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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8. 열병 (가제) (1)


 호화로운 마차가 렌에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이블린을 로렌의 수도라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이블린은 어디까지나 올랑 지방-황제의 가문이 일개 공작이던 시절부터 다스리던 공국의 주도(州都)에 불과했다. 물론 이블린에는 황실 가족도 살고, 주요 귀족들도 살고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푸른 피만을 위한 공간. 일을 하는 하인 하녀들을 제외하면 천한 붉은 피가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다.

렌은 이블린에서 마차로 반시간 남짓 떨어져 있었다. 출입 제한이 없어 평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렌은 점차 커졌다. 그 안에는 빈민굴도 있었고 법원도 있었고 병원도 있었으며 시장도 있었다.

앤 폰 레르헨펠트는 보석상이 모여 있는 거리에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신분을 밝히자마자 앤은 금세 안으로 안내받았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주인이 몸소 뛰어나와 손을 비볐다.

“어서 오십시오, 마드모아젤.”

아버지를 잃어 고아인 중부의 백작녀는 이블린 먹이사슬의 아득한 바닥이다. 그러나 보석상 주인에게는 높고도 높으신 분이었다. 대공녀에게나 붙이는 ‘아가씨’라는 경칭을 사용하여 아부할 정도로.

그는 손에 입 맞추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으나 앤은 허락하지 않았다. 주인은 아쉬워하는 기색으로 그녀에게 차를 대접했다.

앤은 차를 입에도 대지 않고 고개를 기울였다.

“보석은 다 준비되었나요?”

“물론입니다.”

젊은 남자 세 명이 상자들을 내어왔다. 각각은 작았지만 쌓아놓고 나니 한 무더기였다. 앤은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보며 주문서와 보석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앤의 주인은 요새 갑자기 치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꾸미지 않다가 꾸미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다. 남의 의견을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원체 생각이 분명해서 장신구나 옷가지를 고를 때 뚜렷한 기준이 서 있었다. 혼자 고른다. 입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주변에서 무어라 하든 벗고 다른 옷을 입는다.

그런데 한 달 전 처음으로 옷을 두고 다른 시녀들에게 물었다. 어느 게 낫지?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시녀들이 밝은 연두색 옷을 추천하자 앤은 움찔했다. 원래 아롈은 에메랄드나 페리도트 등의 연두색 보석을 질색하는 것은 물론 그 계열의 옷도 잘 걸치지 않았다. 녹색 눈이라고 해서 녹색 옷이나 보석을 사용하는 것은 멍청하다며.

그러나 아롈은 순순히 입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나비가 들어있는 조그마한 호박 귀걸이도 달고 에메랄드가 박힌 머리 장식도 했다.

그 옷이 세르에게 호평을 받은 뒤로 옷장엔 밝은 색의 옷이 점차 늘었다. 화려하고 알이 굵은 것이 주를 이루던 보석함에도 앙증맞은 것들이 하나 둘 자리를 차지하더니 기어이 이렇게 주문을 넣은 것이다.

그래, 이렇게 루비로 꽃 모양을 만든 작은 귀걸이 같은 것은 원래 아롈이 거들떠도 보지 않던 것들이다. 청옥을 통으로 깎아 만든 장미가 달려있는 부채 장식 또한.

앤은 마지막 상자를 열었다.

열어보자 앤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목걸이가 그대로 들어있었다. 이것만은 아롈이 주문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롈의 것이었다. 알이 크고, 여러 가지 색의 보석이 복잡하게 엉켜있는 화려한 목걸이는 그대로 과거에서 건너온 듯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 이것만 아롈의 보석함 어딘가에 넣어두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나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저, 따로 주문했던 것이 왜 합쳐져 계산되어있지요?"

"무슨 보석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이 사파이어 목걸이 말이에요. 서면으로 주문했는데요."

"아! 그 추가 주문 말씀이시군요. 혹여 번거로우실까 같이 합쳐 계산했습니다만."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그는 나긋하게 웃었다.

"따로 계산해드릴까요?"

"예, 그래요. 얼마지요?"

보석상 주인이 부른 액수는 어지간한 가문의 딸도 얼굴색이 변할 만했지만, 앤은 다이아몬드와 틈틈이 모아놓은 금화로 계산을 마쳤다. 앤의 주머니는 순식간에 비었지만 금세 목걸이로 가득 찼다.

 

마부를 재촉하여 이블린에 도착했다. 아롈은 응접실에 앉아 체스 말을 매만지고 있었다.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연회 준비의 일환으로 이블린 1층의 평면도를 펼쳐놓고 이름을 붙인 체스말을 이리 저리 움직이며 무언가를 잔뜩 쓰고 있었다. 다른 시녀들도 눈이 빠져라 셈을 하는 중이었다.

간단한 셈은 여성의 소양이기도 하다.

아롈은 고개를 들지 않고 물었다.

"이제 왔느냐."

앤은 무릎을 꿇었다.

"감히 기다리시게 하여 송구하옵니다."

아롈이 고개를 들었다. 밝은 노란색 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리 다오.”

요새 아롈은 인상이 달라졌다. 옷 때문인지, 아니면 귀에 달랑이는 작은 진주 때문인지, 날카로운 분위기가 많이 사라지고 여유가 생겼다.

예전 같으면 뭐라고 한 마디 투덜거림을 꼭 붙였을 터인데 별 말 않고 영수증을 받아드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시간이 없어 영수증을 고치지 못 했으니 영수증의 주문 목록에는 사파이어 목걸이가 쓰여 있을 터였다.

주문 목록이 너무 길어 다시 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터였고, 그랬다간 아롈이 오늘 석찬에 보석을 달고 나갈 수 없었다. 시간이 없다고 갈팡질팡 하는 앤에게 주인은 사파이어 목걸이에 대한 약식 영수증을 써서 내밀었다.

잘 해보려고 하는데, 어쩜 갈수록 죄책감이 드는지, 일이 꼬여만 가는지. 아롈이 주문한 기억이 없는 사파이어 목걸이에 대해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아롈은 영수증을 대충 훑고 앤에게 물었다.

"모두 직접 확인했느냐?"

"예, 전하."

"장사치들 속셈이란 무서운 법이다. 앞으로도 주의하도록 해라."

"예,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롈은 원본과 원본 대조필과 복사본에 순순히 서명을 했다. 아이처럼 또박또박 각진 글씨로 코시카의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

앤은 한숨을 삼켰다. 다른 시녀들이 다녀온 심부름이라면 이렇게 넘어가진 않았을 터다. 대놓고 의심한다 말하진 않아도 구경하고 싶으니 상자들을 전부 열어보라 말했겠지. 그러나 아롈은 유독 앤의 심부름에는 깐깐하게 굴지 않았다. 신분이 처지는 앤의 체면을 세우고 수석시녀로서 무시당하지 않도록 비호해주려는 의도임을 모르지 않았다. 대놓고 싸고도는 것이다. 신뢰하고 있노라고.

죄책감이 일었다.

"됐다. 원본은 원래대로 돌려보내고 너는 오늘 이만 가서 쉬어라. 고생했다.“

한창 셈을 하고 있던 시녀들의 부러운 눈빛이 꽂혔다. 평소라면 고개를 젓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종이를 잡았을 것을, 앤은 얌전히 말을 따랐다. 클라리 경을 찾아 사파이어 목걸이를 방에서 찾았다며 보여주고, 성당에 가서 기도를 올릴 작정이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하나이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아롈은 종이 속에 들어갈 것처럼 집중했다. 펜촉이 날아갈 듯 손을 움직였다.

아롈이 배운 것은 국정이지 안살림이 아니었다. 아롈이 태어났을 때 소피야 황후가 붕어한 지 오래였기 때문에 어머니인 옐레나 대공비가 안살림을 맡고 있었지만, 아롈은 어머니에게 일절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애초에 국정만을 배우기에도 벅찼다. 연회가 열려야 하면 어머니가 열였고, 연회 정리도 어머니가 끝냈다. 국빈이 오면 손님의 숙소며 식사도 어머니가 대접했다. 아롈은 안살림을 어찌 하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대체 커튼을 가는 건 누구에게 시키고, 무도회에 필요한 게 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초대장은 또 누구에게 보내고. 일단 호승심에 하겠다고 말을 해놓고서도 막막했다.

리젤로트의 부은 눈을 보고도 연회 준비를 도와달라고 말을 할 자신은 없었다. 크리스틴은 아롈 만큼이나 아는 바가 없을 터였다. 미네트에게는 부탁을 하기 싫었다.

처음에는 영수증을 기반으로 추정해보려 했다. 하지만 아롈은 손을 대볼 수록 경악했다. 도무지 체계라는 것이 없었다. 한 사람이 진득하게 맡지 않으니 주먹구구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정리된 장부도 없었다. 영수증 뭉치가 전부였는데, 영수증을 뒤지고 있다간 정리가 되기도 전에 연회가 끝날 판이었다. 그나마 오를레앙 대공비가 손댔던 행사는 장부가 남아있었지만 아롈은 그 장부를 펼쳐보자마자 다시 접고 모른 척 영수증 더미에 다시 끼워 넣었다.

그 내역은 세시안의 전처와의 결혼식이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아롈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보르디의 소피와 나바르의 쥬스티느를 불러다 가르침을 청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필리프의 장녀인 소피는 제 할머니인 보르디 대공비에게 혹독한 신부수업을 받아왔고, 나바르의 쥬스티느는 일찍 타계한 어머니 대신 나바르 대공가를 이끌고 있었다.

그녀들이 연회에 필요한 준비과정을 머리를 맞대고 적어주었고, 아롈은 그것을 기반으로 모자라고 넘치는 것을 가감해가며 매달렸다. 한창 글씨를 적는 중에 잉크가 똑 떨어졌다.

“윽.”

잉크를 찍으려 팔을 뻗었는데 나무토막처럼 뻐근하다. 아롈은 고개를 젖혔다. 목부터 어깨, 팔까지 전부 아팠다. 반가운 친구 같은 고통에 펜을 내려놓고 어깨를 돌리자 관절이 서걱거렸다. 아프다. 눈도 뻑뻑한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뜨는데 보들보들한 목소리가 아롈을 불렀다.

“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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