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언니얘!”
집 앞 마당에 고개를 빼꼼 내는 제이미를 아린이 마중나왔다. 아무리 갈 곳이 딱히 여기밖에 없다지만 정말 와도 되나 싶어 조심스럽게 걸어오는데, 이런 그녀에게 아린이 달려들어 덥석 안기자 제이미는 당황해서 “어, 어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신령님 보고 왔으야?”
“응.”
제이미는 암만봐도 어린애같은–올해 열아홉이라고 했던가? 혹시 이쪽 세계 사람들은 성장이 늦는다든가 하는 상상을 잠깐 해보는 그녀였다–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곧 아린이 놓아주자 뒤에서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이진을 바라보았다.
“신령님께서 뭐라고 하셨나요?”
“그,”
하지만 그 신령이라는 애, 아니 노인네, 아니 뭐든 간에, 막상 만났다고는 하지만 딱히 별 특별한 얘기도 하지 않았기에 정작 산을 내려오고 나니 뭔가 심드렁해진 제이미였다.
“내일 오라는데.”
“내일?”
갑자기 이진이 다일로 순식간에 바뀌면서 눈빛이며 표정도 변하자 제이미는 흠칫했다. 어렸을때부터 혼령과 같이 지내오면 저렇게 빨리 바꾸는 것도 가능한 걸까. “아니,” 다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일 오라 하셨다고? 그 외에 다른 건 없었어?”
“저, 전혀…요.”
아직 다른 혼령들과의 대화가 어색한 제이미였다. 다일은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다시 물러났고, 이진은 일단 들어가자고 하면서 먼저 마루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어어 하고 입만 연 채, 아무리 그래도 정말 들어가도 되는 거 맞나, 자기 자신이 어쨌든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아까 숲에서 혼자 걸어올 때부터 너무 심하게 박혀서인지 조금 내키지가 않기도 한 제이미를 아린이 잡아 끌고가듯 했다.
“어무얘!”
제이미가 마루 앞에서 신발을 벗는 사이 아린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를 냈다.
“언니 왔으얘! 정말 우리집에서 살아도 되는거 맞지야?”
“응?”
아까 숲에서 아린을 혼내던 남매의 어머니가 저쪽 방에서 고개를 내밀었고, 곧 “아,” 방에서 걸어나오며 제이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서오세요. 제이미라고 했나요?”
처음에 제이미를 무슨 납치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던 그 시선은 어디로 갔나 해서 제이미가 “네, 네에,” 얼떨떨하자 둘의 어머니는 그 이유를 알고서는 씁쓸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그녀가 말했다.
“애가 나가서 사고친 일은 많지만 며칠동안이나 사라진 일은 없었어서…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할게요.”
“아, 아녜요.”
하긴 애가 실종됐는데 제정신인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제이미는 그냥 웃어넘겼다. 한편 저 뒤에서 아린은 왠지 또 혼날 것 같다는 기운을 감지한 듯,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발소리 나지 않게 자기 방으로 슬슬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그리고 딸아이의 짐작이 맞았는지 어머니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도대체 저도 애 아빠도 덜렁대는 성격은 아닌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도대체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어가지고…”
결국 방으로 쏙 들어간 아린. 이를 흘끗 본 제이미는 맞장구치듯 웃어주었고, 곧 애 엄마는 상을 내오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미는 그렇게 가족들이 각자 안으로 들어간 사이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았다. 나무로 된 집이지만 그럼에도 마치 기계로 깎기라도 한 듯 매끄러운 바닥과 벽–혹시 저걸 깎은 것도 그 영이란걸 사용한 걸까?–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각 방으로 통하는 문은 역시 나무문이거나 나무 테두리에 얇은 종이 몇 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어째 밤인데도 집안이 밝다 싶어 고개를 들자 천장에 영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면서 영롱한 빛을 내고 있는게 보였다.
제이미가 올려다보자 그 덩어리들은 처음 보는 손님에 자기들끼리 수군덕거리기라도 하는지 제각기 빛의 세기가 약해졌다 강해졌다 하기를 반복하면서 그로 인한 기운의 변화가 제이미에게도 느껴지더니, 곧 저 중 하나가 천장에서 또르르 내려와 제이미의 눈앞에서 멈췄다. “아,” 아까 제이미가 산을 올라갈 때 안고 가던 그것이었다.
“너 아까는 왜 도망갔어?”
제이미가 묻자 그 조그마한(다른 덩어리들에 비해) 것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뭔지 몰라도 제자리에서 몇 번 빛을 내더니 그녀의 주위를 빙 돌았다. 그리고는 다시 천장에 올라가는 것을 제이미가 조용히 쳐다볼 때, 저쪽에서 아린과 이진의 어머니가 나무로 된 상을 내왔다.
“드시고 부족하면 더 말해요. 더 갖다 드릴테니까.”
“아, 감사합니다.”
상에 올려진 밥–제이미는 가끔 먹어보긴 했기에 어쨌든 저게 밥이라는걸 알았다–과 몇몇 반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갑자기 배가 푹 꺼진 제이미는 얼른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음식 앞에선 국경이 무의미하다고, 배고픔에 허겁지겁 먹어대는 그녀를 보며 애들 엄마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죄송해요.”
억지로 입안에 쑤셔넣다시피 한 음식들이 목을 타고 넘어가서야 이성이 돌아온 제이미는 얼른 말했다.
“거의 먹지를 못했어서… 그나저나 이름이?”
”'아레인'이예요.”
남매의 어머니가 말했다.
“애들 아빠가 사정상 나가서 사는 이후로 이렇게 살고 있어요. 이진이 많이 도와줘서 힘들거나 하진 않지만요. 아린도 그동안 많이 혼나다보니 집안에서는 사고치진 않고요.”
“아아, 네에…”
왠지 이 아줌마의 고생이 훤히 보이는 제이미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레인은 차를 한 모금 마셨고, 곧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계속 말했다.
“아마 지금은 이쪽이 처음이고 하니 많이 어색하실 거예요. 다일이 처음 여기로 돌아왔을 때도 그 동반자가 많이 힘들어했다고 하니까…”
그리고 다시 한 모금 마시는 것을 보며 제이미도 입안에 이것저것 쑤셔넣다 말고 이제보니 자신 쪽에도 놓인 그 찻잔을 쳐다봤다. 곧 찻잔을 들어올리는 제이미. 그녀가 생에 맡아본 적이 없는, 그리고 아마도 저쪽 세계에서는 절대 맡아볼 수 없었을 향이 그녀의 코를 타고 들어와 온몸으로 퍼졌다. “응?” 망고와 계피를 섞어 그 위에 박하를 뿌린 듯, 새콤하고 진하면서도 시원한 자극에 단지 그 향만으로도 피로가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냄새를 맡다가 그것을 한 모금 입에 넣어보자 단지 후각으로 느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깊이가 입을 타고 전해져왔고, 곧 그것을 삼킨 그녀는 이런 자신을 지켜보며 미소짓는(그리고 재밌어하는) 아레인을 마주보았다.
“소은(작은 은)이라 부르는 과일이예요. 그냥 껍질을 까서 먹거나 이렇게 껍질을 끓인 거에 즙을 섞어 마시죠. 마음에 드시나요?”
“네에…”
제이미는 작은 은이라는 그 과일차를 내려다보았다. “신기해요.” 한 모금만으로도 입안을 넘어 머리까지 싹 청소된 듯한 느낌에 엔시나도 정말 오랜만이라며, 실은 그동안 이게 그리웠다며 눈을 지그시 감고 맛과 향을 즐겼다.
“아, 그래서,”
다시 입을 여는 아레인.
“아마 신령님께서 나중에 식을 올려주실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가씨께서 직접 지낼 곳을 선택하시겠지만, 일단 저희 집에서 지내시면 될 거예요. 물론 서릿눈을 선택하시고 여기서 계속 지내도 좋고요.”
“네, 네에?”
식이 뭐? 서릿눈이 뭐? 처음 듣는 소리에 소은 향으로 차분해졌던 얼굴 모양새가 흐트러졌다. 그녀가 다시 한 모금 마시는 사이 아레인은 이런 제이미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엔시나에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쪽 세계에서 인간이 사는 건 이 마을이 전부예요. 그리고 여기 사람들 중에도 서로 일파가 갈라져 있고요. 물론 그렇게 나눠졌다고 서로 마찰이 있거나 그런 일은 거의 없어요. 애초에 숫자부터 적은데 싸워서 뭐하나요. 그리고 누구든 어른이 된 후에는 언제든지 소속을 옮길 수 있어요. 사람이든 혼령이든.”
“네에.”
처음 듣든 늑녀에게 천천히 설명해주자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확인한 아레인이 계속하려는 찰나 어느새 방에서 나온–사실 아까부터 문을 조금 열고는 그 틈으로 계속 지켜보고 있었지만–아린이 뒤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우리 가족은 아빠 빼고 '서릿눈'에 있으야. 아빠는 저쪽 '아란'이고얘, 신관님이 있는 쪽이 '청화', 또 '초생달'까지 이렇게 넷이얘.”
“으응.”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제이미. 아린은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엄마가 마시던 소은차를 탁 집어들고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그리고 시원하게 등짝을 맞은 그녀는 “으얏!” 제이미가 숨죽여 웃는 사이 후다닥 방으로 도망갔고, 역시 문을 아주 조금 열어놓고는 “네,” 아레인이 다시 말하는걸 지켜보았다.
“어쨌든 그래요.”
“네… 뭔지 알겠어요.”
애들 엄마의 설명과 함께 엔시나가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전해주기도 한 것이다. 사실 이 혼령은, 그러니까 엔시나와 나르사는 인간계로 건너가기 전에도 서릿눈 소속이었던 것이다. 슨우와 다일 또한 그랬으며, 키리와 아젤리아의 경우 아란 쪽이었다. 하지만 그런거 상관없이 잘만 지냈던 모습을 기억해낸 제이미는 대충 그런 거구나 싶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잠깐,”
한편 얘기를 마친 아레인이 그 사이에 거의 깨끗하게 빈 상을 치우려는 찰나, 제이미가 입을 열었다. “네?” 애들 엄마가 눈을 깜박이자 조심스럽게 묻는 제이미. “저어,” 이 말을 굳이 꺼내야되나 싶기도 하지만, 일단 예의라는 게 있고 이쪽 세계 사람들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였기에 어쨌든 목소리를 내는 그녀였다.
“그, 정말 여기서 지내도 되는 건가요? 아무리 갈 곳 없다지만 괜히 민폐나 끼치는건 또 아닌지…”
“네에?”
아레인은 눈을 깜박이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얼떨떨해진 제이미. 그리고 이런 제이미가 정말 재밌으면서도 마음에 든 듯,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였다.
“애초에 다 함께 사는 곳인걸요, 여기는. 오히려 전 개인적으로는 계속 여기서 지내주셨으면 하네요. 아린도 언니 생겼다고 좋아하던데. 이진도 좀 고지식하긴 하지만 어쨌든 애가 착해서 곧 편해질거예요.”
“네, 네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도 이렇게 서슴없이 받아주는 세상인 걸까. 제이미는 왠지 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며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얘,” 이런 그녀에게 문틈으로 손짓하는 아린이 보였고, 이를 보고 어색한 웃음 대신 피식, 미소를 지은 그녀는 아린의 방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