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금발과 흰 손 (3)
파블 1세의 꿈을 꾸었다.
아롈은 유년기 이후 파블 1세를 아버지라고 부르길 포기했다. 사랑도, 지위도, 명예도, 아무 것도 택하지 못 한 졸렬한 사람이었다.
정부에게는 떳떳함을 주지 못 했고, 아내에게는 당당함을 주지 못 했다. 두 여자 모두를 모욕한 것이다. 아니. 마지막에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정부 옐리자베타를 황후로 올리고, 그 아들인 표트르를 인지하고 안나 콘스탄티노브나 공녀와 결혼시켜 체사레비치로 삼으려 했다. 정교회는 사촌간의 결혼은 금하지만 육촌간의 결혼은 허용하므로.
황제가 되니 모든 것을 가진 양 여겼을까. 황제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자리인데. 정확히는 사랑에 떳떳함이라는 관을 씌우기 어려운 자리인데.
결국 그가 받은 것은 차가운 칼날이었다. 아롈이 소식을 듣고 이를 갈며 정권 교체를 계획하는 동안 옐레나 여제는 냉정하게, 행동했다. 파블 1세의 목이 떨어졌고 여제-당시 황후였던 그녀가 고용한 군인들이 온 궁을 장악했다.
세상일에 만약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지만 시체처럼 갇혀있는 동안 아롈은 만약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뇌곤 했다. 만약 아버지가 어머니와 조금만 사이가 좋았더라면? 만약 아버지가 그런 헛소리를 내뱉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들이 행복한 부부였더라면.
그러나 그 가정은 아버지의 잘린 목처럼 단호하게 찢겨나갔다. 벨타가 깨우기 직전, 아롈은 어머니의 손에 들린 아버지의 목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롈의 시녀들을 죄다 끌어내서 어머니에게 협조한 두 귀족의 딸, 리디야 스미르노바와 모스크바 공녀만을 빼놓고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피를 뿌리며 쓰러진 여인들 중에는 어린 시절을 애증으로 함께 한 예브게니아도 있었다. 그 뒤 아롈을 끌고 옥좌 앞에 무릎 꿇린 다음 인사를 받아냈다.
꿈을 꾸면 그들이 찾아온다. 왜 아롈을 모셨다는 이유만으로 시집도 가지 못 했던 꽃다운 처녀들이 죽어야 했는지 따진다. 그들의 부모까지 찾아와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한다. 심장에 구멍이 나 죽었으니 아롈의 심장을 내놓으라고 손을 뻗고, 목이 잘려 죽었으니 목을 달라 달려들고, 타죽었으니 가죽을 벗겨달라고 발을 구른다.
아롈은 종을 당겨 시녀를 불렀다. 죽은 사람은 이제 어쩔 수 없잖은가.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겠지.
앤의 시중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행동에 간혹 촌뜨기 티가 묻어나긴 했으나 그녀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굴었고, 무엇보다도 일일이 지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아롈을 감동시켰다.
아롈은 금세 마음이 평온해져 차를 홀짝이며 책장을 펼쳤다. 하지만 한 줄 읽고 막히고, 한 줄 읽고 막히니 마음은 금세 어지러워졌다.
아롈은 황도에 돌아온 다음부터 맹렬히 공부한 덕에 북부, 중부, 서부의 말은 현지 사람처럼 쓰고 읽고 말할 수 있었고 동부의 말도 간단한 회화는 할 줄 알았지만 남부 갈리아 어만은 서툴렀다. 왜 그런 철자에서 그런 발음이 나오는지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던 데다 어차피 그 쪽 사람은 만날 일이 없으리라 생각해 공부를 소홀히 했다. 세상 일은 정말 모를 일이다. 어엿한 체사레브나였던 자신이 이렇게 남쪽에 시집갈 줄 누가 알았을까.
입가에 와닿는 차가 따뜻해졌다. 거기다 적당히 달기까지 한 것이 어느 새 잔을 갈고 설탕을 탄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좋구나."
툭 던진 말에 앤은 황송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롈은 책갈피도 끼우지 않고 책을 덮었다.
"전하. 다른 책을 올릴까요?"
"아니다. 마음이 심란하니 책장도 넘어가질 않는구나."
사실은 그냥 실력이 없어서였다. 아롈이 읽던 책은 약 백 년 전의 남부 학자가 저술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세상 어느 것도 참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계단을 오르듯 작은 진리로부터 큰 진리를 이끌어낼 것,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도록 정교한 검토를 계속 반복할 것. 심지어 자신의 존재마저 의심할 것.
글줄을 짚어가며 이러한 논리를 따라가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유희였고 아롈은 문장을 대충 외울 정도로 이 책을 읽었다. 문제는 아롈이 읽었던 책은 중부어 번역본이었고 지금 읽는 것은 원서라는 점이었다.
아롈은 미간을 문질러 머릿속에서 춤추는 단어들을 비우려 애쓰며 잔을 들었다.
"네 잔이 비었구나."
앤은 제 잔에도 차를 따르고는 아롈이 놓은 책을 단정하게 다시 놓아두었다. 그러면서 그 입술이 잠깐 달싹였다.
"Discours de la méthode."
"남부 말을 할 줄 아느냐?"
앤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잠시 로렌에서 자란 적이 있는지라 짧은 재주로 거만하게 굴었사옵니다. 그리 능하지는 않사옵니다."
"지나치게 저자세구나. 원서로 읽어본 적이 있느냐?"
"조모님께서 가르쳐주셔서 한 번."
아롈은 홀짝홀짝 차를 들이켰다.
"나는 중부 말 번역본, 북부 말 번역본으로 읽었다. 페란토도 들춰봤는데 역자가 누구인지 질이 참 형편없더구나."
"과연 영명하시옵니다."
"아부할 것 없다. 남부 말에는 서툴러 내용을 외울 정도로 읽었던 책도 제대로 보지 못 하지 않느냐."
앤은 말을 아꼈다. 대신 아롈의 빈 잔에 새 차를 따라주었다. 아롈은 손수 각설탕을 세 개 넣고 스푼으로 휘저었다. 예쁜 홍차가 소용돌이쳤다.
"어디어디 말을 할 줄 아느냐?"
"남부와 북부, 동부 말을 아주 짧게 할 줄 아옵니다."
아롈은 지금 앤과 중부 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네 가지인가.
"северная часть(북부)?"
"Потому Моя бабушка с севера, Ваше высочество.(제 조모께서 북부 출신이시기 때문이옵니다. 전하.)"
"억양을 보니 북부 말이 그리 짧지도 않구나. 네 조모가 뉘냐?"
HIH 코시카의 여대공이자 HIH 로렌의 태자비인 아롈은 폐하라 불리는 자, 즉 한 나라의 국왕 이상이 아니면 원칙상 누구에게나 하대할 수 있었으므로 편하게 물었다.
앤은 눈치를 한참이나 보다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소녀의 가문이 전하의 귀를 더럽힐까 염려될 정도로 한미한 가문이온지라."
"그건 내가 정하는 것이다. 말해보거라."
"전하."
"누가 보면 내가 목을 치라고 한 줄 알겠구나."
아까까지의 담담한 태도와 달리 입술을 짓씹던 그녀는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그리고 답을 들은 아롈은 헛웃음을 짓다가 물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앤은 바닥에 내려앉아 무릎을 꿇었다.
"죽여주시옵소서."
"정말 목을 치라 하면 울며불며 애원할 주제에 그리 쉽게 죽여 달라는 말을 하지 말거라. 어디냐고 물었다."
"지금 공작부인과 함께 계실 것이옵니다."
아롈은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공작부인의 방에 갔더니 지금 응접실에 있다 했다. 응접실에 갔더니 이 응접실이 아니라 했다. 성을 거의 한 바퀴 다 돌아 그녀가 있다는 응접실에 다다르자 웬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님이 계시다며 아롈을 막아섰다. 어디서 감히. 아롈은 짜증스레 눈을 치떴다.
"비키라고 했잖느냐! 한 사흘 가두고 굶겨야 말을 알아듣겠느냐?"
"들어오라 하렴."
어쩐지 나른한 기운이 있는 그 목소리는 분명히 공작부인의 것이 아니었다. 아롈은 문이 열리는 것을 채 기다리지 못 해 발을 동동 구르다 열리자마자 뛰어들었다.
그리고 지금껏 찾던 공작부인의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예의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거침없는 행동과 말투.
"장난이 심하십니다."
아롈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이내 호칭을 결정했다.
"마리야 이바노브나 여공."
파블 1세의 누나이니 분명 예순 가까이 되었을 터인데 하나도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흔히 북쪽 여인들이 그렇듯 살이 쪘지만 허리가 전혀 굽지 않아 오히려 풍채가 좋아 보였다. 걸치고 있는 보석 하나 없어도 그녀는 의아할 정도로 당당했다.
하긴, 혈관 속에 흐르는 새파란 피야말로 최고의 장신구일 텐데 다른 것이 따로 필요 있으랴.
마리야 이바노브나 키예나는 푸른 눈을 둥글게 떴다. 안 그래도 큰 눈이 꼭 그녀의 오촌 조카이자 아롈의 육촌인 안나 콘스탄티노브나를 떠올리게 했다. 핏줄이라 이건가.
"여공?"
"여공께서 떠나신 뒤 선황이신 이반 3세 폐하께서는 여공의 여대공 작위와 계승권을 박탈하고 남기고 간 성 소피야 훈장의 별을 회수하셨습니다. 다만 여대공 작위 이외에 다른 작위는 박탈하지 않으셨으므로 개중 가장 높은 여공으로 불러드렸을 따름입니다."
황가에는 천한 핏줄을 애호하는 습성이라도 스며있는지 한 대에 하나 이상은 꼭 신랑이 신부의 왼손을 잡고 결혼하는 이가 나왔다. 아롈의 대에는 알렉산드르 대공이 그랬고, 그 윗대에는 마리야 여대공이 그랬고, 그 윗대에는 블라디미르 대공이 그랬다.
마리야 여대공은 이반 3세와 소피야 황후의 장녀였다. 차기 황제인 체사레브나였던 그녀는 궁정의 젊은 후작과 야반도주를 한 걸로 유명했다. 그녀가 도망치지 않고 제대로 결혼해서 계승권을 주장했더라면 아롈은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내 이름 뒤에 이런저런 작위들이 줄줄 따라붙던 시절이 있긴 했지. 하지만 나는 그런 설명이 듣고 싶었던 게 아니란다. 왜 고모라고 불러주지 않는 거니?"
"그래야만 합니까?"
"나는 네 아버지의 누나지.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르지 않던가?"
"저는 언급하신 관계 때문에 여공께서 여대공인 제게 하대를 하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모자랍니까?"
아롈은 그녀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 황도의 초상화는 당연히 모두 치워버려 볼 수 없었지만 '회랑'만은 예외였다. '회랑'은 황실의 인물이 그 곳에 들어가는 순간의 얼굴을 간직한다. 아롈이 본 젋은 시절의 마리야 여대공은 검은 머리카락에 장대한 기골을 가진 전형적인 북쪽 여인이었다.
마리야 여공은 키득키득 웃었다.
"까다로운 아이로구나. 그래, 고모 소리 듣는 건 일단 포기하마. 앉아라."
"필요 없습니다. 여쭐 것이 많습니다만 먼저 여공의 딸을 말없이 제 시중을 들도록 보내신 저의를 듣고 싶을 따름입니다."
"내 딸이라니?"
"앤 폰 레르헨펠트 말씀입니다."
"그 아이는 내 손녀란다. 그만한 아이를 딸로 두기엔 내가 좀 나이 들었지."
짝짝.
박수를 쳐서 분위기를 환기한 것은 다름 아닌 작센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아롈을 자신의 자리에 앉히고 자기는 더 낮은 자리로 내려앉았다.
"비전하. 저는 전하께 사실을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옵고, 다만 전하께서 마음 상하실까 두려워 고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공작부인이 내민 찻잔을 받는 마리야 여공의 손이 눈에 밟혔다. 황도를 나가서 어찌나 궁상맞게 살았는지 손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매끈하던 어머니의 손과는 천지차이였다. 그 따뜻하던 곰발바닥도 망가졌을까. 심사가 뒤틀렸다. 저렇게 사람 같지도 않게 살려면 왜 나갔나.
"공작부인이 불렀소?"
"엘레노아와는 상관없는 일이란다. 내가 너를 만나려 여기에 왔고 엘레노아는 손님대접을 해주고 있었을 뿐이지."
"그러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앤의 입에서 마리야 이바노브나 키예나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소름이 오싹 끼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여자가 내 옆에 붙어 있나.
마리야 여대공과 같이 도망친 남자는 례비제프 후작가의 사람이었다. 한 때 중부의 마르크그라프를 지냈던 그 가문은 표트르 대제 때 코시카에 굴복해서 북부에 편입되었다. 겨우 후작. 체사레브나의 남편으로 어울리는 이는 아니었다. 믿었던 장녀의 행동에 진노한 이반 3세는 후작의 작위를 거두고 재산까지 전부 몰수해 그 가문의 사람들을 내쫓았다. 그의 손녀라고? 왜 하필 내게 붙어서?
"앤을 네 미뇽으로 삼아 달라 청탁을 하러 왔단다."
아롈은 대놓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미뇽이라니.
"이제 남쪽에 시집가니까 하나쯤 있어도 좋잖니."
"재고할 가치가 없는 언사입니다, 여공."
미뇽은 궁정연애의 산물로 남자는 Mignon이라 하고 여자는 Mignonne이라고 한다. 철자와 발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남쪽에서 나온 제도인데 군주와 그 신하, 혹은 귀부인과 그 시녀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다. 둘은 항상 같이 다니며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심지어 같은 옷을 지어 입기도 한다. 그 사이가 얼마나 깊은지 수많은 군주들이 자신의 미뇽과 동성연애 관계를 맺었다고 의심받았다.
"왜 말이 안 되니? 너도 봤지만 꽤 괜찮은 애란다."
"용이 활개치던 시대에나 유행하던 제도를 끌고오는 것도 모자라 무작의 여인을 태자비의 정식 시녀로 들이란 말씀입니까."
들일 수 있다고 해도 문제였다. 원래 타국으로 시집가는 왕녀는 시녀를 죄 놓고 가거나 단 한 명만을 데려가는 것이 관례였다. 아롈은 이미 시녀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 통보한 뒤였다.
"앤은 백작녀란다. 작센의 빌헬름이 내 아들에게 작위를 내려주었지."
작센의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옐리자베타 여대공의 아들로, 옐리자베타 여대공은 마리야 여대공의 여동생이자 파블 1세의 누나였다. 한 나라의 군주가 귀천상혼해서 내쫓긴 친척에게 작위를 내려주는 것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아롈은 미간을 문지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백작녀가 아니라 대공녀라 해도 저는 여공의 손녀를 제 시녀로 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 연유는 스스로 아시리라 믿습니다."
마리야 여공은 대륙 모든 나라 중 가장 직설적이라는 북쪽에서도 모욕적으로 느낄만한 아롈의 화법에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찻잔을 들어 평온하게 한 모금, 두 모금. 야반도주를 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예법은 잊어버리지 않은 듯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엘레노아. 잠시 나가주겠어요?"
"그러지요."
공작부인은 아롈에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총총히 돌려 나갔다. 파란 눈이 정갈한 손수건처럼 접혔다.
"용을 데리고 있다며?"
품안에서 고물거리는 갓난아기는 누가 봐도 그 아비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옐레나 1세와 파블 1세 사이의 자식들은 극단적으로 어미를 닮든가, 혹은 아비를 닮든가, 것도 아니면 아예 선조를 닮아버리기 일쑤였다. 피조차 섞일 수 없던 냉랭한 사이를 태아들도 알았나 싶어 씁쓸했던 것도 다 옛날 일, 지금은 미하일의 얼굴이 친탁을 했다는 데에 안도한다.
여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할 나이에 새로 부른 배를 끌어안고 끝까지 고민했었다. 막내딸인 옐레나를 낳고 유산을 한 번 한 다음 십오 년 가까이 여제의 몸은 아이를 밸 줄 몰랐건만 새 생명이 들어섰다. 또 유산이나 사산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형아일지도 모른다. 혹은 딸일지도 모른다.
이 아이 덕에 얻은 유예기간을 이용해, 여제는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지고 따졌다. 한없는 잔가지로 갈라진 수형도를 따라 서성였다. 다행히도 아이는 파블 1세를 빼다 박은 건강한 아들이었다.
"그렇게 아이를 많이 낳았는데 남은 것은 너뿐이로구나."
건강하지는 않아도 된다. 다만 형처럼 허망하게 죽어버리거나, 다른 형처럼 신분 낮은 여자와 도망쳐버리거나, 누나처럼 멀쩡하게 자라버리면 안 된단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네 동생을 낳을 수 없으니까.
"오래 살란 말은 하지 않겠다. 내가 죽을 때까지만 살아있거라."
옐레나의 계승권이 사라진 이상 여제와 미하일이 죽으면 황제의 관이 땅바닥에 던져진다. 옐리자베타 여대공의 자식들과 콘스탄틴 대공이 머리에 써보겠다고 발버둥을 치겠지. 어쩌면 폐주의 후손들도 탑의 유폐에서 풀려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이미 죽은 다음일 텐데.
여제는 아이를 안은 채 찬찬히 회랑을 거닐었다. 지금 거닐고 있는 곳은 여제의 자식들의 초상화가 보였다. 초상화가 두세 장 있는 아이도 있고 수십 수백 장이 있는 아이도 있었다.
옐레나 여제는 이반 파블로비치의 초상화 앞에 섰다. 그는 여제를 빼다 박은 자식이었다. 여제의 금발과 녹안을 물려받은 그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내로 자라났다. 그 아이와 함께 있으면 정말로 편했다. 그 아들이 독을 먹지만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반대로 이반과 같이 그려진 알렉산드르는 가장 남편을 많이 닮은 자식이었다. 결국 딱 그만큼 어리석었다.
그리고 옐레나 파블로브나. 그 아이의 마지막 얼굴은 울 것 같은 눈으로 여제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 그림은 여제가 보위에 오르던 날 그 아이가 마지막 발악으로 회랑에 들어왔을 때 그려졌다. 여제는 아이를 어르며 자고 있는 아들에게 속삭였다.
"이 아이가 네 누나란다."
옐레나는 낳을 때부터 사람을 고생시켰다. 진통을 사흘 내내 했는데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 몸의 핏줄이 가닥가닥 터지는 것이 아닐까 싶은 통증이 끝나고 세상에 나온 아이는 정상보다도 훨씬 작고 약했다. 그 애는 죽을 게 뻔해 보이는 주제에 끊임없이 울며 보챘다. 우는 소리가 우렁차기라도 했으면 말을 하지 않겠는데 제대로 울지도 못 하고 끙끙대기만 했다. 차라리 죽어 나왔으면 마음 편하게 끄집어냈을 것을 그것도 아니었다.
다른 자식들을 낳았을 때도 빨갛고 쪼글쪼글한 얼굴을 시큰둥하게 바라보곤 했지만 이번엔 정말 특별히 짜증스러웠다. 빽빽거리는 울음소리를 듣다가 어디에든 갖다 버리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름을 옐레나라고 지은 것은 웬만큼 붙일 만한 이름이 떨어지기도 했거니와 죽은 소피야 황후의 유언이 있었기 떄문이었다. 다음 딸은 옐레나로 지으라고. 하필 이렇게 약한 애가 나온 것이 고인의 저주 때문인 듯 들렸다. 관례를 핑계 삼아 죽으려면 북쪽에서 죽으라고 보내놨더니만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다. 점점 크면서 자신을 닮아가는 얼굴을 볼 때마다 아이가 젊음을 빨아먹는 기생충 같았다.
"아주 멍청한 아이였지."
아이는 피가 붉은 사람처럼 쓸데없이 들러붙었다. 품위라고는 없이. 항상 별 일도 없으면서 방 근처 복도에서 알짱거리며 뭔가를 바라는 눈빛으로 빤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과자라도 쥐어주어 쫓아내도 거짓말처럼 다시 눈에 채였다. 볼 때마다 죽은 이반이 아쉬웠다. 겉가죽을 빼닮은 만큼 속도 닮았으면 오죽 좋을까.
"너를 죽이질 못 했거든."
계승권을 박탈하기 전의 일이다. 연금당해 있던 딸에게 아기의 백일을 핑계로 미하일을 만나는 것을 허락한 일이 있었다. 딱 한 번이었다. 딸은 능하지는 못 해도 검을 다룰 줄 알았다. 부러 놓아둔 페이퍼 나이프로 찌르든가, 정 마음에 걸리면 베개로 얼굴을 눌러버려도 금방 죽었으리라. 미하일은 아무 힘도 없는 아기였다.
그 때 미하일을 죽이고 자신의 정당한 계승권을 주장했더라면 여제는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딸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 미하일이 지닌 정당성은 옐레나도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딸은 실패했다. 아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직속 시녀인 레르몬토프 부인의 말에 의하면 옐레나는 잠든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아기의 가슴에 성호를 긋고 돌아섰다고 했다. 황위를 위해 어미든 동생이든 죽일 기백조차 없는 것이 무슨 황제를 하겠다고.
여제는 마지막 초상화 앞으로 마지막 발걸음을 뗐다. 아기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그 자는 모습이 회랑의 맨 마지막 액자에 선명하게 베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로써 미하일은 누가 뭐라 해도 토를 달 수 없는 체사레비치였다. 목적을 달성한 여제는 유유히 회랑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