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끼익,
“뭐야,”
차를 세운 제이미는 눈을 깜박였다.
“어쩐지 공장들이 좀 있더니만, 여기는 무슨 창고 지대야?”
“응.”
엔시나가 대답했다. “이제 내려서 가.” 그녀는 말을 이었으나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젓는 제이미. “이거 좀…” 그녀의 입이 삐뚤어짐과 함께, 손은 핸들 위에서 타닥타닥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정말 이런데 와도 되는 거야? 아까 방사능 어쩌구 한 것도 그렇고, 느낌이 좋지는 않은데.”
“여기서 몇 걸음이면 도착해, 제이미. 어차피 저 철조망 때문에 차를 몰고 갈 수도 없으니까.”
“으음,” 제이미는 썩 좋지 않은 얼굴을 하면서, 일단 옆에 놓인 총을 가지고–불안해서 그런지 저절로 손이 갔다–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역시 그걸 그대로 손에 들고 있자니 너무 아니어서, 그녀는 총머리를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고 발을 움직였다.
철조망은 생각보다 그렇게 촘촘하지는 않았다. 방사능 어쩌구 하면서 정작 철조망 관리는 제대로 하지도 않았다니. 하긴 이 창고 지대 뿐만 아니라 아예 이 지역 전체를 막아 버렸으니 상관없으려나. 제이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리번거렸다.
아까 엔시나의 '수백 년' 어쩌구 한 게 신경이 쓰여서 그런지, 철조망이 누렇게 녹이 슨 게 유난히 그녀의 눈에 띄였다.
때문에 그녀는 이 사이로 들어간다고 해도 기왕이면 넓은 틈을 찾아야지, 조금이라도 긁히면 좋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달까, 사실 그녀가 충분히 들어갈 만한 구멍들이 많이 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가장 크고 넓은 흠을 찾기 위해 계속 둘러봤다.
“뭔 철조망이라고 만든 게 이래가지고…”
작게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보던 제이미는 마침내 크게 흠집이 난 부분을 찾았고, 그래도 행여나 어디 닿기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그녀를 가만히 놔둔 채, 엔시나는 전혀 다른 말을 중얼거렸다.
“누가 일부러 크게 벌린 것도 같은데.”
하지만 곧 조용해진 그녀였고, 잠시 뒤 그 큰 구멍을 일부러 힘들여서 지난 제이미는 “이제 어디로 가라고?” 입을 열었다. 애초에 그녀가 한 눈에 창고 '지대' 라고 말했을 만큼, 정말 수십 채는 되어보이는 듯한 돔 지붕이 나란히 늘어섰기 때문에.
다만 사람의 흔적이 사라지고서 꽤나 오래된 탓인지, 그 회색의 철 지붕들도 하나같이 잔뜩 녹이 슬어 있는 상태였고, 심지어 그 중 몇몇은 구멍까지 나 있어, 왠지 저 안에 빗물이 잔뜩 고여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안 좋아.”
제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안 좋아.” 하지만 여기서 돌아가자니 엔시나가 또 뭐라고 징징댈 게 분명하니,어쨌든 주머니에 총도 있겠다–물론 천근만근 쇳덩이를 쑤셔넣은 것 같은 기분이지만–나이프도 있겠다, 제이미는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가?”
“B-3 창고였어.”
엔시나가 말했다. “저 네번째 줄로.” 그리고 제이미는 발을 옮겼다. 저 줄지어 늘어선 창고들 속으로.
아무리 봐도 이건 사람 자취가 끊긴 지 너무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로, 뭐랄까 너무 황량하다고 해야 하나?
녹슨 건물들이 늘어선 곳에 사람도 없어가지고, 도로도 다 갈라져 가면서 거기 하얗게 칠한 건 벗겨저서 흔적만 남아 있고, 길 중간중간에 놓여있는 통은 분명 한때는 파란색이었을 텐데 지금은 불에 타기라도 한 듯 완전한 갈–
“잠깐,”
주위 풍경을 감상(?)중이던 제이미에게 웬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으이!?” 깜짝 놀라서 몸서리를 쳤다. 바로 1초 전까지만 해도 왜 이렇게 사람이 없냐는 평을 하던 참인데,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자 곧바로 소스라치는 건 또 뭔가.
고개를 돌린 제이미는 아, 젠장, 딱 봐도 경찰인 듯한 남자 둘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봤다.
일났다. 속으로 투덜거리는 제이미. 어쩐지 더럽게 불길하더니만. 그리고 경찰들 중 한 명이 가까이 왔을 즈음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 제한 구역인 거 모르십니까?”
“아,” 제이미는 뭐라고 해야할 지 몰라 혀를 찼다. “그게,” 이러는 그녀에게 경찰은 아무런 자비심도 없이 신분증을 요구했고, 이에 아무 소리 못하고 신분증을 건넨 그녀는, 다른 경찰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에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망했다. 이제 어쩌지? 그녀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다음 순간 엔시나가 “생각해 보니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제이미는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꼴이 됐는지가 생각나서 즉시 그녀를 향한 분노가 치솟으려 했으나,
“아니, 일단 들어봐, 제이미. 방금 생각해 봤는데, 여기가 제한 구역이었긴 하지만 다 옛날 얘기였다고. 애초에 내가 이곳이 방사능으로 의심받던 게 다 예전 일이라고 말한 거 생각나?”
“응?”
순간 퍼뜩 고개를 든 제이미. 뭐야 그럼, 제이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두 경찰을 다시 보았다.
과연, 그녀가 혹시 하고 둘의 옷을 다시 본 순간, 분명 경찰 옷이 맞기는 한데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뭔가 좀 아니었다.
하지만 도대체 뭐가 영 아닌지를 모르고 있던 제이미는, 곧 옷만 경찰일 뿐 어째 그거 외엔 뭔가 소지한 것도 없고, 무엇보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 이건 엔시나의 생각이 전해져온 것도 같지만, 애초에 여기가 제한 구역이라고 말을 하면서, 거기 경찰이 딸랑 두 명밖에 없다는 게 말이 돼? 하지만 제이미는 그래도 아직은 모르는 일이니 먼저 말을 꺼내봤다.
“이제 신분증 좀 주실 수 있나요?”
“아니,” 그것을 압수한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하지만 뭔 놈의 신분증을 이렇게 오래 볼 리가 없으니, 결국 이게 제이미에게 확신을 주었다. “사기범인 것 같아.” 엔시나가 한 마디 거들었고, 이어서 그녀가 무언가를 하는 사이, 제이미는 이 둘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그래도 성인 남자 둘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은지라, 어떻게든 저걸 다시 뺏고서 도망칠 방법은 없을까 싶은데, 그 순간 갑자기 무언가가 그녀도 모르게 일어나고 말았다.
휙,
“응?”
퍽! 퍼퍽!
“우욱!”
갑자기 두 가짜 경찰이 무거운 소리를 토해내며 하복부를 감싸쥐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제이미는 다시 한 번 놀라고, 대체 이 둘이 왜 이러는지 몰라서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걸 버리고 다시 정신을 차린 순간, “으왓!?” 그대로 기겁하고 말았다.
다름아닌 제이미 자신이 저 둘을 무릎으로 차 버린 것이기 때문에. 도대체 뭐가 뭔지도 모르기 전에, 아니 거의 반사신경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저지른 거라 본인도 어안이 벙벙한 상항에서, “으으,” 한 명이 낮게 신음하더니 곧,
“이년이 어딜…”
낮은 소리로 으르렁대는 것에, 제이미는 “어, 미, 미안!” 말로는 사과를 하며 몸으로는 한 번 더 다리를 휘둘러, 저 둘의 배를 매섭게 걷어참과 동시에 신분증을 날쌔게 되찾고는, “뛰어!” 엔시나의 말이 들리자마자 냉큼 달리기 시작했다.
“후얏,”
다시 한 번 펄쩍 뛰어오른 아린은 공중에서 옆의 나무를 박차고 반대편 나무로, 그리고 다시 그 나무도 발로 탁 차내며 다시 반대편으로 튀어올랐다. “야?”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바닥에 착지해야만 했고, 이어서 앞에 있는 덩굴이 너무도 촘촘한 탓에,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입을 열었다.
“망했으얘!”
아린이 발을 구르면서 “이제 어찌야!?”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자마자 리니아가 그녀에게 “어서 돌아가!” 사납게 다그쳤다.
하지만 아린이 뒤를 돌아보자, 이미 그녀가 지나온 길은 새까만 것들이 거의 다 지나오는 상황이었고, 이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떤 아린은, “안되겠는디얘.” 얼어붙은 얼굴로 혼령에게 말했다. 그러자 리니아도 아린의 눈에 들어온 검은 물체들을 본 뒤, “어쩔 수 없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싸워야겠어. 어떻게든.”
“으야야!?”
그 자리에서 방방 뛰는 아린이었다. “미쳤으야!?” 경악하는 목소리로, 그러니까 이젠 입 밖으로 소리를 내는 아린. (적어도 그녀 입장에서는)정말 어이가 없는 조언에 잔뜩 흥분한 그녀였기에, 싸울 준비를 하기는커녕 혼자 발만 굴렀다.
“저거 최소한 열 마리는 되잖얘! 어떻게 싸우야?”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리니아도 화를 냈다. “그저 가만히 서서 죽으려고?” 이에 뭐라고 할 수 없는 아린이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벌떼처럼 달려오는 것들을 혼자서 모두 당해낼 수가 없다는 사실 또한 너무나 확실했다.
어쩌지? 어쩌지야? 아린은 계속 발만 동동 구르면서, 어느새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뭐 좋은 수라도 없나 생각하다가,
“야아?”
이런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곧 들어오자 그대로 고개를 내렸다. “뭐지얘?” 사방이 어두컴컴한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아래에 웬 커다란 구덩이 하나가 파여있는 듯한 느낌. 그걸 보면서 아린은 눈을 동그랗게 깜박였다.
“리냐, 리냐, 저거 뭐쟈? 혹시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거 아니얘?”
“무슨 소리야!”
리니아가 정신 차리라는 듯, 아린의 머리를 한 번 쥐어박았다. “우얏,” 보이지 않는 손이 머리를 콕 하는 것에, 잠시 머리를 문지르며 투덜대는 아린에게 리니아는 “도대체 누가,” 그녀에게 성이 나서 말했다.
“하고많은 곳들 중 여기에 땅굴을 파겠냐고. 만일 저기 들어가면 네 스스로 독 안에 들어가는 꼴이야.”
“하지만야,”
다시 입을 다물고 속으로만 말을 하면서, 아린이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어느새 저 새까만 사령들과의 거리가 반이나 좁혀졌고, 이에 아린은 점점 마음이 급해지는지, 잠시 얌전해졌던 두 발이 또다시 밑의 흙바닥을 다지기라도 할 듯 콩콩 뛰었다.
“아까 말했지만 어차피 저거 안되잖야! 어차피 이거도 안되고 저거도 안되얘!”
“그렇다고 해도…”
리니아 또한 아린의 눈동자에 비치는, 비록 하나하나는 작은 덩어리들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뭉치니, 마치 죽음을 두른 거대한 날짐승처럼 매서운 속도로 숲길을 가로질러 오는 모양새에 모든 신경이 고정되어 있었다. 아린은 그녀 또한 점점 돌처럼 굳어가고 있음을 알고, “어쩌야?” 저쪽의 사령들과 아래의 구덩이를 번갈아보며 재촉했다.
한편 둘이 이러는 사이 저 검은색의 작은, 그러나 치명적인 파도는 어느새 불과 몇 미터만을 남겨둔 상태였고, 이어서 다음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리저리 튀어다니던 아린이 단숨에 지나갈 만한 거리 정도가 남자, 결국 리니아는
“아, 정말!”
어느새 아린처럼 방방 뛰면서 소리쳤다. “얼른 뛰어!” 그리고 이 말이 머릿속을 다 스쳐 가기도 전에,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아린은 “야얏!” 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뛰어올라, 마침내 사령들이 그녀에게 닿기 바로 직전, 생전 본 적도 없는 탓에 도대체 뭔지도 모르는, 아주 어두컴컴하고 기이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구덩이 속으로 쏙 들어갔다.
타닥,
“후아,”
발을 탁 멈추는 것과 함께 머리 끝까지 차오르려던 숨을 한 번에 내뱉은 제이미는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숨을 고르며 “따돌렸나?”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제이미는 곧바로 더 확실하게 알 방법이 있음을 떠올리고, 엔시나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아니,” 혼령은 고개를 저었다.
“난 일반인은 파악할 수 없어. 하지만 내 지금까지의 경험상으로는, 아마 우리를 놓쳤을 거야.”
“그,” 제이미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몰라, “그럼 좋고.” 쓴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이어서 그녀는 뒤의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하아,” 가슴을 쓸어내림과 함께 눈을 잠시 감았다.
도대체 이게 뭔 난리야.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그녀는 왠지 주머니의 권총이 걸리적거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그렇게 잠시동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다하다 곧 눈을 떴다. “응?” 그리고 그 눈을 깜박이는 제이미.
“B-13?”
지금 마주하고 있는 한 창고에 크게 써진 글자를 읽은 제이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흐응,” 어느새 그녀는 B-3 창고에 기댄 채 늘어져 있던 것이다. 제이미는 휴 하고 다시 숨을 내뱉은 뒤, 조금 기력이 돌아온 몸을 일으켜 문 앞으로 걸어갔고, 곧 커다란 문에 두 손을 짚고 낑낑거리다가, 곤 온 몸을 대고 힘껏 밀었다.
드르르르르르륵–
“흐익–”
생각보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때문에, 그녀는 들어갈 만한 틈이 나는 즉시 얼른 그 사이로 들어가서는 문을 다시 닫았다.
“설마 듣고서 오진 않겠지?”
혹시나 듣고 온다고 해도 문을 다시 닫았으니 정확히 어느 창고인지는 모를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잡은 제이미가 뒤를 돌아봤을 때, 그녀는 왠지 모를 익숙함에 “어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 왠지 한번쯤 와본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이 들 거야.”
고개를 끄덕인 엔시나는 다음 순간 제이미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었고–즉 어떤 이미지를 전해주었고–제이미는 그녀가 보여준 것,
바로 자신이 그 이상한 꿈에서 처음에 봤던 공장의 모습에 “아!” 곧 자기가 그때 봤던 걸 기억해냈다.
확실히, 그때 나르사라는 여자의 눈으로 봤던 것들이 지금 제이미의 눈앞에 하나도 빠짐없이 있었다. 수많은 나무 상자들과 몇 대의 크레인, 철판과 파이프들, 그리고 이 모든 물건들 중 몇몇을 덮은 천 조각까지. 전부 그대로…
“잠깐,” 제이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부 그대로라는 말은, 그들이 여기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은 거야?
“그런 셈이지.”
엔시나가 대답했다.
“이 지역이 오염구역으로 의심받은 게 그때 우리가 오고서 바로 다음 해였으니까.”
“뭐?”
이때 제이미는 그 방사능 어쩌구 한 게 아주 오래 전 일이라는 말과, 아까 수백 년 만이라고 한 게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그 이후로 수백 년이나 지났다는 건, 지금 제이미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사람들은–
“그래. 죽었어.”
이렇게 대답하는 엔시나에게서 잠시, 왠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함과 쓸쓸함이 느껴졌다.
“당시의 동반자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말야. 하지만 이후 혼령들은 계속 이 세계에 남아서 살았지. 나르사의 혼령이었던 나와 슨우의 혼령이었던 '다일', 그리고 키리의 혼령인 '아젤리아' 이렇게 셋이서.”
“이름들 참 특이하네.”
엔시나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제이미가 말했다. 그러다가 순간 바깥에서 어느 목소리가 들리자 제이미는 입을 딱 다물고, 무슨 소리가 났는지 귀를 문에 가까이 했다. “아오, 진짜,” 아까 따돌린 두 가짜 경찰의 목소리였다.
꿀꺽, 제이미는 혹시 몰라서 저쪽 나무 박스가 좀 쌓여있는 쪽으로 가서는, 그 사이에 들어가 조용히 숨을 죽였다.
“지금도 아프네. 어떻게 된 년이 그렇게 세게 때려? 겉보기만 봐선 싸움이 뭔지도 모를 것 같았는데.”
한 명이 투덜거리자 다른 한 명이 “그러게.”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야, 그런데 진짜 간만에 제대로 아녔냐? 돈도 많아 보이고, 얼굴도 지금까지중에 가장… 하, 정말 그년 잡히기만 하면 내가–”
그리고 이어지는 그 남자의 말은 듣는 제이미가 얼굴 표정부터 바로 일그러질 정도로 정말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었다.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지금 그녀에 대해 저렇게 물건 취급하며 함부로 지껄이는 것들을 당장 쥐어팼을 텐데. 이렇게 속을 꾹꾹 억누르며 참다가 곧, 제이미는 자기가 정말로 저 둘을 패준 게 생각이 나서, 고개를 살짝 들었다.
워낙에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 잊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다리가 그렇게 나갔지?
분명 신분증 다시 뺏고 도망칠 생각은 있기야 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다리가 먼저 나갔다고 할까, 그것도 거의 반사적으로 말이다. “아, 그건,” 엔시나는 이런 제이미의 생각을 보고서, 자기도 그 사이에 잊고 있던걸 설명했다.
“혼령들은 자신의 경험을 동반자에게 '적용'시킬 수 있어. 그게 자기 자신만의 것이든 이전의 동반자들과 함께 쌓은 것이든 말야. 너가 한 건 내가 약간… 그렇게 공격을 하는 걸 잠깐 너에게 적용시킨 거야. 더불어 신체적인 감각도 같이.”
“무, 뭐어?”
찡그리고 있던 얼굴이 이상하게 뒤틀리는 제이미였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가 다음 순간, “응?”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얼른 입을 막았으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젠장,” 작은 소리로 투덜댄 그녀는 어떻게 할까,
뭐 주위에 쓸만한 거라도 없나 둘러보다가, 엔시나가 지금 그녀의 주머니에 얌전히 있는 총을 상기시켜 주자 그걸 잡았다. 그리고 잠시 뒤 문이 또다시 큰 소리를 내며 열리고, 계속 제이미에 대해 듣기 싫을 정도로 더러운 소리를 하면서 둘이 들어오자,
철컥,
“거기까지.”
둘이 이제 막 들어와서 미처 긴장을 하기도 전에, 제이미는 재빨리 안전장치를 풀음과 동시에 상자들 사이에서 걸어나와, 그걸 둘에게 겨누며 굉장히 짜증이 난 얼굴로 “그만 좀 지껄여.” 툭 내뱉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난 뒤에 그녀는,
“으응?”
분위기 다 잡던걸 갑자기 멈추고는, 그대로 자신의 손에 얌전히 들린 그 권총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어,” 그리고 얼어붙은 그녀.
총에 안전장치 같은게 있다는걸 그녀가 알기는 하던가? 그런데 방금은 그런게 있는걸 아는거고 뭐고,
아니 무언가를 안다고 말하는, 이른바 '인지'의 범위에서 벗어나, 그냥 평소에도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풀고, 지금 보니 총을 잡은 손도 그 손가락 하나하나가 아주 자연스럽게 총을 감싸고 있다니, 대체 뭐야 이거?
“저들을 공격했을 때와 같아.”
엔시나가 곧바로 설명해주는 것에 제이미는 귀를 기울였… 아니, 귀는 아니고 어쨌든 주의깊게 들었다.
“이미 말했지만, 내가 여기 처음 온 건 수백 년 전의 일이야.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을 동반자로 삼아왔고, 그러면서 여러 경험들을 많이 했어. 물론 그 중에는 이쪽 세계의 싸움에 관한 것들도 많이 있는 거고. 너가 저들을 찼을 때는 그 중 한 일부를 너에게 잠깐 적용시킨 거고, 지금은 총기류에 관한 걸–”
“앗!”
순간 제이미는 어느새 저 둘이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음을 알고, 무언가를 생각할 것도 없이 그대로,
타탕,
“악–!”
털썩. 두 번의 빠른 총성과 함께 두 가짜 경찰은 그 자리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적용시킨 거야.”
엔시나는 하던 말을 끝마쳤고, 그것이 마치 신호탄이라도 된 듯 제이미는 “히이–” 저 쓰러진 둘의 꼴을, 둘 다 정확히 무릎에 구멍이 나서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을 보며, 그 푸르고 강한 느낌의 눈이 점점 동공이 커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방아쇠를 당긴 손은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며, “세,” 목소리 또한 벌벌 떨고 있었다.
“세상에, 내, 내가,”
그리고 마치 세상의 끝을 보기라도 한 듯, 얼굴까지 파랗게 질려서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마구 젓는 그녀.
“내가 사람을 쐈어! 내가 사람을 쐈다고! 내가–”
“내가 쐈어.” 엔시나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편할 거야.”
“편하긴!!”
소리를 빽 지른 그녀는 계속해서 와들와들 떨며,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발 끝이 무언가에 닿자 “으와아!?” 자지러질 듯이 또다시 소리를 지르며 뒤를 돌아봤고, 이런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무, 뭐야 이거?”
사실 발에 무언가가 닿은 게 아니라, 발이 뒤로 빠질 뻔한 것이다. 뒤에는 웬 커다란 구멍이 하나 나 있었기에.
제이미는 안그래도 놀란 고양이처럼 눈이 커질 대로 커진 상태에서, 그 맨홀 구멍보다는 좀 더 크게 보이는 걸 빤히 내려다봤다.
뭐지? 멍하니 그걸 보면서, 동시에 왠지 모르게 그 안에서 마치 가스가 유출되듯 새어나오는 듯한 무언가를 느끼는 그녀였고, 하지만 너무나 희미하게만 느껴지는 탓에, 자기도 모르게 대체 뭐가 새어나오는지 알려고 허리를 숙여 구멍 밑을 보았으나, 어째서인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이에 제이미는 자기가 누구를 쐈다는 것도 금방 잊어버린 채 좀 더 들여다보려–
쿵–
“아악–”
“아으얏!!”
누가 봐도 머리와 머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창고 내에 크게 울리며, 제이미는 그만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분명 저 구멍에서 갑자기 뭐가 튀어나온 것까진 봤는데, 다음 순간 눈앞의 세상이 확 뒤집히는 탓에 뭐가 뭔지 아직은 몰랐다.
“아아앗, 아파…” 너무나 세게 부딪힌 탓에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며,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어쨌든 무언가에 한 대 맞은 것에 자신의 현재 상황이 바로 떠올랐는지, 부딪히는 순간 바닥에 떨어진 총을 다른 손으로 찾았다.
또 뭐야 정말. 눈을 감은 채 바닥을 뒤지다가 곧 손잡이가 닿자 얼른 그것을 잡고는, 곧 눈을 뜬 그녀였는데,
“으으, 어, 어어?”
웬걸, 근처에서 역시 머리를 문지르며 “으야야야야야…” 끙끙대는 건 또다른 가짜 경찰이 아닌, 웬 젊은 여자가 아닌가. 것도 제이미가 생전 처음 보는 옷, 아무래도 천으로 만든 듯한 무언가를 입고서, 머리엔 웬 꽃 한 송이가 달려 있는 별 이상한,
아니 이상하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쳐도, 어쨌든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의 여자가 “아파야, 아파야,” 두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뭐야, 저 애는?”
머리를 맞아서인지 제이미는 넋 나간 얼굴로 그 여자를 빤히 쳐다봤고, 한편 엔시나는 “흐음,” 이런 제이미만큼이나 놀란 듯, 꽤나 흥미로워하는 눈으로–눈이 있긴 있는걸까–아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애,” 곧 말하는 그녀.
“지금 저쪽에서 건너온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추가로 보내지 않기로 했을 텐데.”
“넌 또 뭔 소리야?”
여전히 머리를 감싸쥔 채, 제이미가 중얼거렸으나, 엔시나는 이어서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흠칫, 갑자기 딱 멈췄다. 제이미는 그녀가 어제처럼 무언가를 감지하고서 갑자기 경계심을 곤두세우는 것에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총을 제대로 잡고서 일어나, 일단 누가 또 없는지 주위를 확인해 보려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제이미!”
엔시나가 소리를 지르자 제이미는 고개를 돌렸다가, 갑자기 저 구멍 안에서 또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에 고개를 돌렸다. “뭣–” 그리고 다음 순간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경악하며, 또다시 자리에서 뒷걸음질을 하는 그녀.
웬 검은 것들, 색깔뿐만 아니라 뭐라고 할까, 그 느낌까지 굉장히 새까맣고 지저분한, 그리고 기분나쁜 것들이 하나둘씩, 저 여자가 튀어나왔던 구멍에서 줄을 지어 나오더니만, 잠시 허공에 멈춰서 서로 뭉치고 있었다.
“저,” 제이미는 자신의 그 어떤 감각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는, 그 불쾌하면서도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것들, 일정한 형체도 없이 마치 하수구 벌레마냥–하수구 벌레는 차라리 정해진 모양이라도 있었다–사방으로 꿈틀대는 것들,
도대체 뭔지는 몰라도 어쨌든 동물이나 곤충처럼 보이지는 않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일순간 엔시나가
“엎드려!”
또 소리지르는 것에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동시에 그 검은 것들은 그녀 쪽으로, 마치 솔개가 먹이 가로채듯 일시에 매서운 속도로 몰려왔고, 그게 머리 위로 지나가는 걸 느낀 제이미는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뭐가 뭔지도 아직 모른 채 “젠장,” 일단 성질부터 내며 일단 저걸 쏘려고 했으나, 다음 순간 이번엔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뭐야 저게!?”
저 검은 것들,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영 감을 잡을 수 없는 것들이, 꼭 스펀지에 스며드는 물을 연상시키듯, 저쪽에 쓰러진 두 남자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제이미는 더이상 놀랄 것도 없어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는데, 곧 그녀를 더 놀라게 할 일이 벌어졌다.
그 검은 것들이 전부 스며들어가고 나서, 갑자기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끙끙댔을 텐데?
“저게 대체 뭐냐고.”
제이미는 자리에 선 채로 고개만 저었다. “도대체…”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할 뿐, 그 이상 뭐라고 말을 못하는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