되는 전개가 기다리고 있다면, 적어도 아직 순수함이 남은 이 시점에서는, 충분히 그러한 시련을 겪어도 불만이 없을 것 같았다. 마치 너무 작아 더 이상 입지 못하는 옷을 버리는 것처럼, 아니면 11년 동안이나 슈퍼 마리오의 월드 3 두번째 스테이지와 사투를 벌이던 중 마침내 깨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것처럼.
수많은 소설로 인해 훗날에도 이런 흥분감을 이어갈 수 없을 거란 사실을 충분히 터득한 해리였기에, 해리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그때 해리의 옆에서 무언가가 사라지면서 ‘펑’하는 소리가 났고, 해리는 형편좋게 영웅적인 고뇌에 빠져있을 순간이 끝났다는 것을 인지했다.
해리가 손에 힘을 주어 자그마한 나뭇가지를 두동강냈다.
포트키가 작동됨과 동시에, 보이지 않은 갈고리가 해리의 몸을 우악스럽게 끌었다. 호그와트와 다이애건 앨리 사이의 짧은 이동과는 비교할 수 없게 거센 힘이 그에게 작용했다 ─
─그리고 들린 것은 때마침 잦아드는 거대한 천둥이오,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는 건 빗물이리라. 비는 쉴틈없이 해리의 안경을 적셔 한순간에 그의 눈이 멀었고, 저 밑의 성난 파도를 향해 낙하하는 그의 시계마저 희뿌옇게 변모시켰다.
그가 도착한 곳은 공허한 북해의 높디 높은 상공이었다.
고막을 찢어지게하는 폭풍의 위엄에 해리는 그만 퀴렐 교수로부터 받았던 빗자루를 놓칠 뻔 했다. 제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어 다시 빗자루를 위로 틀기까지 해리는 무려 1초라는 시간을 소모해버렸다.
“여기 있다,” 낯선 목소리가 허공 위에서 들려왔다. 낮고 진중한 그 목소리는, 퀴렐 교수가 폴리주스로 변신한, 누렇고 여윈 수염의 사내였다. 그는 환영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뒤, 빗자루를 타고 있음이 분명했다.
“여기 있다,”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해리가 말했다. 그는 폴리주스를 복용하지 않았다. 다른 인간의 형태를 취하는 건 마법을 흐트러지게 하였고, 어쩌면 마법을 그야말로 쥐어짜내야 할 지도 모르는 해리로써는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다. 고로 계획을 수정하여 해리는 폴리주스 보다는, 아예 영구적으로 몸을 은신시키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둘 모두 상대방의 이름을 외치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위도도 잡기 힘든 북해를 투명하게 떠돌아다닌다 한들, 아무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데 실명을 사용할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빗줄기와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한 손으로 빗자루를 굳게 쥔 해리는, 차분하게 지팡이를 올려 안경에 ‘임페르비우스’ (방수 효과) 마법을 걸었다.
시야가 깨끗해지자, 해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바람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섭씨 5도 정도의 기온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순전히 2월에 바깥으로 나간다는 이유 때문에 일찌감치 보온 마법을 걸어두기는 했으나, 차디차게 스며드는 빗방울에는 영 맥을 못추리고 있었다. 눈보다 더 끔찍한 것은 바로 노출된 쪽에 비참하게 쏟아져 온 몸을 적시는 비다. 투명 망토는 사용자를 완전히 투명하게 만들어주었으나, 엄밀히 말해 몸 전부가 망토 아래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고, 맟나가지로 비 또한 완전히 막아주지 못했다. 해리의 얼굴은 거세게 쏟아지는 폭우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고, 한번 그의 얼굴을 휘갈긴 빗물은 목을 타고 흘러내려 옷을, 그리고 소매를, 나아가서는 바지와 신발마저 적시더니, 이내 그의 전신을 장악하고 말았다.
“이쪽,” 폴리주스로 변화한 목소리가 말하자, 녹색의 섬광이 해리가 탄 빗자루 앞에 현현하더니 어지럽게 방향을 이리저리 뒤틀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리는 폭우를 뚫고, 해리는 불빛을 따라갔다. 녹색 섬광의 행방을 잃을 때마다 해리가 부르면, 얼마 안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고는 했다.
마침내 섬광을 추격하는 요령이 늘었다고 생각했을 무렵, 별안간 섬광이 속도를 높였다. 해리는 빗자루를 박차 그를 뒤따랐다. 빗물이 싸대기를 더욱 더 세게 때리는 것이, 이게 얼굴에 정면으로 삿건을 쳐맞았을 때 느끼는 기분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안경 너머의 시야는 여전히 또렷했고, 훌륭하게 그의 눈을 보호해주었다.
빗자루의 한계 속도로 달린지 몇분이 지났을까, 해리는 비의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물 위로 솟아오른 거체의 그림자를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를 고요하게 기다리는 듯한, 공허하기 짝이없는 ‘죽음’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지며 해리의 정신을 휩쓸고 주변에 머물렀다. 마치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마냥. 해리는 그의 적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의 의지는 강철과도 같았으며, 곧 온 세상의 빛과도 같았다.
“벌써 디멘터가 느껴지는군,” 폴리주스로 변화한 퀴렐의 진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토록 빨리 느껴질 줄은, 예상 밖이다.”
“별을 떠올려봐,” 천둥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해리가 목소리를 전달했다. “자그마한 분노마저 없애버려, 비관적인 감정은 무엇이든 간에 안 돼. 별, 오직 그것만 떠올려, 자신을 망각하고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이 어떤지 생각해. 그리고 그 생각을 오클러먼시 방벽처럼 정신의 주변에 둘러. 디멘터가 그 방벽을 뚫으려면 상당한 고생을 해야 할 거야.”
잠깐의 침묵 끝에, 퀴렐이 말했다, “흥미롭군.”
녹색의 섬광이 고공으로 치솟자, 해리도 빗자루를 틀어 따라갔다. 주변은 어느새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바다 위에 낮게 떠있던 구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둘은 삼면으로 이루어진 금속의 건물 위에서 비스듬하게 체공하기에 이르렀다. 강철의 삼각형 건축물은 속이 텅 빈 일종의 공동이었다. 삼면의 두터운 강철 벽의 중심은 공허했다. 경비를 맡은 오러들이 머무는 숙소는 건물의 남측 옥상에 위치. 아즈카반의 내부로 향하는 합법적인 정문은 바로 건물의 남서측 옥상에 자리해있다. 물론 둘이 가급적 기피해야할 입구였다. 둘은 건물의 북측 옥상 바로 밑을 가로지르는 통로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퀴렐 교수가 먼저 내려가, 건물 최북단의 옥상과 결계에 구멍을 내고 그 틈을 막는 환영을 거는 것이 계획의 첫번째 단계다.
죄수들은 범죄의 질과 형량에 따라 각각 건물 벽의 안에 수감되어있다. 그리고 최하층, 아즈카반의 가장 밑자락이자 중심의 공동에는, 수백의 디멘터가 도사리고 있는 소굴이 자리했다. 간혹 경계를 맡은 오러들은 자신이 몇층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즈카반의 중심부에 흙을 한줌 떨어뜨려본다고 한다. 디멘터에 노출된 흙은 진흙으로 변했다가, 이내 소멸하기 때문에….
“1분만 기다려라,” 거친 목소리가 해리의 귓가를 때렸다. “그 뒤 전속력으로 낙하하되, 경계를 강화하도록.”
“알겠다,” 해리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섬광이 꺼지며 동시에 해리는 수를 세기 시작했다. 일 일천, 이 일천, 삼 일천…
…육십 일천, 그리고 해리가 낙하했다. 얼굴 주변으로 공기가 찢어지는 듯 했다.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저 거대한 철옹성을 향해서 나아갔다. 철옹성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빛이 꺼져가고, 발산되는 공허함이 유형화되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건물의 남서측은 오로지 사각형의 형태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어렴풋이 또렷해져가는 건물의 북측 모퉁이에는 퀴렐 교수가 뚫은 통로는커녕 깨끗하게 텅 비어있었다.
비행 수업에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던 것과는 달리 해리는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조금 더 이르게 빗자루를 상단으로 틀어 급정지시켰다. 완전히 허공에 정지해 부드럽게 체공하기 시작했을 무렵, 해리는 북측의 옥상 모서리 끄트머리로 생각되는 위치를 향해 빗자루를 천천히 이끌어갔다.
환영으로 이루어진 지붕을 투명화한채로 하강하는 감각은 정말이지 매우 오묘했다. 그 기분을 곱씹을 무렵, 해리는 희미한 주황색 불빛으로 밝혀진 철제 통로 안에 들어와있는 스스로를 자각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채 주변을 돌아본 해리는, 그 불빛이 구식의 ‘가스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디멘터의 존재만으로도, 마법은 시간과 함께 사그라들어 이윽고 소멸하기 때문일 터.
해리는 빗자루에서 내렸다.
주변을 맴돌며 희롱하나 결코 그를 건드리지는 않는 공허의 속삭임이 더욱 더 커져갔다. 멀찍히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이 세계에 새겨진 상흔들. 눈을 감은들 그들의 위치를 잃어버릴 일은 없다.
[패트로누스를 시전해] 주황색 빛에 의해 녹색이라기 보다는 퇴색된 것마냥 창백한 뱀이 바닥에서 말했다.
파셀통그를 통해서도 그가 느끼는 깊은 스트레스가 묻어나오다니, 해리는 속으로 놀라움을 표했다. 퀴렐 교수의 말에 따르면 애니마구스의 모습으로 변신한 자는 디멘터의 기운에 다소 내성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패트로누스가 동물의 모습을 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해리는 추측했다.) 뱀의 모습을 취했음에도 이 정도의 극렬한 피로감을 느낄 정도라면, 방금 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인간형으로 있었을 때는 도대체 어떤…?
해리는 저도 모르게 지팡이를 서서히 올렸다.
이게 바로 시작을 알리는 도화선이 될 것이다.
설령 고작 한 명이라 해도, 설령 단 한 명만을 어둠에서 구출할 수 있다고 해도, 설령 아직 아즈카반의 수감자들을 전부 안전한 장소로 순간이동시켜 이 지옥의 삼각형 건축물을 불태워버릴 힘은 없더라도….
그래도 이것이 시작이다. 비로소 시작했다. 일생동안 해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를 앞에 두고 결코 뒷걸음질 치지 않겠다는 선포였다. 더 이상은 기다림도, 막연한 희망도, 허울뿐인 약속도 하지 않으리라.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오늘 이 장소에서 선언한다.
해리의 지팡이가 디멘터들이 똬리를 튼 저 지하 밑을 향해 허공을 갈랐다.
“익스펙토 패트로눔!”
빛을 발하는 인형이 그 존재감을 흩뿌렸다. 전과 같이 태양처럼 밝은 것은 아니었다…아마, 그가 구할 예정이 아닌 다른 죄수들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 패트로누스를 장시간 유지해야 할 확률이 높았고, 기왕이면 들키지 않게 밝기를 적당히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 생각이 미치자 패트로누스가 조금 더 희미해졌다. 해리가 집중을 조금씩 흐트러뜨리자 눈부신 인형은 점차 밝기를 잃었고, 마침내 가장 밝은 동물형 패트로누스보다 아주 조금 더 밝은 빛을 발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보다 더 희미해지게 만들면 패트로누스가 소멸해버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기에 해리는 이만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는, [안정되었어] 뱀의 언어로 바람소리를 낸 뒤 빗자루를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손에 쥔 지팡이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력을 모아, 꾸준히 에너지를 방출하는 패트로누스로 주입하는 매개체였다.
기다란 뱀의 형태가 이지러지더니 퀴렐 교수의 지팡이를 한쪽에, 빗자루를 반대쪽 손에 든 호리호리한 사내로 변하였다. 사내는 흐느적거리며 발을 몇번 헛딛더니, 이내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가다듬었다.
“잘했다, 조금 늦긴 했으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메마른 음성은 여전했으나, 목소리도 그렇고 털로 뒤덥힌 얼굴도 그렇고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았다. “이제 전혀 안 느껴지는군.”
잠시 뒤 빗자루가 사내의 망토 속으로 들어가더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지팡이로 머리를 한차례 톡톡 두들기자, 달걀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그의 신형도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공기 중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녹색의 구체가 피어오르자,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해리가 재빨리 그를 뒤쫓았다.
제 3자가 이 광경을 본다면, 반딧불처럼 유영하는 작디 작은 녹색의 빛무리를 은의 인영이 묵묵히 뒤따르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가스등에 가스등을 지나, 간혹 마주치는 철문을 열어 밑으로, 또 밑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적막한 아즈카반의 최하층으로 내려갔다. 퀴렐 교수가 친 모종의 결계로 인해 주변에서 자아내는 소음을 전부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음에도, 해리에게 도달하는 소리는 전무했다.
해리는 어째서 이리도 고요한지에 대한 의문과 자연스럽게 답을 도출해내려 하는 사고를 중단하는 데 고역을 겪고 있었다. 아니, 직감적으로 이미 답을 짐작해내었으나 애써 그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처롭게 발악을 해대는 중이라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이었다.
저 거대한 철문 뒤 어디선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그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은빛의 인영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해리는 사전에 퀴렐 교수로부터 거품머리 마법을 사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무 냄새도 맡지 않게 말이다.
흥분과 영웅심리는 조금 전 해리의 짐작대로 이미 달아난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의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일렀다. 철문 하나를 지나자마자 그러한 감정들은 그야말로 소멸해버렸다. 모든 철문은 거대한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있었다. 마법 처리 하나 안 되어, 호그와트의 1학년생마저 간단하게 열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물건.
아직 마법을 쓸 수 있고, 지팡이가 있을 경우에 한정되지만.
죄수들에게 해당사항은 없다. 퀴렐 교수의 말에 따르면 저 철문은 개개인의 감방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철문 뒤에 펼쳐지는 것은, 복도 양 옆에 끝없이 펼쳐진 수많은 감방들. 어쩐지 그 말에 기분이 한층 나아졌었다, 적어도 철문을 열자마자 바로 죄수와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최소 한 명 이상의 죄수가 있을 거라는 사실에 적어도 감정적으로는 안도감이 들고 말았다. 마치 한 아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금액과, 그와 동등한 금액으로 여덟 명의 아이를 구제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상반된 반응을 기록한 연구 결과처럼….
사고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해리의 패트로누스가 물결쳤다.
좌측으로 휘어지는 복도에 다다르자, 해리는 그들이 삼각형의 구조물에서 모서리에 다다랐다는 것을 눈치챘다. 여김없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래로 향하는 철계단. 그들의 하강은 계속되었다.
단순한 살인죄만으로는 결코 감옥의 최하층에 투옥되지 않는다. 밑바닥에는 또 밑바닥이 있는 법이고, 형벌도 그 이상의 형벌이 존재한다. 아무리 나락 속으로 추락한들, 영국의 마법부는 상상을 초월할정도로 악랄하게 그 죄를 이자까지 덧붙여서 심판을 내릴 방법이 존재했다.
그러나 벨라트릭스 블랙은 볼드모트 경을 제외하고 가장 거대한 공포를 전역에 퍼뜨렸던 죽음을 먹는 자였다. 주인에게 온 몸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아름답고도 잔인한 마녀. 그게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어떤 의미로는 주인님을 감탄시키려는 듯 ‘그 사람’보다 더 가학적이고 악독한 인세의 괴물이라고 전해진다…
…세상은 그녀를 그렇게 알았고, 그렇게 믿었다.
그 전에, 퀴렐 교수는 해리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둠의 마왕의 가장 충실하고 끔찍한 심복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 슬리데린에는 내성적이고, 무해한 소녀가 한 명 있었다. 그 뒤 그녀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이미지에 따라 대폭 와전되어 대중들에게 이야기로 전해졌다고 한다 (여러 연구 결과로 인해 해리는 이러한 현상에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녀가 아직 학생이었을 적, 호그와트에서 가장 뛰어난 마녀로 이름을 떨치던 그녀는 매우 온화한 성격을 지녔었다 (퀴렐 교수의 말에 따르면). 몇 안되는 그녀의 학창 시절 친구들은 그녀가 죽음을 먹는 자에 가담했을 때 경악을 했고, 그 슬픈 듯 울적한 미소 뒤에 그토록 많은 어둠이 내제되어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넘어 대경했다고 한다.
그것이 한 때 벨라트릭스의 모습이었다. 한 세대에서 가장 촉망받는 마녀였으나, 그녀는 어둠의 마왕에 의해 납치되어 비틀리고 망가져, 산산조각나고 재구성되어, 임페리우스는 따위로 취급할 수 있는 강력한 어둠의 마법으로 인해 그에게 강제 귀속을 당했다.
10년. 벨라트릭스가 어둠의 마왕을 위해 종사한 세월이었고, 그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고문을 해온 시간이었다.
그런 어둠의 마왕이 마침내 무너져내렸다.
그럼에도 벨라트릭스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벨라트릭스 안에는 무언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계속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혹시 정신계 전문 치유마법사라면 그 무언가를 바깥으로 끄집어낼 수 있을 수도 있다. 허나 없을수도 있다. 퀴렐 교수가 알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됐든, 적어도…
…적어도 아즈카반에서는 나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벹라트릭스 블랙은 아즈카반의 최하층에 수감되었다.
그녀의 옥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보게 될지 상상하기 싫어 해리는 애써 사고를 차단하려 노력했다. 처음에 벨라트릭스는 아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결여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면….
또 하나의 계단을 내려가고, 그만큼 죽음과 벨라트릭스와 가까워져갔다.
투명하게 감춰진 신발이 자아내는 발소리만이 유일하게 들려오는 공간.
가스등으로부터 퍼져가는 흐릿한 주황색 빛,
허공을 유영하는 희미한 녹색의 빛무리,
그리고 간헐적으로 맥동하듯이 흔들리는 은빛의 환한 인영.
얼마나 하강했을까, 이윽고 그들을 반긴 것은 또 하나의 계단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아닌, 하나의 거대한 강철문이었다. 녹색의 빛무리는 문의 코 앞까지 가더니 뚝, 하고 멈추었다.
아즈카반의 아가리 안으로 내려갈 동안 아무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자 해리의 심장은 서서히 안정과 평온을 되찾아갔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자 다시금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다. 최하층에 다다른 지금, 죽음의 그림자가 목 바로 밑까지 죄여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퀴렐 교수의 손에 따라 자물쇠가 해제되며, 작디 작은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심호흡을 한 해리는 지금까지 퀴렐 교수의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고 다시 한번 암기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그저 벨라트릭스 블랙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가상 인격을 연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패트로누스를 유지해야한다는 것….
녹색의 빛무리가 꺼지자 어둠이 밀려들어왔고, 1미터 가량 되어보이는 뱀이 투명화를 풀며 현현했다.
투명한 손으로 해리가 밀자 강철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자아내며 열렸다. 해리는 아주 작게 열린 틈새로 안쪽을 살펴보았다.
돌벽으로 이루어진 직선의 통로가 보였다. 해리의 패트로누스로부터 피어나는 빛을 제외하면 안쪽은 암흑 그 자체였다. 그 빛 만으로도 복도에 존재하는 총 여덟 개의 옥의 외창살이 어렴풋이 보였으나, 여전히 안쪽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때마침 순찰을 돌고 있는 인영이 없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 해리가 바람소리를 냈다.
뱀이 바닥을 날렵하게 미끄러지며 틈새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
[혼자 있어,] 뱀이 저 너머에서 말했다.
기다려, 그렇게 패트로누스에 명령을 내리자 인영은 옆으로 비켜서 마치 문 한 쪽을 지키는 듯이 우뚝 서고는 정지했다. 자신이 지나갈 수 있게끔 문을 열어재낀 해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해리가 가장 처음으로 확인한 옥 안에는 부패를 넘어 바짝 마른 미이라가 들어있었다.
회색으로 변한 주름진 가죽, 군데군데 벗겨져 얼룩덜룩한 뼈를 드러낸 메마른 피부, 텅 빈 안구 ─
해리는 눈을 감았다. 상관없어, 아직 투명하니까. 고작 눈 좀 감는다고 해서 배반하는 게 아니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변신술 책의 여섯번 째 페이지에 수록되어있는 정보였다. 아즈카반에 수감된 죄수는 형기를 다 마칠 때까지 절대로 나갈 수 없다. 형기가 끝나기 전에 죽더라도 그 시체는 여전히 투옥되어 복역한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면, 그 옥이 다시금 필요하게 될때까지 그 시체를 옥 안에 방치해둔다. 비워야 될 때가 오면, 시체는 디멘터의 소굴에 던져져 소각된다. 그러나 아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저렇게 방치되어 널부러져있는 시체가, 한때는 사람이었다는 게 ─
방 안을 메우던 빛이 일렁였다.
침착해, 해리가 스스로를 다잡았다. 계속되는 비관적인 생각으로 패트로누스가 꺼지면 퀴렐 교수에게 도움은커녕 민폐만 끼치는 셈이다. 이토록 많은 디멘터의 존재에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면, 패트로누스가 꺼지는 즉시 방어술 교수가 즉사해버릴 수도 있다. 침착해, 해리 제임스 포터-에반스-베레스, 침착하라고!
그렇게, 해리는 다시 눈을 떴다. 시간을 이렇게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번째 옥에는 앙상한 백골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세번째 옥 창살 안 쪽에서, 그는 마침내 벨라트릭스 블랙을 발견했다.
해리는 내면 속에서 무언가 소중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이 마치 메마른 풀쪼가리마냥 시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누구라도 그녀가 백골이 아니라는 것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 어둠 속에 남겨져 아무리 창백해지고 앙상해져도, 피부와 뼈의 질감은 근본적으로 다르니까. 필시 배식이 충분하지 않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먹어도 곧장 ‘죽음의 그림자’에게 흡수당했을 것이다. 눈동자는 안구에 파묻히다시피 들어갔고, 치아를 덮는 입술은 말라 비틀어져있었다. 아즈카반에 잡혀왔을 당시 입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 검은색의 옷은 심하게 탈색되어있었다. 마치 그것마저 디멘터가 빼앗아간 것 마냥. 제작 의도는 위압감을 주려고 했음이 분명하나, 이제 그 옷은 뼈와 가죽만 남은 몸에 걸쳐져 쭈글쭈글한 피부만을 노출할 뿐.
난 그녀를 구하려 온 거야, 구하려 온 거야, 구하려 온 거야. 절박한 심정으로 해리가 스스로를 향해 되뇌었다. 오클러먼시 방벽을 구축하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패트로누스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디멘터로부터 벨라트릭스를 보호하기 위해 ─
마음 속 깊게, 해리는 모든 연민과 동정심, 그리고 그녀를 어둠으로부터 구출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부여잡았다. 그러한 생각들이 미치자, 열린 문 너머로부터 터져나오는 은빛의 섬광이 한층 더 강렬해져갔다.
그리고 그의 자아 중 일부분이, 일련의 행동을 했다. 그것은 마치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습관과도 같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투명한채로 후드를 깊게 뒤집어 쓴 해리의 얼굴에, 냉엄한 표정이 내려앉았다.
“이런, 나의 귀여운 벨라,”
한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내가 그리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