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금발과 흰 손 (1)
아롈은 코시카의 여대공으로서 평생 적지 않은 공연을 보아 왔다. 코시카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황실 발레단을 설립한 곳이기도 했고 코시카의 황궁에는 따로 황실 전용의 극장이 딸려 있었다.
그런데도 살다 살다 이렇게 어이없는 공연은 또 처음이었다. 이건 발레도 오페라도 가극도 아니었다. 어째서 무용수들이 춤을 추면서 대사를 노래로 부르는 걸까. 마임은 어디로 가고. 그나마 실력이 괜찮다면 이런 것도 신선하다며 흥미롭게 보았겠지만 춤도 노래도 음악도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무희들의 움직임은 뻣뻣하기 그지없었고 허리에는 두툼한 살이 붙어있어 움직임이 둔탁했다.
하지만 더 처참한 것은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현악기는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파 음을 연주할 때마다 소리가 계속 튀었다. 피아노는 당김음을 제대로 살리지 못 해 곡이 전체적으로 시든 꽃처럼 늘어졌다.
목이 쉰 채 꽥꽥 질러 올리는 노래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었다.
코시카 황실 발레단의 신입들만 모아다가 공연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공연의 발끝도 못 따라가는 걸 시간 아깝게 보고 있어야 한다니. 머리가 절로 아팠다.
"오, 이졸데!!! 나의 이졸데!!! 그 아름다운 금발이 눈에 어른거리는구려!!!!"
아롈은 식겁해서 무대를 살폈다. 설마 이 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던가? 처음 서곡을 연주할 때부터 귀를 막고픈 충동에 시달리며 혼을 빼고 보다보니 여태껏 주인공의 이름도 몰랐던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공연-발레, 오페라, 가극 중 고민하다가 결국 단어를 결정하지 못 했다-이 정말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맞다면 추측건대 트리스탄이 사랑의 묘약을 먹고 이미 자신의 숙부와 혼인한 금발의 이졸데에게 반해서 괴로워하는 부분 같았다.
아롈은 이 유명한 이야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내용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우아한 문장과 그들이 얽혀서 이루는 운율의 아름다움만은 인정하는 바였다. 이 극을 이렇게까지 망칠 수 있다니. 그냥 원래대로 쓸 것이지 왜 각색을 한 걸까. 원 극을 그대로 가져다가 가사를 썼으면 등장인물들의 말도 안 되는 심리에 빈정거리는 마음이 들망정 앉아있는 자체가 힘들지는 않았으리라. 진심으로 극장이 아까웠다.
더 통탄스러운 것은 이 극의 한심함을 토로하려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멘 공작 루이 앙투안은 상륙하자마자 평기사인 척 도망가 버렸고 필리프와 미셸은 숙녀들만의 시간 운운하는 공작부인에게 내쫓겨 극장 안에는 아롈과 공작부인, 그리고 공작부인의 시녀들뿐이었다. 그리고 공작부인은 상체까지 앞으로 내밀고 흥미롭게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건가. 아롈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노래가 뚝 멈췄다.
아롈은 눈썹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관객이 언짢은 태도를 보인다고 극을 그만두다니. 작센 국왕의 사촌 형수인 공작부인은 그들을 질책할 생각은 하지 않고 칠면조 같은 눈으로 아롈을 쳐다보았다.
"비전하, 어디 불편하신지."
사실 어디가 불편한지 일일이 대려면 한도 끝도 없었다. 배에서야 배니까 참았지만서도 여기는 어디까지나 육지에 뿌리박고 있는 성 아닌가? 그것도 국왕의 사촌이 다스리는 성인데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이 마음에 안 들 수가 있을까.
일단 아롈의 방바닥에 깔린 양탄자부터가 싸구려였다. 언뜻 보기엔 괜찮아보였던 가구도 알고보니 비싼 흑단나무는 눈에 보이는 곳에만 대놓고 안쪽에는 다른 목재를 써서 조화가 전혀 되지 않았다. 침대의 천개를 만든 비단 역시 그리 질이 좋지 않았고, 의자에 덧댄 천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실내 공간도 어쩐지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조화롭지 않았다.
이 쪽에서 미리 준비한 옷들도 하나같이 구질구질했다. 아롈이 나이치고는 키가 크다보니 기장이 맞지 않는 거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치맛단에 실밥이 풀려있는 건 너무하지 않나. 할 수 없이 가져온 옷을 다시 입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시녀들의 무례함에 비하면 정말 하찮은 일이었다. 아롈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신이 나서 데리고 온 시녀를 돌려보냈다. 국외로 시집가는 여인의 관례 상 시녀를 중간에 떼어놓아야 했던 것이다. 어차피 왕실의 성만 들르면서 이동할 예정인데다 거기서 시녀를 빌리면 되리라 가볍게 생각했다.
아롈은 이곳에서 지낸 지 딱 세 시간 만에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판단력과 생각이 없었는지 후회했다.
공작부인이 보내준 시녀들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기본이 안 되어 있었다. 일일이 잘못을 지적해야 할 만큼 잘못된 시중을 받아본 역사가 거의 없는 아롈이 느끼기에 시녀들의 행동은 거의 인재지변에 가까웠다.
도대체 들어올 때와 나갈 때는 항상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해라, 걸을 때 소리를 내지 마라, 경어를 제대로 붙여라, 식기를 조심스레 내려놓아라, 다리를 떨지 마라, 손을 떨지 마라, 윗사람 앞에서는 하품을 하지 마라, 윗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마라 같은 것들이 지적씩이나 해야 되는 것이란 말인가.
하는 짓 하나하나가 머리카락 한 올까지 거슬리다보니 신경이 손끝까지 곤두섰다. 처음에는 자신을 모욕하려는 의도인가 진지하게 생각했으나 원 주인인 공작부인 앞에서도 똑같이 행동하고, 공작부인의 행동도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것에서 어이없음과 한심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럼에도 아롈이 이 성을 떠나지 않는 것은 오로지 혼수품 때문이었다. 아롈의 혼수는 죄다 최신 유행의 산지라는 로렌의 황도에서 제작했기 때문에 그 사치스러운 혼수와 그를 지킬 행렬이 이동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본디 그들이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으나 용이 쓸데없는 수작을 부린 바람에 아롈이 일주일 먼저 도착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길이 엇갈렸다가는 다음 성에서 또 이 짓을 하며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더해 공작부인이 목숨을 걸고 잡았기 때문에 아롈은 이 성에 눌러앉았다.
그리고 딱 이틀 만에 정신적으로 나가 떨어졌다. 공연 한 편 보는 것이 이렇게 피곤한 일이었던가.
"아니오. 아직 여독이 덜 풀린 듯하오."
공작부인은 동화속의 마음씨 좋은 시골 할머니처럼 푸드덕거리며 아롈을 방으로 돌려보냈고, 아롈은 저녁 식사를 할 기분이 아니니 간단한 식사를 방으로 보내라는 말과 함께 돌아섰다. 그리고 방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나서 시녀가 가져온 식사를 보곤 폭발해버렸다.
"이게 무어냐."
"저, 저녁입니다, 전하."
커다란 접시에는 큼지막한 소시지 세 개와 양배추 절임, 그리고 전채로 보이는 풀떼기가 한꺼번에 담겨있었다. 후식과 음료는 보이지도 않았다. 뒷목이 뻣뻣해졌다.
"지금 나보고 이걸 먹으란 말이냐?"
냄새나는 돼지고기를 후추도 없이, 그것도 갈아서 내놓다니. 손님에게 내놓을 식사는 절대 아니었다.
"전하. 공작부인께서 오늘은 특별히 소시지를 내라고 분부하셔서. 그래서."
"가지고 나가라."
"예?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죄송합니다. 나가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아니 쉬소서."
시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접시를 나눠들고 도망쳤다. 앉아서 쭉 둘러보니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아 아침에 마신 물잔이 그대로 탁자에 놓여있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해 한숨을 길게 내쉬는데 머릿속에 키득거리는 웃음이 부서졌다.
[그냥 대충 먹지 그래?]
"닥쳐라."
어째 말이 점점 험해지는 것 같았다. 목걸이가 불만스레 반짝반짝 몸을 깜빡였다. 턱 밑에서 그러는 꼴이 정신 사나워서 목걸이를 풀어내자, 목소리는 한층 더 신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요즘 세상엔 참 재미있는 게 많아졌단 말이야. 말도 많이 달라졌지만 계집애들이 입고 다니는 옷 모양도 그렇고 신기한 소리를 내는 악기도 그렇고. 아까 그것처럼 노래를 부르면서 춤추는 게 요즘은 흔하니? 옛날에는 혼자 나와서 일인극을 하는 게 다였거든. 거기다 음식은 또 얼마나 맛 없는 게 많았는지.]
처음에 위엄있는 척 허세를 부리던 말투는 어디에 고이 접어 두었는지 체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 그런데 목말라. 나 소금물 좀 타주렴.]
"내가 네 시녀라도 되는 줄 아나."
[타주기 싫으면 말아. 나는 피도 좋으니까. 아까 그 여자애 귀엽던데. 네가 혼낼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려서 괴롭혀보고 싶어. 그렇게 야들야들한 애들 몸 속에 흐르는 피는 좋은 냄새가 나.]
신나서 나불거리는 입을 꿰매버릴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아롈은 준비되어 있는 물을 세공이 변변찮은 유리잔에 따르고, 따로 가져오라 한 소금 조각을 부숴 우수수 물에 떨어트렸다. 소금이 잘 녹도록 스푼으로 두세 번 젓고 그 물에 목걸이를 퐁당 담그자 금으로 된 테두리에서 파란 보석이 스르륵 빠져나왔다.
보석이 둥글게 말린 몸을 쭉 폈다. 긴 목과 네 개의 지느러미와 뱀 같은 꼬리가 튀어나왔다.
[아웅!!!!!!!! 이제 좀 살겠네!]
엄지손톱만한 해룡은 목과 지느러미를 쭉쭉 펴고는 지느러미를 바동거렸다. 입을 쩍 벌리고 기지개를 펴는 모습은 외양만 보면 꽤 귀여웠다. 하지만 속에 든 내용물을 아는 아롈은 도저히 그 모양새에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금세 캑캑거리며 물을 뱉어냈다.
[짜! 너무 짜!]
"그럼 소금이 짜지 달겠나?"
용은 허겁지겁 수면으로 올라와 헛구역질을 해댔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청아한 목소리가 쨍알쨍알 울렸다.
[고작 물에 소금을 타는 건데 양도 제대로 못 맞추니? 소금이 짠 것도 정도가 있지! 이러면 삼투압 때문에 체액이 다 빠져나간단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용의 몸에서는 푸른 물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잔을 들어 살짝 흔들자 색이 훨씬 짙어졌다. 용은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간 쪼글쪼글해질 게 틀림없어!]
"왠지 오늘따라 용 소금절임을 저녁으로 먹고 싶은데?"
아롈은 빈정대면서도 물을 잔이 넘치도록 부어주었다. 이제 좀 만족스러운지 용은 손가락 두 마디만큼 덩치를 키우고는 신나게 돌아다녔다.
이 성에서 지낸 사흘 동안 용은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첫 날 그냥 물에 담갔더니 물이 너무 밍밍해서 몸이 불어 터지겠다는 둥, 물에 석회가 너무 많다는 둥, 사람을 짜증나게 해서 소금을 타줬더니만 이건 산에서 난 소금이라 차마 입에 넣을 수 없는 맛이라고 기겁을 했다. 정말 꾹꾹 참으며 바다 소금을 구해다 주자 또 농도를 가지고 이 모양이다. 좀 작작할 것이지.
엷은 파란색을 띠던 물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색으로 변해있었다. 아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좁은 잔의 위로 아래로 움직이는 용의 허리에는 희미하게 흰 가로줄이 있었다. 마치 허리띠 같은.
-내 이름은 릴레벨트다.
그 때의 허망함이 지금도 생생했다. 릴레벨트 해의 해룡 릴레벨트. 애초에 그 바다의 이름이 이 해룡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그제야 파프너가 옛날에 지껄였던 말이 생각났다. 용의 이름에서 이름을 따온 산맥이나 바다도 많다고. 그 말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뜰만큼 원통했다. 릴레벨트는 속도 모르고 적당히 벨타라고 부르면 된다 던진 다음 흰 배를 까뒤집고 둥둥 떠다녔다. 용이라는 족속들은 전부 애칭을 싫어하나보다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파피라고 이름을 줄여 부르는 걸 싫어했던 용.
요즘 그의 생각이 많아졌다. 황도 시절 흐릿한 기억들 속에서 그 흰 용에 대한 것이 의식 위로 떠오르면 고개를 세차게 젓곤 했다. 그렇게 간신히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이 오래간만에 다시 읽은 책처럼 먼지를 털어내고 선명한 제 빛깔을 되찾는 건 각오한 것보다도 훨씬 서글펐다.
-파피.
-파피랑 자면 안 돼?
-파피, 파피, 파피, 파피, 파피, 꺄악!
-파피가 너무해!
어린 목소리가 끊임없이 앵앵거렸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잘 했다고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말을 잘 탔다거나, 자수를 예쁘게 놓는 데에 성공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오로지 아롈 혼자 견뎌야 했다.
고개를 돌리자 벨타와 눈이 마주쳤다. 샛노란 눈이었다.
"목욕을 할 예정이니 들어가 있거라."
아롈은 시녀를 부르는 줄을 세 번 당기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그런데 좀 한 번에 부르지 왜 내보냈다가 불러냈다 하는 거야? 애들 귀찮게.]
"그게 그네들의 일 아니냐."
벨타는 다시 몸을 둥글게 말고 목걸이 틀 안에 들어갔다. 아롈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할 수 있는 아주아주 간단한 마법이라고 했다.
잠시 기다리자 시녀들이 들어와 곁방으로 아롈을 이끌었다. 이 빌어먹을 시골 성에는 목욕탕도 없었다. 원래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는 건 즐기는 편이었지만 꽃잎 한 장 떠 있지 않는 나무통을 보고 오히려 두통이 도졌다. 입욕제가 준비되어있지 않아, 보들보들하기는커녕 뽀득뽀득 소리까지 나는 맹물로 목욕을 하는 건 썩 좋은 경험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시중 역시 세심한 면이라곤 눈을 뜨고 찾아볼 수 없었다. 아롈은 몸을 오래 담글 마음은 접고 금방 부축을 받아 나왔다.
"너는 왜 그리 손이 거칠고 조심성이 없느냐."
머리를 말리는 손길이 거칠어 딱 한 마디 지적한 순간 벨타가 맛있겠다고 군침을 흘렸던 계집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참 못 볼 꼴을 많이 본다 싶었다. 다른 아이들의 손도 딱 멈춰 있었다. 돌이라도 된 모양이지. 아롈은 검지로 미간을 눌렀다.
"무얼 잘했다고 눈물바람이냐."
"송구합니다."
"필요없다. 그냥 다른 아이를 불러오너라."
"저기."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시녀가 쭈뼛쭈뼛 나섰다. 공작부인의 시녀라면 이 근방에서는 내로라하는 집안의 여식들일 텐데 어찌 이렇게 예절의 기본이 안 되어 있을까. 곤두섰던 신경은 눈초리에 담겨 고스란히 시녀의 얼굴로 쏟아졌다.
"내가 네게 입을 열어도 된다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일단 말이나 해보거라."
"송구합니다, 전하. 저기, 저희 성에 이제 남은 시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작부인께서는 원래 그리 시녀를 많이 거스리지 않으십니다. 전하께서 내치신 아이들을 제외하면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걸 손님이 생각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다던가.
"아닙니다. 혹여 조금 지체해도 괜찮으시다면 빨리 다른 아이를 불러오겠습니다."
"다녀오너라."
아, 또 무릎을 안 꿇고 나가지. 거기다 전부 우르르 나가버리면 어쩌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아롈은 방구석에 알몸으로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축축하게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워낙에 긴 머리라 잘 말리고 자지 않으면 다음날 자국이 남는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흰 어깨와 앙가슴 위에 미끄러져 내렸다. 아, 기분 나빠라.
끈기 있게 시간을 보내자 노크 소리와 함께 나이든 처녀 한 명이 들어왔다.
"찾으셨사옵니까?"
아롈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전하를 모시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옵나이다. 소녀는 앤이라고 하옵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태는 지금까지의 어떤 시녀들보다도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