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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1)


 아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결혼식 이후 처음 여는 무도회였고, 처음으로 황실에서 여는 연회였다. 인사를 오는 사람들이 쇄도했다. 아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인사를 와서 모여 있는 숙녀들의 반 이상은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그저 희기만 한 옷, 흰 바탕에 금실로 장식한 옷, 은실로 장식한 옷, 흰 바탕에 자잘한 잔꽃무늬를 넣은 옷, 변형해서 희한한 무늬를 넣은 옷 등등.

청록색 바탕에 분홍색 리본으로 장식한 옷을 입은 아롈은 흰 비둘기에게 둘러싸인 공작처럼 눈에 띄었다.

인사를 온 소피는 결혼식 때문에 시작한 유행이 이제야 빛을 본다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마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흰 옷들을 맞추었는데, 그 동안 뽐낼 자리가 없었을 뿐이라고. 그런 그녀도 흰 옷감으로 옷을 지어입고 있었다.

코시카에서 아롈은 치장이나 복장에 대한 감각이 좋은 편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눈에 띄고 싶어서 안달하며 꾸미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치장에 크게 시간을 쏟지 않는 아롈이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그거야 말로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유행을 선도하고 앞서가는 것은 언제나 어머니의 몫, 아롈의 것은 아니었다. 즉 이 상황은 순전히 ‘우연’이 빚어낸 촌극이었다.

아롈은 영양가 없고 지속되지도 않을 칭찬을 대강 넘기고는 필리프가 뽑아준 목록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데에 치중했다.

필리프의 혹독한 훈련은 효과가 있어서, 인사를 해오는 사람들 중 처음 듣는 이름은 없었다. 누구의 친척이니, 누구의 사돈이니 하는 정보를 머릿속에서 꺼내 이야기하며 아는 척을 하자 금세 시선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호의적일 수밖에 없는, 보르디 쪽 집안의 가신이거나 보르디에 붙었을 때 이익이 되는 집안의 사람들을 주로 기억했으니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의 손님들 몇 명에게도 아는 체를 했다. 부르고뉴 측의 인물들 몇 명은 아롈을 보는 얼굴까지도 바뀌었다.

분위기는 금세 부드러워졌지만 아롈은 그럴수록 긴장했다. 저 멀리에는 필리프가 보고 있었고, 옆에는 수족이나 다름없는 소피가 있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실수를 하지 않는지 세 번은 점검해보고 이야기했다.

게다가 더웠다. 살갗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처럼 덥고 건조했다. 아롈은 더위에 약했다. 하물며 오늘은 성장을 해서 속옷도 여러 겹이고 허리도 평소보다 더 조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나, 참으로 어머니를 닮으셨군요.”

한창 지쳐있을 무렵 한 공작부인의 순서가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있었다.

조제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아롈의 기억 상 전 부르고뉴 대공의 셋째 딸로, 전 오베르뉴 대공의 둘째 며느리로 시집갔다. 부르고뉴에는 부르고뉴 대공인 카트르 말고 남자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는 엘리엔의 절친한 친우였답니다.”

코시카 폐하, 혹은 여제 폐하가 아닌 엘리엔이었다. 아롈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속으로 차게 웃었다.

-아롈 여대공 전하. 체사레브나께서는 지금 바쁘십니다.

-그래?

-예. ……를 만나고 계세요. 나중에 전하께서 오셨다고 전해 올리겠습니다.

수많은 손님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어렸던 아롈은 어머니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적어도 저런 종류의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알았다. 하물며 부르고뉴 대공녀. 친했을까.

그녀의 얼굴에는 미숙한 아롈조차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진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호의는 거의 없었다. 제 어미와 똑같은 성격일까, 아닐까, 그렇다면 호구일까, 아닐까. 그런 의문으로 가득해 보였다.

아롈은 저 멀리 있는 필리프를 돌아볼 것도 없이 미소 지었다.

“반갑습니다, 조제핀. 어머니의 친구 분을 뵙게 되다니 저로서도 기쁩니다.”

“이쪽은 제 아들들입니다.”

셋 모두 아롈보다 나이가 많아보였다. 그 중 장자는 남편과 비슷한 나이로 옆에 부인을 데리고 있었다. 조제핀이 어머니의 연배인 만큼 그것이 응당 당연했다. 이반이 만약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스물여덟일 것이다.

아롈은 그들에게 손등에 입 맞추게 하지 않고 가볍게 인사만을 건넸다.

“만나서 반갑네.”

대공의 손자인 공자들은 그 자신들까지만 귀족의 일원으로 인정될 뿐 그 아래로 작위를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성직자가 되든, 군인이 되든 제 살 길을 찾아야 할 터였다. 가문에 속해 있는 남작이나 백작 작위를 떼어줄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그러지 않는다.

잘못하면 가문의 세가 작아지고 땅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현 오베르뉴 대공에게는 베리 공작이라는 아들이 있는 만큼 조카들이 뒤를 이을 확률도 적었다. 그토록 의미 없는 아이들이건만, 조제핀은 아들들을 여왕의 보석처럼 뽐내며 웃었다.

“어머니가 놓친 자리를 딸이 가져가는군요.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신지.”

속이 긁혔다. ‘어머니가 놓친 자리’란 마담 라 세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롈의 어머니는 보르디의 엘리엔으로 불리던 시절 현 황제인 루이 오귀스트 황제에게 파혼 당했다.

거기까지라면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조제핀은 발톱을 집어넣지 않고 다시 한 번 혀를 휘둘렀다.

“어서 빨리 아이를 얻으시는 게 좋답니다. 부부지간이란 결국 아이를 낳기 위한 것, 뒤를 이을 아이 없는 부부는 열매 없는 과실수 같은 것 아니겠어요.”

‘뒤를 이을’이라는 부분이 아주 의미심장했다. 옐레나 여제는 자식을 내세우는 대신 자신이 직접 쿠데타를 일으켰다. 네가 얼마나 뒤를 이을 만하지 못했으면 그랬겠냐는 뜻으로 해석하라는 걸까.

아니, 아롈은 발끈하려는 자신을 내리눌렀다.

너무 나간 생각이었다. 남쪽에서 만난 여자들은 신기할 정도로 북쪽의 일에 무지했고, 여자가 황위를 이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아롈의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여제 같은 머리 아픈 자리에서 도망치셔서 다행이에요. 여자의 행복은 역시 바쁜 일은 남편에게 맡기고 주님께서 주신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거지요. 그래서 세르께서는 ​잘​해​주​시​나​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처음에는 조롱이라고 생각했으나 얼마 안 있어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평생 동안 여자가 대공위나 공작위나 왕위, 심지어 황위를 이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던 사람들이었다. 외국에 그런 여자들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그 사람들은 어쩐지 불쌍하다’고까지 이야기했다. 조제핀이라고 해서 예외일 이유가 없었다.

다른 나라니 어쩔 수 없다고, 비굴하게 웃어넘겼다. 어느 정도는 이골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화가 났다.

얼마 전에 다섯 번째 월경이 터졌다. 시녀들은 신부가 어린데도 왜 아직 임신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치였다. 대체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앤을 독촉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안 봐도 뻔했다.

-알자스 공작의 탄생을 위하여!

아직 시집온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첫날밤도 치르기 전부터 모두들 아이 얘기만 했다. 아롈은 열여섯 밖에 되지 않았는데 당연하다는 듯 임신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남편이 지금 잘해준다 해도 그것은 잠깐, 어차피 여인의 미모는 시들고 젊음은 마모되어 늙어가는 것,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다른 여자에게 눈이 돌아갈 테니 아들을 낳아야 나중에 행세할 수 있다고들 입방아를 찧어댔다.

나아졌다고 생각했건만, 다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아롈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어쩌면 웃는 얼굴로 굳어버렸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남부 갈리아 어가 아니라 페란토, 동부 말, 중부 말, 북부 말 등 아롈이 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뒤져도 알 수 없었다.

어쩌지. 아무 말도 안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텐데. 여긴 이렇게나 사람들이 많고, 실수하면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텐데. 그래. 그렇게 얘기해야지.

그렇군요.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공작부인. 이렇게.

“그렇군요.”

그 때 풍부한 목소리가 아롈의 말을 가로막았다.

“에모주 공작부인. 축원은 감사합니다만, 너무 서두르시는군요. 아이는 주님께서 정하시는 바이지 사람이 정하는 바가 아니잖습니까.”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빡인 조제핀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세르께서도 참. 사람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어쩌실 수 없는 것도 분명 존재하지 않나요?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잘 아시는 것 같던데요.”

받아치는 수준하고는. 만일 아롈 자신이었더라면 ‘후계자에 대한 기대 때문에 너무 서둘렀다’고 웃으며 빠졌으리라. 세시안이 아롈의 손끝을 슬며시 눌렀다.

“좋은 말씀입니다. 그 다복함을 본받고 싶군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좋은 소식이 들렸다지요, 공자.”

세시안이 눈짓을 하자 조제핀의 장자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조제핀은 자연스레 이야기에서 빠졌다.

과연. 관록이 있었다. 아롈은 잠시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쉬었다. 짧게 이야기를 마친 세시안은 아롈을 잡아당겼다. 눈이 마주쳐 반사적으로 웃었다.

“잠시 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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