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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4)


 “다음은 알렌 가문의 후계자 건에 대해서.”

아롈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메말라 있던 눈이 금세 촉촉해졌다. 둘째 날부터 본격적으로 열린 ‘회의’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삼일 째 시시껄렁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국외의 사정이라도 주워들을 수 있을까 해서 잠을 줄이고 일찍 일어나 단장을 하고 회의장에 나와 앉았건만 귀족 가문 후계자 승인이니, 가계가 단절된 작위의 회수니 하는 것들이 안건이라니. 대체 이런 걸 왜 일 년에 한 번 처리한단 말인가? 로렌 출신의 여인들은 전부 알고 있었는지 대공비와 아가씨(대공의 딸과, 대공의 후계자의 딸)들의 자리는 전부 비어있었고, 리젤로트와 크리스틴도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이 자리에 앉은 여자는 아롈과, 자리를 지켜야 하는 황후, 그리고 황후를 부축해 나온 미네트뿐이었다.

아롈은 한숨을 삼키고 눈만을 움직여 회장을 둘러보았다. 천장이 납작한 홀은 예스러운 건물이었다. 돔 형식도 아니고, 지붕이 뾰족한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의 크기로 건물을 지어놨으면서 일 년에 한 번밖에 열지 않다니. 낭비의 극치였다. 결혼식에서만 열린다는 왕의 서재라는 방도 그렇고, 로렌에서는 특정한 조건에만 열리는 방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거울의 홀에서 복작복작 움직이느니, 여기에는 휴게실도 따로 지어져 있으니 여기에서 연회를 열어도 나쁘지 않을 것을. 거울의 홀이 훨씬 호화롭기는 했으나 상대적으로 좁았다.

옆에 있는 사람이 아롈의 손등을 건드렸다. 옆을 보자 남편이 희미하게 웃으며 입술만을 움직여 말을 했다. 남부 갈리아 어가 아무리 늘었다곤 해도 독순술을 할 수준은 못 되었다.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눈썹을 찌푸리자 귓가에 입술이 다가와 밀어가 아닌 잡담을 속삭였다.

“지루하지요?”

“예.”

코시카에서라면 백작 가문의 후계자 승인 따위는 황제가 도장만 찍으면 끝이었다. 속국의 국왕이나 공 정도가 즉위하지 않는 이상에야 신경 쓰는 일은 드물었다. 코시카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백작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만큼 하찮았다. 황제의 시간은 귀중하고, 그런 일에 일일이 신경 쓸 만큼 한가롭지도 않았다.

대체 왜 고작 백작이나 남작 정도의 작위 계승에 사람들을 이만큼이나 모아두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표결에 의미도 없었다. 와병 중인 아롈의 외숙부, 보르디 대공을 대신해서 자리에 앉은 필리프는 계속 기권표만을 던지고 있었고, 다른 대공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승인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야말로 요식행위의 절정이었다. 이런 걸 하자고 보름간이나 대회의를 연단 말인가. 보름 동안의 연회를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생각나 울컥했다. 닷새면 충분할 것을!

“저도요. 그래도 조금만 참아요.”

손이 뺨을 감쌌다.

“아직 열이 있군요. 쉽게 안 떨어지네요.”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정말로, 괜찮은 거지요?”

그 괜찮으냐는 말이 단순히 몸의 건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저번에 서류를 잘못 잡아서 보는 바람에 당신의 아버지가 승인해서 빌려준 군대가 코시카 군대를 숙청하고 있는 정황을 포착하게 되어서 괴롭다고?

그는 한 나라의 후계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뿐이었다. 만일 상황이 반대였더라면, 아롈 역시 로렌 정도 큰 나라에 그만한 빚을 지우는 것을 사양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할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다음 안건은 결혼 승인입니다.”

남편은 미소를 남기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뺨에서 손이 떨어져, 아롈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알싸하게 뜨거웠다. 귀가 붉어진 채로 황급히 눈을 돌리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황후였다.

 

앤은 대회의 참석을 마치고 응접실로 돌아온 아롈의 뒤에서 머리를 다시 손질했다. 다소 느슨해진 머리채를 풀어 다시 고정하고, 장신구를 바꾸어 달았다. 머리 장식을 리본에서 꽃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한층 화사해졌다.

오늘의 머리장식은 작약이었다. 거의 끝물인 연분홍빛 작약은 레몬빛 머리카락과 어울려 화사한 분위기를 냈다. 아롈이 권해서 자신의 머리에도 꽂아보았지만 검은 머리와는 영 색깔이 맞지 않았다.

가느다란 은사슬까지 머리카락 사이로 교차시킨 앤은 뒤로 물러나 아롈의 호화로운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시계의 숫자 대신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고, 시침에는 금을 입혔다.

“전하. 시간이 되었사옵니다.”

“그래.”

아롈은 두세 군데에 더 메모를 하더니 펜촉을 기름수건으로 닦아서 소중하게 나무 상자에 넣었다. 앤은 상전이 손수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같은 시녀인 클레르 드 뤼시용이 손을 잘못 댔다가 경을 친 탓이었다.

그녀는 물건 정리를 하다가 실수로 크리스탈 잉크웰을 떨어뜨렸는데, 다행히 그녀의 발등을 때리고 떨어져 깨지지는 않았지만 클레르는 무시무시한 침묵을 견뎌야 했다. 아롈은 화를 간신히 삭이는 듯이 입술을 깨물고는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는 손대지 말라’고 했다. 그 뒤로 저 문방구만은 아롈이 직접 손대는 것으로 암묵적인 규칙이 정해졌다.

아롈은 응접실을 나서 대계단을 내려갔다. 앤을 비롯한 시녀 세 명이 뒤를 따랐다. 저 멀리 거울의 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시안이 아롈을 발견하고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단정한 얼굴엔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가 아롈을 대하는 태도는 이미 시녀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오래된 시녀들 중 몇몇 시니컬한 여자들은 예쁘고 고귀한 집안의 어린 신부라 전부인과는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고 비아냥대기도 했지만, 다른 시녀들의 말에 따르면 그것도 아니었다. 원래도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세심한 태도에 반한 몇몇 시녀들은 대놓고 정부라도 좋으니 옷을 벗고 침실에 들어가 볼까 같은 이야기를 웃으며 떠들어댔다. 앤은 그런 대화를 들을 때마다 놀라는 얼굴을 감추려 노력해야했지만. 중부에서 자랄 때에도 정부를 두는 남자들이 많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지만, 이 남부만큼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중부에서 왕족의 정부가 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자들은 대부분 창녀였다. 하지만 이 남부에서는 어엿한 푸른 피의 여인들도 얼마든지 대공이나 황제의 정부가 되려고 나서고, 기꺼이 무도회장을 활보했다.

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아롈을 따르고 있었다. 사고는 그 때 일어났다.

“늦었어! 늦었다고!”

“잠시만요, 마담 리젤로트!”

“앗.”

“꺄아악!”

아롈이 낌새를 채고 몸을 틀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다른 복도가 십자형으로 이어져있는 모퉁이에서 웬 여자가 불쑥 튀어나와 아롈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아롈은 여자와 엉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입가에 피가 흘렀다.

“읏.”

“꺄아아악!”

덮쳐진 사람은 따로 있는데, 오히려 덮친 사람이 비명을 내질렀다. 장미로 장식했던 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황후의 막내딸이자 발루아 가문 남매의 막내인 마담 리젤로트였다.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부산을 떨었다.

“꺄아. 아렐르. 안 다치셨어요? 죄송해요. 제가 실수했어요. 어떡해요. 피가 나요! 혀 깨무신 거 아니에요? 입 벌려보세요!”

“리젤로트……. 일단 비켜주십시오. 이건 대체…….”

“죄송해요…….”

“아렐르!”

세시안이 빠르게 달려왔다. 리젤로트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손을 뻗어 자신의 아내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놀랐을 뿐입니다.”

“오라버니, 너무해요. 저는 안중에도 없으신 건가요?”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아롈을 완전히 일으킨 세시안의 말투는 대단히 싸늘했다. 앤은 기시감마저 느꼈다. 대체 누가 울렸느냐고 물어봤을 때의 그 얼굴과 목소리였다.

“복도에서 뛰어다니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니.”

“하지만, 리즈는. 리즈는.”

리젤로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반성하렴.”

“죄송했어요.”

그리고 리젤로트는 머리가 흐트러졌다며 시녀를 데리고 다시 올라가버렸다.

“정말이지. 저 아이는…….”

“전하. 됐습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아롈이 눈짓하자 앤은 부리나케 달려가 바닥에서 카메오가 달린 리본을 주워 바쳤다. 대체 어떻게 부딪쳤는지 리본이 풀려있었다.

“전하. 손목을.”

“됐습니다.”

아직 언짢은 기색이 가시지 않은 세시안이 앤의 손에서 리본을 빼앗아들었다.

리본은 무거운 카메오가 달려있는 탓에 상당히 둔탁해보였다. 아롈은 순순히 반지를 네 개나 끼고 있어 화려해 보이는 손을 내밀었다. 희고 가는 손목에 리본이 한 바퀴 둘러졌다. 큰 손끝으로 섬세하게 매듭을 지은 그는 애써 웃는 듯했다.

“갈까요? 늦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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