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여름 눈송이


1. 황금의 비 (6)


 그 뒤로 이어진 장면은 가난뱅이라면 꿈속에서도 상상해본 적 없을 풍경이었다. 어린 귀족 소녀들이 꼭 같은 옷을 차려입고 바구니를 들고 나타나 금화를 뿌리기 시작했다. 하객으로 모인 이들은 금화 한 닢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지위와 부를 갖춘 자들이었지만 날아오는 금화를 굳이 외면하진 않았다.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날아오르는 금화들은 이내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 들어가기도 하고 사람들의 발에 채이면서 빛을 내기도 했다. 도금이 아닌 진짜 금화였다.

정원의 분수대는 물 대신 물처럼 투명한 보드카가 솟아올랐다. 분수대에 머리를 박고 죽어도 아무도 모를 만큼 다들 취해 있었다. 시종들은 음식을 나르느라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많이 내와도 술과 음식이 요술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결국 포도주는 상자 채로 내와야 했다.

아롈은 아나스타샤를 던지듯이 내려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이를 곱게 내려놓자마자 정신없이 멍해졌다. 식장 안은 광란의 소용돌이였다. 아까까지 있던 길은 없어지고 주변엔 온통 술 냄새 풍기는 주정뱅이만 돌아다녔다. 아롈은 그 주정뱅이들의 얼굴을 웬만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 모두 코시카가 지배하는 공국의 공왕들, 그 자식들, 쟁쟁한 귀족들이었다. 평소에 품위 있게 뒷짐을 지고 뒤뚱거리며 걷던 이들이 한 손에는 술병을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여기서 뭐라고 소리쳐봐야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롈을 못 알아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롈은 누구 도와줄 사람이 없나 해서 단상 위를 바라보았지만 얼굴이 시뻘게진 콘스탄틴 대공이-그가 이번 혼례의 공식적인 주최자였다- 술을 더 가져오라며 잔을 탁탁 탁자에 부딪히는 걸 보곤 이내 체념했다. 미셸과 필리프도 다른 사람들이 쓸어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신부인만큼 오늘의 주인공이건만 아무도 신경을 써주질 않는다 싶어 우스웠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 잠시 서서 고민하는데 누군가 옷자락을 당겼다. 방금 내려놓은 아나스타샤였다. 아롈은 할 수 있는 한 상냥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냐, 아나스타샤?"

"아롈 전하, 귀 좀 빌려주세요."

"음?"

아롈은 순순히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대로 허리를 숙였다. 몸에 걸친 이 붉은 색이 얼마나 눈에 띄는데 설마 신부를 밟진 않겠지. 아나스타샤는 손을 모아 아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 정말 예쁘세요. 혼인 축하드려요. 행복하게 사셔야 해요."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 있는 걸까. 지금만큼은 저 멀리서 빈정대는 마음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롈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물었다. 잔치에서 신부가 눈물을 흘리는 법은 없었다.

"고맙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정말로 결혼하는구나. 다시는 이 나라에 돌아올 수 없겠지.

알렉산드르가 떠난 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자기가 황제가 되면 알렉산드르를 다시 불러오리라고. 대공위를 돌려주고, 나탈리야에게는 대공비는 몰라도 공비 작위 정도는 주리라고. 그런데 이 모든 희망이 꺾였다.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춤. 겨울이 되면 속절없이 내리는 눈. 겨울 내내 손가락 끝에 핏방울이 맺히도록 놓은 자수들과 사냥해서 잡아온 털 고운 모피들. 잘 구운 양고기와 요구르트. 반 잔만 마시면 푹 잠들 수 있는 보드카.

이 모든 것이 그리울 것이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많았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 코시카.

내일 다시 한 번 교회에서 황족들만 모인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그 때에도 이런 감흥이 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전하. 울어요?"

"아니."

아롈은 자신의 별을 떼어냈다. 성 소피야 훈장의 그랜드 크로스에 따라오는 팔각별에는 총 백열여섯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었다.

"우리 토끼님께 마지막으로 주고픈 금품이 있구나, 받아주겠니?"

아롈은 그 별을 아나스타샤의 가슴에 달아주었다. 팔각별을 달 수 있는 사람은 황후, 여대공, 대공비 뿐이었으나 그것이 뭐가 중요할까. 이 어린 아이는 아롈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해 준 유일한 코시카 사람인데.

소녀는 파란 눈을 깜빡이다가 얼굴을 확 붉혔다. 통통한 뺨이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정말요?"

성 소피야 훈장은 초대의 황후이자 이대 째의 황제인 소피야 여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훈장의 모토는.

"그래. 네 것이다. 부디 건강하기를."

"감사합니다!"

'사랑과 조국을 위하여.'

아나스타샤는 신이 나서 폴짝폴짝 인파 사이로 사라져갔다.

아롈은 다시 혼자 남아 쓰게 웃었다.

안녕, 나의 조국.

 

정말 안녕, 사샤.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