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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스르르 열림과 동시에 눈이 반쯤 감긴 여자가 걸어 나왔다. 입을 쩝쩝 다시면서 이제 잠에서 깬 눈을 끔벅이는 스물일곱 아가씨의 이름은 제이미 앨리슨.
“하암… 지금 아침 맞나?”
다만 지금으로부터 불과 며칠 전–말이 며칠 전이지 굉장히 멀게 느껴지는 시간이지만–있었던 일 때문에 앨리슨이라는 성은 스스로 잊어버렸고, 덤으로 길다랗던 머리카락도 어깨에 닿을 정도로만 잘라 버렸다. 평소에 자신과 같은 인간들과 지내다가 웬 엔시나라는 혼령 기집애가 난입해서 잡아끄는 바람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지금은 혼령계에 어떻게 정착해서 나름 적응을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뭐, 그 노력이 헛수고는 아니어서 어떻게 적응이 잘 되고 있긴 하지만,
“아침 맞지?”
아직 자기가 태어난 세계에서 살 때의 습관 몇 가지를 버리지 못해 문제였다. 평소에 애들 가르치는 게 일이라 그 애들보다 더 빨리 일어나다 보니, 지금 (제대로 된 시계조차 없는 이 세계에서) 비슷한 시기에 일어나면 오직 그녀 혼자뿐이고, 새로 가족이 된 이들은 다들 자고 있는 것이다.
“그냥 더 잘까.”
심지어 엔시나도 자고 있으니–전부터 느꼈지만 혼령의 수면은 인간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듯 했다–같이 얘기할 사람은 없고, 마을은 그리 넓지도 않은지라 대부분 구경했을뿐더러 이른 아침이라 나가기는 귀찮고, 밥을 먹자니 이쪽 세계에는 기계도 뭣도 없어서 뭘 어떻게 해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게슴츠레한 눈으로 지금 자신이 아침부터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제이미. 평소에 활발하던 아린도 지금은 자고 있는데, 혹시 지금 깨우면 같이 놀 수 있을–
툭.
“으왓–”
난데없이 발에 뭔가가 걸리자 그만 앞으로 콰당 넘어진 제이미. “아으으,” 아침부터 웬 난리야 하는 얼굴로 일어선 그녀는, 아직 발에 걸린 장애물이 순간 들썩였음을 알고 고개를 돌렸다. 사람? 누가 거실 마루에 누워 자는 걸까. 제이미는 엎어진 채 몸을 돌려 얼굴을 보는데, 처음 보는 남자애가 있는 게 아닌가. 딱 봐도 이진은 아니고, 조금 왜소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은 청년이 거실 한복판에 누워 자고 있었다.
“얜 누구래?”
제이미가 눈을 깜박이고는 아무 소리도 없이 새근새근 자는 그 아이를 툭 건드려 보았다. “으응,” 소년은 불편한 듯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등을 반대로 돌렸다. 제이미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분명 여기 사는 애는 아닐텐데. 얼굴을 딱 봐도 아레인이나 아린, 이진 셋 중 누구와도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곧 자리에서 일어선 제이미는 발로 툭툭 소년의 등을 건드려 봤고, 이에 다시 움찔거린 소년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더니, 곧 눈을 뜨면서 뒤돌아봤다. “아?” 웬 드센 여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를 인식한 다음 순간,
“으, 으와아!!”
“아!?”
갑자기 소년이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면서 내빼자 제이미도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버둥거리면서 줄행랑을 치다 벽에 등이 닿은 소년은 생쥐처럼 벌벌 떨면서 제이미를 쳐다봤고, 둘이 큰 소리를 내는 탓에 깬 아린이 “야?” 제이미의 뒤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거실에 벌어진 상황을 본 순간 “으야야!” 그녀도 소리를 지르며 얼른 제이미를 붙잡았다.
“안돼 언니얘! 야 냅두얘!”
“그, 잠깐,”
제이미는 뜬금없는 말에 당황하여 아린을 쳐다보고는 이어서 겁에 질린 소년을 쳐다보고, 다시 아린을 보기를 반복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자, 잘먹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천천히 밥을 손으로 먹으려다가, 아린이 수저를 쥐어주자 그것을 딸깍거리며 신기해하는 솔. 그러다 곧 천천히 밥과 반찬을 조금씩 집어먹기 시작한 그를 보며 아린은 곧 자신도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산에 있었다고?”
“네에.”
밥상만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정말로 생전 처음 수저를 잡는지 밥 먹는게 꽤나 서툴렀다. 아린이 이를 보고는 그의 손을 탁 잡아서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주며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한편 저쪽 방에서는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뒤 밥을 미리 먹은 이진이 걸어 나왔다.
“그럼 갔다올게요, 엄마.”
방에서 그렇게 난리를 친 것 치고는 꽤나 가볍게 짐을 든 그를 아레인은 한 번 꼭 안아주었다. 이진이 “아, 정말,” 쑥스럽게 웃으며 어머니의 등을 토닥여주자 아레인은 그를 놔주고 격려해줬다.
“생각해 보면 진짜 우리 아들 다 컸네. 혼자 갔다온다 그러고. 빼먹은 거 없지?”
“다 챙겼어요.”
웃으면서 대답한 이진의 어깨를 꼭 잡아주고 놓은 아레인을 두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이진은 밥상 앞에 앉은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나중에 봐.” 이에 아린이 벌떡 일어나서는 오라부이 등에 한 번 매달렸고, 제이미도 웃으며 인사한 뒤 잠시 엔시나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조심해서 갔다와.”
이에 이진은 다일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곧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러다가 마당을 나서기 전, 웬 영 덩어리가 느긋하게 날아오는 것을 흘끗 쳐다본 이진은 어깨를 으쓱한 뒤 곧 나갔고, 과연 그 때문에 온 게 아닌 그 덩어리는 밥상 앞에 멈춰서 란의… 아니, 마르한의 목소리를 냈다.
“제이미, 엔시나, 신령님께서 부르십니다. 식사중이시면 먼저 끝내고 천천히 오세요. 그리고 어제 산에서 데려왔다는 그 소년분도 같이 와주시고요.”
“야?”
아린이 눈을 끔벅였다.
“언제 알았으야?”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애를 데려왔는데 보고를 안 할 수가 없잖니.”
아레인이 대답하자 아린은 엄마를 잠시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제이미는 아린이 납득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싶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전에 여기서 사람 사는 게 이 마을밖에 없다고 한 거 정말인가요?”
“네, 적어도 인간은 여기밖엔 없어요.”
그 대답에 제이미는 놀라서 솔을 쳐다봤다. 애초에 보랏빛 눈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볼 뿐더러–물론 이쪽 세계의 인간들도 저쪽 세계 같으라는 법은 없지만–엔시나가 저 아이에게선 혼령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 대체 어디서 온 애라는 걸까? “잘먹었습니다.” 곧 밥을 다 먹은 제이미는 먼저 일어났고, 그 사이에 조금 나아졌는지 거의 다 먹은 솔을 기다리며 “흠,” 조용히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분이 더 지나 솔 또한 밥을 다 먹은 뒤 아레인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고, 이에 아레인은 미소지으면서도 약간 뭔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한 눈으로 소년에게 답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가, 갈게요.”
마당에 나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솔과 함께 제이미는 집을 나섰고, 곧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아까 생각하던 걸 다시 떠올렸다. 저 애, 혹시나 저쪽 세계에서 보냈다든가 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그런 생각. 하지만 엔시나가 [아니.] 고개를 저었다.
[두 세계 사이를 건너는 건 오직 혼령과 그 동반자만이 할 수 있어. 물론 사령들까지 건너왔었지만 아린이 건너온 뒤에 그 틈을 타서 온 거였고. 좀더 자세히 말해주자면, 혼령계와 인간계는 단순히 근접한 게 아니라, 그 사이의 중간계라는 곳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어. 그곳은 영을 품지 않은 이들을 튕겨내는 성질이 있다고 신령님께서 말씀하셨거든. 그리고 지금까지 저 세계의 인간들은 그걸 피해갈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어. 적어도 아직까지는. 하지만 이제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알아냈을 가능성도 적고.]
그녀가 설명해주자 제이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지만 아레인이 인간은 오직 여기서만 산다고 말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럼 쟤는 뭘까 하는 얼굴로 옆에서 산길을 오르며 마을을 내려다보는, 그리고 신기해하는 소년을 쳐다봤다.
[나도 모르겠어. 신령님께서 알아내시겠지. 나도 이 세계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든 걸 듣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굉장히 이례적인 일임에는 틀림없어.]
어느새 산길은 거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제이미는 저기서 유와 란 혹은 마르한이 대화하는 게… 느껴졌다. 보인다기보다는. 그리고 과연 저쪽에서도 둘이 오는걸 알았는지 이번에는 신령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다시 봐도 그 기이한 기운을 품은 그녀를 보며 제이미는 역시 쟤는 익숙해지지가 않을 것 같다는 표정을 자기도 모르게 띄웠다. 한편 신령은 제이미보다는 갑자기 산에서 튀어나왔다는 그 소년을 바라보는데,
“음?”
순간, 솔의 얼굴을 바라본 유가 고개를 까딱 움직이더니 자세히 관찰하듯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제이미는 그녀의 기운이 살짝 오므라드는 것을 느꼈고, 이에 란이 옆에서
“무슨 일입니까?”
하고 걸어 나왔다. 그는 솔을 보고는 눈만 깜박일 뿐이었기에 제이미는 뭔가 싶어 유를 쳐다보는데, 신령은 곧 아무것도 아닌 듯 오므렸던 기운을 다시 평소처럼 흐르게 하면서 먼저 들어갔다.
“아니다. 어서 들어오거라.”
안으로 들어가는 신령을 지켜본 란은 제이미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는–그래도 조금은 나아졌네. 제이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따라서 들어갔고, 이어서 제이미와 솔이 신발을 벗고서 신관의 거처로 들어갔다.
같은 시각, 이진은 산을 내려와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보다 늦게 왔는지, 벌써 세 명이 거기 서서 그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이진은 오자마자 허리부터 숙였고, 이에 한 명이 먼저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아냐. 사실 우리가 너무 일찍 왔어. 저쪽으로 가는건 영 익숙하지 않아서.”
이진보다 약간 더 큰 키를 가지고, 약간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성은 '민'. 이진은 어렸을 때부터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였던 그에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아란 소속의 그는 이런 이진을 보며
“그런데 이진이 이제 정말 어른이구나. 집회에 갈 생각도 하고.”
부드럽게 말을 하고는 이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 참…”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씁쓸함도 담겨있었다. 한편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이진을 훑어보던 여자는 이런 민의 감상적인 소리가 살짝 거슬렸는지 손을 내저었다.
“일찍 오지도 늦지도 않았어요. 어쨌든 다 왔으니 어서 가죠.”
이진은 고개를 돌려 청화 소속의 '사미'를 바라봤다.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삼십 대 중반 정도 된 그녀는 제법 방어적이고 깐깐한 태도로 아까부터 자신과 동행할 사람들을 번갈아보던 중이었고, 이진이 도착하자 그를 한 번 보고는 마치 이젠 이런 젊은 애도 간다고 나서는구나, 하는 표정, 다만 그 이상의 생각은 드러내지 않는 얼굴로 조용히 등을 돌려 숲의 입구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보통 얼마나 걸린다고 했죠?”
이진이 묻자 민이 “이틀쯤?” 대답했고, 곧 그도 뒤의 출입구를 확인하더니 사미에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웃으며 지적했다. 그리고는 그가
“열어주시게나.”
말하면서 두 손을 살짝 휘젓자, 곧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 마치 이 앞에 얼음으로 된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언가가 사라졌다. 곧 먼저 들어가는 사미를 따라 민도 들어갔고, 이진도 그 뒤를 따르려다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갈 거예요, 유랑.”
“음?”
그동안 혼자 딴생각을 하고 있던 그를 보며 이진은 고갯짓으로 먼저 가는 둘을 가리켰다. 초생달 소속의, 그래서인지 그 일파의 다른 이들처럼 약간 핏기없는 얼굴을 한 그는 평소에도 얼굴 표정 하나 잘 드러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의 혼령과 대화해봤다는 이도 거의 없었고.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천천히 걸어가며 “갑시다.” 짧게 대답하는 그를 따라 이진도 곧 숲 속으로 향했고, 나가면서 “닫으세요.” 한 마디에 다시 그 뒤에 무언가가 천천히 쌓이면서,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