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눈송이 - 세시아롈 십이국기 AU (5)
소우린은 손목을 부여잡고 씩씩거렸다. 끼고 있던 팔찌가 끊어져 옥구슬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람을 때린 죄책감이 번졌고, 폭력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눈물이 고였다. 때린 사람은 그리 당황하는데 맞은 이는 되레 평온했다. 뺨은 조금도 붉어지지 않았다. 마치 조각상인 양.
현군은 검은 눈으로 빤히 소우린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맞은 이의 노여움은 조금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소우린을 동정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었다.
왕을 찾았다고? 그것으로 끝인가? 나는? 나는 짐승이라서, 물건이라서, 그냥 그 자리에 숨만 쉬고 살아있기만 하면 되니까, 괜찮다는 뜻인가?
그가 흘린 피.
소우린이 죽인 토끼가 흘린 피.
기억을 주워담을 때 마음이 흘린 피.
그 붉은 것들이 온몸에 고여 썩어들어갔다.
어느 날은 애틋했고, 또 어느 날은 원망스러웠다. 애틋한 날보다 원망스러운 날이 더 많았으나, 소우린은 애틋함에 젖을 때마다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전생의 그녀가 현생의 소우린이 아니라면 전생의 그는 현생의 종왕이 아니니 종왕을 용서하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그리고 전생의 그가 현생의 종왕이라면 소우린은 여전히 그가 원망스러워 용서할 수 없었다. 애정을 죽었다 되뇔 수는 있을지언정 눈앞에서 안심하며 눈감던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해서 소우린은 갈팡질팡하며 그 어떤 마음도 버리지 못한 채 이 곳에 있었다. 그저 지치고, 서러워서 전부 그만 두고 싶었다.
마치 그가 죽은 뒤 이 곳에서 그랬을 것처럼,
편해지고 싶었다.
"나는."
소우린은 꽉 막힌 목을 억지로 울려 목소리를 냈다.
"네게 구구절절 내 결정의 당위를 설명해야 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다."
여기에서 뺨을 후려친 것에 대해 사과하면 우습게 보일 뿐이겠지. 소우린은 어금니를 악물고 요구했다. 아직도 손바닥에 남은 감촉이 생생해서 손이 떨렸다. 본성을 거스르는 일은 그토록 괴로웠다.
"그리고 내 결정에 대한 설득도, 만류도 듣고 싶지 않아."
"그래."
현군은 스스로가 무정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대답하지. 방법은 없네."
맥이 풀렸다. 제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뱃속에서부터 끌어올린 자존심은 그저 서있는 데에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므로 대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왕은 사직할 수 있지만 기린은 사직할 수 없어. 그런 예도 없고 그러한 법칙도 없네. 태보나 주후는 직책일는지 몰라도 기린은 직책이 아니네.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 뿐. 기린이 죽으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왕의 숨이 끊어진다. 그것이 규칙이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두드려맞는 기분이었다. 나는 왜 하필 기린이어서.
왜 내가 왕이고 당신이 기린이 아닌 건가. 이 세계, 왕과 여왕의 비율이 반반 정도 되고 기린의 성비도 그렇다 하지 않았나. 차라리 내가 왕이었더라면 그냥 훌쩍 떠났을 텐데. 전생은 그렇다 쳐. 하지만 왜 죽고 다시 태어난 지금까지도 나는 왕일 수 없는 거지.
"알아들었어."
입술이 제멋대로 달싹였다. 소우린은 흰 손으로 가슴의 옷깃을 움켜쥐고는 다시 중얼거렸다.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니 더 설명할 필요 없어."
"예, 더 설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현군."
소우린은 기척을 느끼고 망연히 돌아보았다. 왕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두 번째 삶은 농민 집안의 막내로 시작했다. 위로 누나가 둘, 형이 둘 있었다. 앉자마자 책을 잡아야했던 전생과 달리 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부모는 그를 많이 안고, 입맞추었다. 어색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무에서 아이가 열리는 세계. 왕이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해야하는 세계. 혈통으로 이어지지 않는 권위며 기린이며 저 먼 마을이 마수에게 멸망했다는 소리들이 해가 떠오르고 지면서 그에게 스몄다.
기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온유한 성격이라곤 해도 나기를 황자였다. 몸에 밴 움직임이며 눈짓이며 행동거지 모든 것이 마을 아이들의 눈에는 거슬렸으리라. 건방지다 머리채를 쥐어뜯기고 주먹으로 얻어터지길 여러 번이었으나 숨쉬는 행동부터 고치는 일이 수월할 리 없었다.
시냇가에 앉아 피딱지가 진 뺨을 찬 물로 식히며 생각했다.
나는 왜 이 곳에 아무 것도 잊지 못하고 떨어졌을까.
------.
이름 하나가 똑, 시냇물에 떨어져 흘러갔다. 그를 아끼는 누이와 형들이 쫓아나가 그의 역성을 들어준 것이 자그마한 위안이었지만, 어미가 밤새 내 자식 같지 않다 술을 마시며 흘린 한탄은 가슴 속 깊이 남았다.
그래도 평온하던 어느 날이었다. 왕이 살해당했다.
신선이라 하여도 목을 베이면 죽는다. 저 높은 구름 위의 이야기를 들을 방법이 어찌 있겠냐마는, 항간의 이야기로는 패륜이라 했다. 치세를 함께 하던 공주가 갑자기 미쳐 제 오라비를 베고, 소우키와 어머니를 베고, 마침내 아비까지 베었다고.
봉산에 기린이 열리고, 그 기린이 자라 왕을 선택한다. 그 때까지 약 몇 년 간 주남국은 마수의 손길에서 버텨내어야 했다. 오래된 나라였다. 기린이 실도로 앓아누운 기간이 없어 그간 차근차근 쌓아올린 제도가 힘있게 버텨주었다.
마수는 순식간에 날뛰지 않았다. 불길한 소문처럼 차츰차츰 발뒤꿈치를 들고 다가올 뿐. 어미의 친정 마을이 불탔다고 했다. 옆집 남자가 소를 팔러 가다가 마수에게 뜯겨 다리 한 쪽만 돌아왔다. 불안하고 불안했지만 밭을 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기다란 나무장대로 검술 흉내를 내보았으나 떡 벌어진 근골이 무색하게도 우스울 뿐이었다.
이윽고 그 날이 왔다.
군이 출동해 그를 구했을 때 부모와 누나와 형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는 다시 홀로 남았다.
잠시 둘만 남게 해달라는 말에, 현군은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현군은 그가 소우린을 달래어 주남국으로 돌아가리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종왕은 그 근거없는 신뢰가 미안해졌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둘만 놔두고 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소우린은 얼굴을 닦지도 않았다. 창백한 얼굴에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연한 녹색 눈이 말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찌 웃으십니까?"
"당신이 무사해서요."
곧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으려 몇날 며칠을 밤새워 달려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일 터.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기뻤다.
소우린은 눈앞에 숨쉬고 있었다.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눈앞에 무릎 꿇어 애원할 말을 곱씹었던 것도 같다. 정작 얼굴을 마주하자 그 결심은 봄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졌을까.
"다친 곳은 없어요?"
"이야기를 들으셨잖습니까."
소우린은 말허리를 툭 잘랐다. 피곤에 절어있는 얼굴이 고와서 설렜다.
"그만 두고 싶다는 이야기라면, 네."
그는 일그러지는 뺨에 손을 얹으려다가 움찔했다.
-손대지 마세요.
되도록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울고 화내고 소리지르는 것조차 아껴 봐야 할 처지이지만, 정말 되도록이면.
"부탁 하나 할까요? 울지 말아요."
종왕은 차분히 손가락을 꼽으며 짚었다.
"울지 말고, 고기도 먹지 말고, 피도 보지 말고, 하고 싶은 것만 보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한숨처럼 마지막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웃어요."
눈이 깜빡였다. 실낱같은 숨결이 흘러나와 이어지는 듯 가냘팠다. 조금이라도 더 보면 끊을 수 없을 것 같아 돌아섰다. 망막에 금빛이 잔상처럼 남았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건물을 나섰다. 현군은 거처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여선들은 그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고두했다. 그는 비단옷자락을 잡고 기수에 올라탔다.
"잠깐!"
무시하고 날아올랐다. 어차피 소우린은 전변하지 못한다. 저리 비틀거리는 몸으로는 사령을 불러내도 그를 따라오지 못할 테지. 칼날 같은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따라오는 기색이 없음에 안도하고, 또 서글피 여겼다. 봉산으로 향하는 소우린의 뒤를 밟는 내내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보았다. 흔들리던 마음은 점차 한 가닥으로 수렴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종왕은 순식간에 봉산 꼭대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