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열병 (가제) (8)
“일어나렴. 미련하게 그리 계속 있어서 나를 매정한 시어미로 만드는 건 또 뭐라니.”
마침내 그 말이 떨어졌다. 황후의 눈은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비틀거리며 넘어지길. 추하게 창피를 당하길. 깃털 부채를 흔들며 ‘어머나, 네 어미는 그런 것도 교육을 안 시켰다던?’하고 비웃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롈은 이미 고통이 너무 심해 덜덜 떨리는 다리를 무시하고 매끄럽게 웃었다.
“제가 요령이 없었나봅니다.”
간혹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서 피를 통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곤 해도 하반신에는 거의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아롈은 해냈다.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우아하게 일어서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뒤에서 무릎 꿇고 있던 시녀들은 달라서 다들 나동그라져 일어나질 못했다. 대공비와 공작부인의 시녀들이 다가가 친구들을 일으켰다. 아롈은 이 자리에 일부러 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앤은 시키는 일을 잘 수행할 정도로는 영리해도 치졸한 싸움에 잘 대응할 인재는 아니어서 놔두고 왔다. 설마 이렇게 직접적인 방법을 쓸 줄은 몰랐지만.
“앉으렴.”
필리프의 아내인 샤를루아 공작부인과 그 동서인 론 공작부인이 재빨리 일어나 아롈을 양쪽에서 부축했다.
아롈은 원래 준비된 듯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누우신 기간이 길어 걱정했는데 이토록 쾌차하신 모습을 뵈오니 기쁩니다.”
황후는 아롈이 멀쩡히 일어설 줄은 몰랐는지 얼굴이 변해 잡담을 좀 나누다가 머리가 아프다며 자리를 파해버렸다. 황제도 그렇고, 도대체가 이 집안사람들은 사람을 오라 가라 해놓고는 자기 할 말만 다 하면 끝인 줄 안다. 눈치를 보고 체면을 살려주는 법이 없었다.
아롈의 어머니뻘인 사촌올케들은 아롈을 데려다주면서도 황후의 무도함에 대해 어이없어했다. 전처들을 볶기는 했어도 이렇게 노골적인 일은 없었다고. 전처인 루이즈 마리 역시 뒷배 없기로는 누구 못지않은 후국(侯國) 출신 여자였지만 말로나 구박할 뿐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면서.
아롈이 말을 막고 내보냈다.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사실 답을 안다. 쫓겨난 신세라 그렇다. 아롈이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는 한 코시카에서 부드럽게 돌려서라도 항의가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움직이지 않는다.
비번인 시녀들이 전부 나와 다리를 주무르는 동안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아랫것들 앞에서 눈물을 짜는 것이야말로 가장 칠칠치 못한 행동이다. 앤은 아롈의 옆에서 부채를 부치고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조금만 제정신이었다면 아롈은 세시안이 왜 이 시간이 들어오지 않는지에 대해서 의아하게 여겼으리라. 그는 항상 규칙적인 시간에 자비관에 왔다.
하지만 지금은 오지 않았으면 했다. 이런 흉한 꼴을 보이기는 싫었다. 항상 완벽한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그 때 세시안은 자비관 2층에 앉아있었다.
자비관에서 황후가 저지른 만행은 순식간에 정의관을 뒤덮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비관 시녀들과 사귀는 시종들도 많았고, 대부분 귀한 집안 자제들인지라 남매가 나란히 시종과 시녀직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시안의 시종인 벨망 경이 그런 경우였다. 그의 여동생은 오베르뉴 대공의 셋째 며느리인 디뉴 공작부인의 시녀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후의 일이 터지자 바로 정의관에 달려와 오라비에게 꼬치꼬치 일러바쳤다.
사실 그녀를 책할 것도 못 되었다. 아롈이 돌아가자마자 과장을 좀 보태 자비관의 모든 시녀들이 정의관으로 몰려나왔던 것이다. 당연히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이블린의 모든 남성들이 황후가 마담 라 세르를 네 시간 동안 무릎 꿇려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시안은 그 사실을 듣자마자 자비관으로 향했다. 모후 대신 미네트가 나와 식사중이시니 기다리라 했다. 그는 응접실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부황에게 찾아갈 생각은 아예 들지 않았다. 부황이야말로 모후가 그렇게 날뛸 수 있게 해주는 뒷배였다. 몇 달에 한 번 간격으로 공식 정부를 갈아치우면서도 황후에게만은 절대적으로 관대했다. 무관심과는 달랐다. 지금껏 부황이 모후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한 예는 이번 혼사가 유일했다.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았다. 희한한 향이 풍겼다. 모후는 막내아들을 잃은 뒤 이교도의 풍습에 심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향을 피우고, 융단을 사다 깔고, 희한한 카드와 보석점을 쳤다.
그 향이 음식 냄새와 섞여 다소 역했다.
“오, 내 사랑하는 아들. 무슨 일로 왔니.”
“어마마마.”
그는 미네트에게 눈짓을 했다. 그녀는 별 말 없이 나갔다. 그래서 차 한 잔 없이 덩그러니 앉아 모후를 대면하게 되었다.
모후는 성의 없는 손짓으로 몇 번 카드를 섞어 늘어놓다가 다시 거뒀다. 한 장 뽑아보고 다시 넣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손장난이라는 걸 안 세시안은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제 아내를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여자들 간의 일에 참견하려고 식사도 거르고 달려온 거니?”
황후는 카드를 탁 내려놓았다.
네 시간 동안 무릎을 꿇리지 않았느냐고 물어봐야 그게 무어 잘못이냐고 되물을 태세였다. 황후는 지금 껍질에 들어간 달팽이 같은 상태였다. 꼬챙이로 끄집어내지 않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끄집어내도 금방 들어가겠지.
“며느리랑 차 한 잔 마시려고 불렀을 뿐이란다. 내가 그간 몸이 안 좋았잖니. 잠시 조는 사이에 들어왔더구나.”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둔한지 모르겠더구나. 그냥 일어나 앉으면 될 것을 알아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버티다니. 왜 사람을 나쁘게 만든다니?”
정말 결백하다는 듯이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래서 걔가 쪼르르 정의관 달려가서 일러바친 거니? 그런 거야? 얼굴 예쁘고 어린 계집애가 눈물 좀 짠다고 예까지 와서 그런 얼굴로 이 어미를 다그치려 했어?”
목소리가 떨렸다. 황후의 목이 멨다. 눈에서 눈물까지 흘러나왔다.
“네가 어떻게 이 어미한테 이럴 수가 있니. 하나밖에 안 남은 아들인 네가.”
손수건을 잡아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세시안은 지친 채 그를 낳아준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루이즈 마리 때도 꼭 이렇게 나왔다. 세시안은 그 때 고개 숙여 빌었다. 부족한 사람인 건 압니다. 하지만 시간을 주세요.
황후는 턱을 괴고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내가 뭘 했다고 그러니?’
심성이 악한 분은 아니다. 그저 고집이 세고 까다롭고, 방어벽이 강할 뿐이다. 도박에 빠지기 전에는 사치도 별로 하지 않는 소박한 삶을 살고 있었던 데다가, 아이들을 정말 예뻐해 주었다. 한 번 마음을 열어준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약하다.
그래서 기다리고 이해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도를 넘었다. 그는 막연히 머리를 쥐어뜯어놓을 거라느니, 할퀼 거라느니, 때릴 거라느니 어머니가 노래를 불러도 그건 단순한 분노의 표현이요 실제로 행하지는 않을 만큼의 분별력을 갖췄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 루이즈 마리 때에도 몸에 손을 댄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가 틀렸다.
“어머니.”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았다. 어마마마, 황후 폐하가 아닌 어머니.
“그만하세요.”
“뭘 그만 하라는.”
“한 번만 더 이런 일을 벌이신다면 부황께선 앙굴렘 공작-루이 오귀스트의 동생의 장자, 즉 세시안의 친사촌-에게 황위를 넘기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보셔야 할 겁니다.”
“뭐!”
목소리가 찢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 전 바보가 아닙니다. 목석도 아니고요.”
묵인했기 때문에 그 죄책감이 더욱 컸다. 어머니가 며느리를 언젠가 받아 들일 거라고, 조금만 더 살갑게 굴면서 시간이 지나면 차차 친해질 거라고 믿어버렸다. 그게 편했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황후의 체면을 상하게 하면서 대들지 않아도 되니까.
“두 번은 참았습니다. 세 번은 싫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벌써 미안한 일을 했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사람에게 그물을 던져서 날개를 꺾고 새장에 넣어 잡아왔다. 그것도 모자라 말려죽이라고?
그는 일어서 무릎을 꿇었다.
“가보겠습니다.”
“그 계집애가 어떻게 홀린 거니.”
세시안은 돌아서다말고 우뚝 멈춰 섰다. 황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내 아들은 좀 다른 줄 알았더니만 너도 똑같은 사내야. 엘리엔 그 계집애. 얼굴 예쁘고, 어리고, 날씬하면 다 되는구나. 그렇지?”
엘리엔이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의 엘리엔이 아님은 분명했다.
예뻐서가 아니다. 여인의 미모, 물론 간혹 감탄스럽고 흥미로울 때가 있지만 그저 그 뿐. 어려서도 아니다. 왜냐하면.
한 문장이 불쑥 튀어나갈 뻔했다. 가슴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솟았다. 발루아의 문장은 푸른 장미라는 것처럼. 로렌의 수도는 렌이라는 것처럼.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당연하게 알고 있는 답처럼 튀어나온 그 말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물러가겠습니다.”
세시안은 그 답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소중히 품고 황후의 방을 나섰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들려줄 만한 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