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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2. 바다의 용과 여해적과 마법사 (11)


 그야말로 폐부를 쥐어짜는 시간이 끝나고 아롈은 스스로 매무새를 다듬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머리를 단정하게 풀어 내리고 베일과 관을 썼다. 성 소피야 훈장의 붉은 새시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매고, 리본과 배지를 달았다.

배지가 매달린 리본에는 모토인 '사랑과 조국을 위하여'가 수놓여 있었다. 배지는 금으로 만들고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것으로 앞면에는 성 소피야의 그림과 다이아몬드 십자가가 매달려 있었다. 배지의 뒷면에는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의 약자인 D가 다이아몬드로 그려져 있어 약간 신경을 거슬렀지만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 허리춤에 배지를 매달았다.

별은 아나스타샤에게 주어 달 수 없었고 옷은 혼자서 손 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에 그냥 두었지만 얼굴에는 잘 하지 않는 화장을 했다. 장미수를 약간 바르고 분칠을 했다. 눈꼬리를 또렷하게 치켜세우는 일은 언제 해도 잘 되는 법이 없어 포기하고 색 없는 뺨과 입술에만 연지를 약간 발랐다.

열한 시 사십 분, 정중한 노크 소리가 났다.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미셸은 남쪽의 풍습이라며, 자신이 누구인지 고하는 대신 반드시 문을 두드렸다. 시녀가 없다보니 손수 문을 열었는데 뜻밖에도 미셸은 성장(盛粧)을 하고 있었다. 붉은 망토와 깃 달린 모자까지 쓴 그는 멋쩍게 웃으며, 반짝거리는 것이 많으면 혹 지나가던 배가 보고 건져줄지도 모르지 않느냐고 농을 던졌다.

그의 외모는 잘 차려입으니 한층 빛이 나서 문득 얼굴도 보지 못한 시누이, 리젤로트가 생각났다. 그의 목에서는 로켓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옷깃 속에 감춰져 있을까? 하지만 미셸이 발갛게 변한 아롈의 눈가를 보고 신사답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롈은 정중한 숙녀의 예의를 발휘해서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미셸이 손등에 키스하는 예를 차리고 나서 아롈은 그의 손바닥에 손을 얹고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 근 같았다.

갑판으로 나오자 선원들과 기사들이 죄 단정한 옷을 입고 사열해있었고, 배는 어느 샌가 닻을 내리고 멈춰있었다.

돛을 다 내린 탓에 코시카의 국적기만이 유일하게 달빛을 받으며 펄럭였다.

선장과 필리프, 그리고 앙투안 역시 성장을 하고 서 있었다. 항상 옷차림을 엄격하게 갖추는 선장과 달리 나이를 핑계 삼아 다소 느슨한 감이 있던 필리프는 외눈 안경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아롈은 그들의 인사를 받고 배 난간에 섰다.

"나와라."

전조도 없이 물이 치솟았다. 용의 머리였다. 저런 거대한 물체가 올라오는데 신기할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배를 멈추지 않았었지. 계속 달리고 있었는데도 용이 제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던 것은 그만큼 저 용이 노련하게 움직인 탓일까?

소름이 쭈뼛 돋았지만 아롈은 태연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제물을 가지고 왔다."

노잡이 노예들은 신대륙에서 잡아온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선장이 선원들을 시켜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솜씨 좋게 묶어두었다. 꼭 열 명,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먹어라."

그런데 용은 먹으라는 사람은 안 먹고 딴 소리를 지껄였다.

[울었나?]

창녀의 태에서 태어난 놈 같으니라고.

"네가 원한 제물이다. 먹어라."

[그러지. 일단 먹고 얘기할까.]

용은 길게 목을 뻗어 가장 왼쪽에 있는 사람을 입으로 물었다. 읍읍하는 비명소리가 강렬했다. 다른 노예들도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롈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용은 꿀꺽, 노예를 상체부터 통째로 삼켰다. 고개가 길게 퍼지면서 길쭉한 목이 사람 모양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저녁도 먹지 않았는데 다시 토할 것 같았다. 목구멍까지 신물이 올라오는 걸 간신히 삼켰다.

용은 차례로 열 명을 전부 먹었다. 아찔했다. 용은 다시 목을 당겨 보란 듯이 가스를 내뱉었다.

[아, 잘 먹었다.]

아롈은 저도 모르게 팔로 자기 몸을 감쌌다. 충분히 따뜻하게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추웠다.

"이제, 가라."

아롈은 애원하지 않기 위해 배에 힘을 주었다.

"네 스스로 약속을 했다. 이번에는 지켜라."

[너희를 무사히 보내주는 것?]

"그래."

[너, 마음에 드는데 이름을 알려주지 않겠느냐?]

"누굴 천치로 아느냐."

[하긴.]

분노 없는 대화는 자궁에 맥박이 뛰는 듯한 감촉을 선사했다. 달거리 중도 아닌데 아랫배가 아렸다. 용은 고개를 하늘로 쳐들더니 꺼억, 하고 다시 트림을 을 올렸다.

혐오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또 무슨 억지를 쓸지 모른다는 생각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용은 노란 눈동자를 용케도 초승달처럼 휘었다.

[좋아. 잘 먹었다. 가겠다.]

그리고 끝이었다. 용이 사라졌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칼로 끊어버린 것 같은 안도감이 몸을 덮쳤다. 아롈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바닥에 부딪혔지만 아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끝났다. 정말, 끝났나? 겨우 노예 열 명으로? 용이 다시 나타나서 속았냐고 낄낄거리진 않을까?

하지만 바다는 잔잔하기만 했다. 삽시간에 영원이 한 번 지나갔다.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아롈은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혼절한 아롈을 선장과 함께 방에 모셔다놓고 오자-선장은 미셸을 아롈과 단 둘만 놔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갑판은 온통 난리법석이었다. 선원들은 선창에서 마음대로 럼과 맥주를 가져다가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잔치를 벌였고 그 속에는 오를레앙과 보르디의 기사들마저 끼어있었다. 원래 친화력이 좋은 앙투안이야 그 속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돼지 멱을 따는 소리로 소리 지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지만 설마 샤를루아 공작마저 눈물을 글썽이며 술을 퍼먹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미셸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연로하신 분이."

"흠. 흐흠."

흰 수염이 얼굴에 가득한 선장은 헛기침을 하더니 간부들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잠시 후 코시카의 국가를 작곡한 음악가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만한 굉장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하."

미셸은 아직도 꿈같았다. 그 용이 그냥 사라져주다니. 적어도 엄청나게 꼬투리를 잡아서 괴롭힐 줄 알았는데.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던 게 믿어지지 않아 어지러웠다.

"형! 미셸 형!"

앙투안이 목까지 새빨개진 채로 술병을 흔들었다.

"같이 마셔요!"

오늘은 취하고픈 기분이었다. 미셸은 웃으며 기사들 사이로 끼어들어 술잔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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