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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2. 바다의 용과 여해적과 마법사 (3)


 미셸은 인적이 드문 배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땅이 꺼져라 사과를 시작했다.

"아롈, 이 무례를 어떻게 사과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디 남쪽의 기사들이 전부 그렇다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럼 황태자비를 호위해서 올 기사들을 아무렇게나 뽑았다는 소리밖에 더 되는가. 아롈은 빈정거리는 마음을 깊숙이 숨기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모욕당하신 기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아롈은 걸음을 멈췄다. 부드럽게 퍼진 스커트가 출렁였다.

"미셸. 그렇게 변명하실 것 없습니다. 공은 공, 과는 과. 그들의 과는 그들이 책임지겠지요."

"그리 말씀하시면 더욱 민망해집니다. 제가 책임자 아닙니까."

그 말이 맞긴 했다. 샤를루아 공작은 노구에 무리가 왔는지 뱃멀미가 난다며 방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아롈에게는 실권이 없었으니 실질적인 책임자는 미셸이 맞았다.

"그렇군요. 미셸이 ​책​임​지​셔​야​겠​군​요​.​"​

"네, 차라리 그게 좋습니다. 무슨 벌이든 내려주시지요, 아리따운 숙녀 분."

아롈은 정중히 숙여진 금갈색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짓궂게 웃었다.

"그럼 알비다 전설의 끝은 들려드리지 않는 걸로 하겠습니다."

"예?"

예상한 대로였다. 미셸은 기겁해서 고개를 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 이 남자는 한 자리에서 꼭 한 이야기를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이였다. 식사 중에 이야기가 끊기면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결말을 구걸했다. 한 달의 시간이라는 게 참으로 유용하구나 싶었다. 얼굴만 보고는 이런 사람인지 전혀 몰랐으니까.

"무슨 벌이든지 내려달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는 과장된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허나 너무 가혹합니다."

"전혀 가혹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거의 다 들려드린 이야기 아닙니까."

"끝이 가장 중요한 법입니다. 끝을 듣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 들은 게 되겠습니까?"

"그럼 앞으로 들려드리는 모든 이야기는 끝만 들려 들리는 것으로 벌을 대신할까요?"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거의 울 것 같았다. 아롈은 슬며시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기분은 나빴지만 그에게 빚을 지웠으니 되었다. 모퉁이를 돌면 있는 가장 깊숙한 곳이 아롈의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문 앞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아롈은 잠시 방을 잘못 찾아왔나 확인했지만 제대로 온 것이 맞았다.

"경은?"

아까 앉아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정확히는 일어서려다 넘어진 기사였다. 붉은 머리가 기억에 남아있었다.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이라니. 파란 눈은 남쪽에선 보기 힘든 색일 터인데.

"아까의 일을 해명하려고 찾아왔습니다만."

어린 치기인가. 아롈보다는 나이가 많아보였으나 그래도 약관은 되지 않아보였다. 앳된 얼굴이 그랬고, 짧은 앞머리가 채 가리지 못 한 여드름 두어 개가 그랬다.

"해명이라?"

"예, 아까 노하셨잖습니까. 비마마께 해명을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내가 왜 경의 변명을 들어야 하지?"

예의 없는 사람에게 말을 곱게 해 줄 이유가 없었다. 아롈은 주제를 모르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제일 경멸했다. 그래, 마치 유리예프스카야 계집 같은.

"무작정 숙녀의 방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그대가 알고 있는 유일한 해법인가?"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중요합니까?"

"그건 그대 생각이고. 나는 경의 말을 지금 들을 생각이 없다. 그대의 과는 나중에 리무쟁 공작이 치죄할 것이다. 물러가도록."

청년이 되지 못한 소년은 으르렁거리는 사자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저런 다혈질을 기사로 두다니. 방금 전까지 미셸에게는 약간의 빈정거림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어린 기사가 주인을 물어뜯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지금, 아롈은 이런 자를 호위라고 데려온 미셸에게까지 분노했다.

별, 같잖은. 아롈은 미셸을 돌아보았다. 살얼음 같던 웃음은 이미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울렁거릴 정도로 짜증이 났다.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무쟁 공작. 이 자를 당장 내 눈 앞에서 치우시오."

"비전하. 제발 고정하십시오. 이 아이는, 아니 이 자는……."

"당장 치우라고 했습니다."

"대체 당신이 뭔데!"

"앙투안!"

"용이 나타났다!"

점점 높아지던 언성이 뚝 멈췄다. 아롈은 잠시 귀가 잘못 되었나 의심을 품었다. 용이라고? 미셸과 무뢰한조차 말을 멈춘 걸 보아하니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때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듯 선원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해룡이다! 릴레벨트 해의 해룡이 나타났다!"

무슨 동화책의 해설만큼이나 친절한 설명이었다. 아롈은 얼이 빠진 채로 동화책의 한 구절을 만들어 속으로 읊었다.

그리하여 공주님이, 아니 여대공이 시집가는 배를 거대한 해룡이 나타나 가로막았답니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아롈. 제가 정말 몰라서 그러는데 릴레벨트 해의 해룡이라는 것이 혹시 해적단의 이름이라거나 그렇습니까?"

아롈이 고개를 젓기도 전에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일등 항해사가 구르듯이 달려왔다.

"귀하신 분들! 큰일 났습니다!"

 

정말 용이었다.

아롈은 제발 안전한 곳에 계시라는 미셸의 만류를 뿌리치고 갑판으로 달려 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린 것처럼 평화롭던 수평선에 웬 기둥 하나가 불쑥 솟아있었다. 고개를 있는 힘껏 젖히자 머리로 추정되는 거대한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아롈은 납득했다.

용이구나.

예전에 봤던 용과는 생김생김이 많이 달랐지만 그렇다고 용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샛노란 눈, 점액으로 뒤덮인 아주 긴 목, 부숭부숭 솟아난 이빨. 몸은 아주 컸고 독버섯 같은 푸른색이었다.

저렇게 생긴 생명체를 용이 아니면 뭐라고 부른단 말인가.

아롈은 진지하게 무슨 죄를 지은 적이 있나 돌아보았다. 그 한 끗이 모자라서 남쪽에 시집가는 것이 죄인가? 그래서 지금 내가 멀쩡한 바다를 지나가다가 남들은 다 멸종했다고 알고 있는 용을 마주치게 되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딱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아까 그 무뢰한이 사실 인간의 본성을 점치기 위해 신이 보낸 천사였다면 모를까.

아롈은 허허, 웃었다. 그래, 그나마 대포를 안 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달리면서 미셸이 공격했냐고 묻자 항해사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무심히 그렇구나 하고 넘겼건만 지금은 정말 붙잡고 키스라도 해주고 싶었다. 저런 생명체에게 대포를 쐈다간 배가 산산조각 났으리라. 저 용은 거대한 범선보다 네 배는 컸다.

[아디브는 어디 있지?]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인간으로 치면 여인의 것이었다. 아주 투명하고 구슬처럼 맑게 퍼지는 아름다운 소리. 아랫배부터 온 몸을 저릿하게 타고 올라오는 그런 소리였다.

[그녀의 이름을 듣고 왔다. 아디브는 어디 있지?]

정말이지, 어렸을 때는 간이 몸뚱이만 했나보다. 아니면 따로 두고 다녔거나. 저런 것을 상대로 말장난을 했었다니. 믿어지질 않았다. 아롈은 대답을 하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나 용은 성질이 아주 급했다.

[대답해라!]

세상이 뒤집혔다.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아, 고함 소리가 너무 커서 배가 출렁인 거구나. 몸에 감각이 없었다. 귀가 먹먹했다. 아롈은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한 번 몸을 부딪쳤다. 쓰러지면서 어깨를 먼저 부딪쳤는지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래도 몸이 부서져서 망정이지 배가 부서지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었다.

아롈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사악한 짐승 새끼들. 멸종할 위기까지 몰렸으면 심보나 곱게 쓸 것이지. 저런 심성을 가지고 패악을 떨어댔으니 옛날의 영웅들이 죄다 용 한 번 잡아보겠다고 몰려들었던 것 아닌가. 아롈은 다른 쪽 팔로 바닥을 짚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었다.

그 때 동공이 길게 찢어진 눈이 도르륵 굴러와 정확히 아롈을 쳐다보았다. 소름이 끼쳤다.

[너, 흰 계집.]

목소리 들어보면 너도 계집 아니냐며 빈정거릴 마음의 여유도 생기지 않았다.

용은 갑판을 살펴보다가 두 명을 더 집어냈다. 샤를루아 공작 필리프와 아까의 젊은 무뢰배였다.

[그리고 너, 늙은 놈하고 빨간 놈.]

용은 눈을 두어 번 끔뻑이더니 제법 분노가 가신, 무려 흥미로워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법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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