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여름 눈송이


5. 붉은 올가미, 푸른 가위 (4)


 이토록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일출은 채 끝나지 않았다.

자살.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하지는 않겠다. 황위를 빼앗기고 유폐 당했을 때 아롈은 자살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황제가 되면 알렉산드르를 불러오고 싶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 오라비를 데려다가 면박도 좀 주고, 나탈리야에게도 쓴 소리 몇 마디 한 다음 작위를 내려주려고 했다.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성별도 모를 조카의 볼도 꽉 꼬집어 줄 거라고 힘들 때마다 다짐했다.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던 그 때, 그 작은 방에 갇혀서, 아롈은 차라리 죽어버릴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 못 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흰 용과 키워준 유모는 친절한 가정교사였다. 죽음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손수 가르쳐주었으니.

죽음은 볼을 에는 차가운 바람,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 우적우적 섬뜩한 소리, 유모가 목을 조르는 찬 손, 새카맣게 타버린 몸뚱이였다.

모든 이는 태어난 이상 언젠가 죽는다는 말이 가장 싫었다. 신분고하에 상관 없이 죽음과 춤을 추다가 저승으로 끌려가야 한다는 것이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래서 살고 싶었다.

혀를 꾹 물어 잘라버리고 싶을 만큼의 치욕을 참고 어머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간교한 혓바닥을 굴려 여제 폐하라고 불렀다. 나이가 열두 살이나 많은 신랑의 재취로 들어가려 달려가고 있다. 명예와 긍지를 굽혀 가며 릴레벨트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래도 살아있어서, 지금 숨을 쉬고 있어서 기쁘다고 생각하는 아롈은 근본적으로 마담 르와이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만 가지 이유를 갖다 붙이고 아롈이 그것을 읽는다고 해도 아롈의 동의와 동정과 이해를 이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습관성의, 장난 같은 자살이라니. 아롈은 그녀를 경멸했다.

아롈은 수도원의 대문을 넘어 아름답다고 말하기에는 붉은 기가 영 미약한 아침놀을 바라보았다. 올라올 때 수도원 쪽에서 해가 졌으니 수도원의 문을 박차고 나온 지금 평원에 아침 해가 뜨는 것이 이치상 맞았다. 저녁놀이 붉었고 아침놀이 흐릿한 걸 보니 오늘은 날씨가 맑겠구나.

"안녕하세요?"

미끄러지는 듯한 갈리아 어. 아롈은 잠시 그 말이 자신에게 건네진 건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 남쪽 땅에 들어와서 자신보다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벨타는 용이니 제외하고. 검은 머리를 한 가닥으로 단정히 묶은 남자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아끌고 있었다. 안장과 등자만 봐도 상당한 고급품이었고, 말은 한 눈에 봐도 가격이 꽤 나가는 준마였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채 밝지 않은 남색과 분홍색이 뒤엉킨 새벽하늘.

"세르."

아롈은 고개를 돌렸다. 앙투안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호위를 하는 자로서 그는 황제의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대신 그는 검을 검집 째로 들어 올리고 손목을 꺾어 천천히 내리 휘둘렀다. 절도 있는 동작.

남자는 자연스럽게 고개만 까닥여 인사를 받았다. 뭐야. 그는 웃어 보이더니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혼란스러웠다.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데? 저 사람도 무슨 마법사라도 되나? 왜 여기 있지? 저 사람은 로렌의 황도에 얌전히 있어야 하지 않나? 외아들이라며?

알렉산드르가 황실 계보에서 삭제된 뒤 외동딸이 된 아롈은 혼행길에 오르기 전까지 황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 했다. 아롈이 무슨 일이라도 당했다간 방계 혈족으로 황통이 넘어갈 테니까. 정말 재수가 없으면 유폐된 쪽이 반기를 들 수도 있으니까. 코시카는 커다란 땅이고 그 안에 수많은 속국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휘어잡고 있는 것은 황제로서의 강력한 권위였다. 그리고 그 황제의 권위를 받쳐주는 가장 큰 것은 태고로부터 내려와, 방계로는 이어졌을지언정 단 한 번도 교체된 적은 없는 키옌의 피였다. 키예프의 표트르로부터 내려와 코시카의 표트르 대제를 거쳐 아롈에게까지 전해 내려온 마법사의 푸른 피.

그만큼이나 계승자는 귀중한 것이었다. 로렌이라고, 뭐 다를 리가.

남자는 앙투안에게 잡고 있던 말고삐를 건네주고 천천히 다가서서는 아롈의 손등을 잡아 올렸다. 아롈은 그냥 생각 없이 잠시 나온 참이라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다.

그는 손등을 높이 가져가 허리를 숙이지 않고 고개만을 숙여 입 맞췄다. 손등에 닿아온 입술은 다시 아롈의 약지에 얌전히 자리 잡은 매끈한 진주에 내려앉았다.

"세시안입니다."

아롈이 몇 번이고 생각해봤던 첫만남에 이런 장면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롈이 자신의 '남편'에게 처음으로 내뱉은 목소리는 상당히 멍청하게 들렸다.

"아롈입니다."

 

"결국 못 견뎠구나?"

몇 달 만에 본 친구가 꺼낸 말은 다름 아닌 그에 대한 동정이었다.

"리젤로트가 절름발이 신랑과 결혼해도 좋다고 허락해줬다면 조금 더 견딜 수 있었을 거야."

미셸은 미안함 섞인 얼굴로 킬킬거리고는 세시안을 포옹했다. 그의 등을 탁탁 친 미셸은 세시안과 떨어져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우스꽝스러운 가발의 유행이 지난 다음 귀족 사내들도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머리에 달려있는 털일 뿐인 머리칼에 신경 쓰는 것은 상류층이나 할 수 있는 호사였다. 여자들처럼 꿀이며 아몬드, 향유 같은 온갖 것을 발라가며 엉덩이를 넘겨 길게 기르진 않지만 최소한 목덜미를 덮을 정도로는 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무슨 일이야? 정말로 못 견딘다고 황궁을 뛰쳐나와 나바르까지 달려올 네가 아니잖아?"

"어마마마께서 좀 심하긴 하셨지."

세시안은 손을 깍지 끼고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냥 몇 가지 이유가 있어. 미네트가 여길 가보라고 아주 닦달을 하더라. 어마마마께서도 미네트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뭔가 이유가 있다고 거드시고, 너와 좀 얘기해야 할 것도 있고, 뭐, 호기심도 아주 조금 있었고."

미셸은 어깨를 으쓱했다.

"예쁘지?"

"리젤로트보다는 못 해도?"

"그건 당연하고."

세시안은 쓰게 웃었다.

"너무 어려 보이던데. 실제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단 똑똑해. 하고 싶은 말을 못 참고 다 하는 거랑 약간 막무가내인 것만 빼면. 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포함해서."

"예민?"

그의 지친 반문에 미셸은 세시안의 어깨를 탁탁 쳤다.

"하긴, 네가 보기엔 둔감 그 자체일 수도 있겠다."

예민한 거야 귀하게 자란 아가씨들이 대부분 그러니 그렇다 쳐도 제발 피해망상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황후는 아롈-그 가느다란 팔의 소녀가 자신을 죽이러 오는 거라고 눈물까지 흘렸다. 아무리 그럴 리가 없다고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미네트가 달라붙어서 절대 마담 라 세르의 머리채를 뜯어놓지도, 뺨을 때리지도, 대놓고 무시하지도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딱 한 마디다. 딱 한 마디만 하면 다시는 말 안 할 거야.

-그건 어머니께서 맘대로 하세요.

그리고 황후는 좋아하는 음식들을 입에 넣으며 행복해했다. 아마 지금쯤 친하게 지내는 부인들을 불러다가 도박을 하고 계시겠지. 전에는 커다란 에메랄드 반지를 잃으셨던 것 같은데. 세시안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도박 실력이 형편없는 황후가 제발 이블린 궁을 날려먹지 않기만을 바랐다. 미네트가 잘 말려주겠지.

"아, 그 아가씨, 누구야?"

"무슨 아가씨?"

"성에 있던 검은 머리에 파란 눈. 머리가 구불거리지 않고 곧고."

그 여자의 남쪽 말은 정말 지독하게도 서툴렀다. 답답했는지 북쪽 말을 쏟아내는데 세시안은 북쪽 말을 교양으로나 배웠고-남쪽의 귀족, 특히 사내들은 페란토 어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의 말을 그렇게 깊이 배우지 않았다- 말을 아주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 했다. 그나마 그가 알아들은 것은 단편적으로 섞여 나오는 동쪽 말 덕분이었다.

세시안이 몇 가지 인상착의를 더 설명하기도 전에 미셸은 재깍 알아들었다.

"아. 산발탄원의 아가씨."

"산발탄원? 요즘 세상에는 참 드문 일인데. 거기다 외국인이잖아."

그녀의 새파란 눈은 순수한 남부인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시안은 어제 그녀를 받아들여 아직 신분도 똑바로 모른다는 미셸의 말을 듣고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긴 첫 며칠은 쉬도록 하고 대충 뒷조사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서사시에나 나오는 것처럼 오 가련한 처녀여 운운하며 무릎 꿇은 그 자리에서 바로 말을 들어줬다가 무슨 오해와 문제가 생길 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왜 하필 네가 받았어?"

그 자리에 신분 높은 기사가 미셸 혼자만은 아니었다. 필리프도 있고, 하다 못해 앙투안도 있었을 터였다. 잘생긴 얼굴을 한 미래의 매제는 밤을 샜다고는 믿을 수 없이 말끔한 얼굴로 동화 속의 기사처럼 대답했다.

"불행한 숙녀를 돕는 것은 기사의 의무니까."

나이를 먹고 의무가 늘어가면서 놓았지만 한 때 미셸은 참 검을 좋아했다. 이미 그만둔 지 십 년 가까이 지나 잊고 있었다. 세시안은 지독히도 검에 재능이 없어 이름뿐인 기사 작위를 달자마자 검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배울 것이 산더미인데 굳이 재미도 없고 재능도 없는 것에 매달릴 정도로 한가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미셸이 귀찮아질 것 같다는 예감을 지우기 힘들어 선뜻 그러라 할 수가 없었다.

오를레앙 대공자는 평생을 같이 한 친우답게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걱정하지 마. 오를레앙의 일이야."

"잘못 튀어서 외교문제로 비화되면 오를레앙이 책임져."

"사자와 명예와 긍지에 걸고."

"잘못 되면 리젤로트는 못 데려갈 줄 알아."

"당장 아무나 잡아서 떠넘기고 올게, 기다려."

그는 웃어버렸다.

 

아롈은 수도원을 떠나 성으로 돌아와서도 손가락에 올라앉은 진주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편지의 구절도 마찬가지였다.

-세시안입니다.

-당신의 세시안.

도대체 어떻게 만날지 생각을 되도록 안 하려고 하긴 했다. 어떤 사람일지도. 하지만 밤을 새서 초췌해진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고 서성이는 와중에 준비도 없이 마주치고 멍청한 목소리로 아롈이라고 자기소개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발가락이 꾹 오므라들었다. 바보 같긴. 멍청하긴. 아무리 갑작스럽다고는 해도 그것보다는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할까.

"전하. 듣고 계십니까?"

"아, 미안합니다, 공작. 다시 말해주겠어요?"

필리프는 외알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오를레앙의 적손은 리무쟁 공작 한 명뿐입니다."

전 오를레앙 대공은 딸만 둘이었다. 그는 차녀인 루이즈 안을 오를레앙의 상속녀로 정하고 조카와 결혼시켰다. 미셸은 그 둘의 외동아들이었고 오를레앙의 후계자였다. 황후의 딸인 리젤로트와 약혼함으로써 그의 계승권은 완전히 공고해졌다.

"지금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라고 충고하는 건가요?"

"부디 그래주시길 바랍니다. 리무쟁 공작은 전하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호의적입니다. 굳이 적을 늘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필리프는 아롈의 편을 들어주기로 한 이후로 종종 아롈을 쿡쿡 찔러댔다. 꼭 빵이 익었는지 확인하는 요리사 같았다,

"노아이유 부인을 깔아뭉개 달라고 부탁한 것은 누구였지요? 그건 적을 늘리는 행동이 아닌가요?"

"말씀이 격하시군요. 그리고 그녀가 전하께서 마음에 들어할만한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저는 그저 전하께 참지 말아달라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일개 백작부인에게 연연하실 정도로 미력하시다고는 생각지 않아 어렵게 드린 부탁입니다."

능구렁이 같기는. 필리프는 화제를 돌렸다.

"마담 르와이얄이 정신을 완전히 차렸다는 전갈입니다. 아마 지금쯤 세르를 뵙고 있을 겁니다."

"그런가요."

"나바르에 더 계실 예정이라면 식 일정을 조정하라는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발루아 가문의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청포도의 보르디는 발루아 가문의 신하라면서요? 아롈은 미천한 신분-후작녀 이하의 여자들과 달리 결혼해서도 여전히 '코시카의' 옐레나라고 불렸다.

"전하의 호의에 기대 말씀드리건대 부디 수틀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빈정대는 것을 참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계실 의사가 없으신 것 같으니 일정 조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 전하의 수행 행렬에 파란 눈의 아가씨가 낄 일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마리야?"

"그 아가씨의 이름이 마리입니까?"

아롈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 것에 성공했다.

"사촌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그녀 때문에 리무쟁 공작과 신경전을 벌이신다면 제게 있어서 그건 신경 쓸 일이지요."

"미셸이 감히 내 앞에서 그녀를 감쌌다고요!"

아롈은 울컥 화를 토해냈다. 필리프는 문장이 포도덩굴인 가문 출신이면서 독수리의 문장인 키예나 출신의 아롈보다 엄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하. 감히 넘겨짚어 추측건대 전하께서는 다짜고짜 리무쟁 공작에게 그 아가씨를 쫓아내라 화를 내신 것이 아닙니까?"

"사촌의 어휘 선택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아닙니까?"

"나는 미셸에게 마땅한 충고를 했을 뿐입니다."

"산발탄원을 한 숙녀를 받아들인 기사에게 그녀를 내쫓으라는 것이 충고입니까?"

"지금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건가요?"

"예."

아롈은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고 필리프를 노려보았다.

코시카의 황제는 무오(無誤)하다. 그러므로 차기 황제로 여겨지며 교육받은 아롈은 자신의 잘못을 아랫사람으로부터 지적받는 것에 익숙지 않았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화가 나 마리야가 파블 1세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토로했지만 필리프는 조곤조곤, 즉 끈덕지게 아롈의 잘못을 짚어댔다.

"그녀가 전대 코시카 황제 폐하의 사생아라는 것을 리무쟁 공작은 알지 못 할 뿐더러 안다고 해도 그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무력한 여자이며 공족이고 이미 보호를 요청한 상태가 아닙니까."

결국 아롈은 필리프의 말을 거세게 끊어냈다.

"그만!"

​"​납​득​하​셨​습​니​까​?​"​

미셸에게는 마법사의 피가 흐르며 그는 유서 깊은 대공가의 외동아들이다. 그래. 아롈이 목숨까지 걸 각오로 마법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듯이, 당연히 미셸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가치는 있겠지. 기사로서의 의무인 고귀한 명예.

약자를 보호할 것.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멍청한 사생아 따위를 어떻게 감히 내 앞에서 보호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어!

아직 불퉁한 아롈의 얼굴을 보며 필리프는 헛기침을 했다.

"정 어리광을 부리고 싶으시다면 부디 때와 장소와 대상을 폐가 안 되는 선에서 골라주시길."

필리프는 정말로 가시처럼 정확하게 아롈을 찔러들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아마 부실하게 먹은 아침 때문일 터였다. 아렐은 손을 꾹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많이 먹는 건데. 아롈은 새벽에 멍청하게 자기소개를 했다는 것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데운 포도주만 겨우 반 잔 삼키는 것으로 아침식사를 마쳤다. 그래서, 어제 점심부터 아롈의 입에 들어간 건 브랜디 사분지 일 모금, 데운 포도주 두 모금 뿐이었다.

"전하께서 연치 어리다고 상냥하게 봐 줄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제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전하, 저는 전하를 따르는 뒤에 보르디를 걸고 있습니다. 부디 헤아려주십시오."

물론 미셸의 호의를 잃는 것보다는 마리야를 감수하는 게 낫다고 머릿속으론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야가 앞에서 얼쩡거릴 것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아롈은 혀를 한 번 꾹 깨물고는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사촌은 참 사람의 가슴에 깊이 와 닿게 말하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하. 마담 르와이얄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니 여쭙는 것입니다만, 과제는 다 끝내셨습니까?"

아롈은 주먹을 꾹 쥔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외워보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암기라면 정말 자신 있었다. 게다가 이미 한 번 외운 지 오래인 목록들이었다. 아롈은 그가 외우라고 시킨 주요 사람들의 가문 이름을 전부 읊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참하게 깨졌다.

 "마지막으로 황가는 세르 루이 세바스티앙 조제프 자비에, 마담 르와이얄 크리스틴 엘리자베트,  마담 앙리에트 안, 마담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발음이 틀렸습니다."

 "어디가 틀렸다는 거지요?"

아롈은 작위명을 암송하는 걸 그만두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필리프는 계속 눈살을 찌푸리며 깃펜을 놀렸다. 필리프는 외눈안경을 고쳐쓰고는 자신이 휘갈겨 쓴 메모를 천천히 읽었다.

 "먼저, 부르고뉴의 후계자는 레네스나 렌네나 레느가 아니라 렌 공작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바르의 후계자도 기세 공작이 아니라 기즈 공작입니다. 그 밖에 완전히 틀리게 읽으신 작위만 반 이상입니다."

 "철자는 다 외우고 있어요."

 "귀족들과 필담만으로 대화를 나누실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요."

아롈은 숨을 들이쉬었다. 도대체가 남쪽 나라 말은! Guise가 어떻게 기즈가 된단 말인지 모를 일이었다. 갈리아 어는 철자와 발음이 이해할 수 없게 따로 놀았다. 필리프는 사뭇 다정한 척 웃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어려우십니까?"

도저히 어렵다고 말 할 수 없었다. 꼴같잖은 자존심이었다.

 "못 하시겠다면 양을 줄여드리겠습니다. 당장 모든 귀족들을 외우지 않아도, 전하께서는 연치 어리신데다 외국인이신 만큼 다들 이해할 겁니다."

 -아무도 네게 시키지 않았다.

치마에 서류가 탁 부딪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따위로 할 거라면 안 해도 된다.

아롈은 부러 쌀쌀맞게 대답했다.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든 해오겠어요."

"그럼 모레까지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내일까지, 다시 해오지요."

아롈은 말을 툭 내뱉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내일이라니. 갈리아 어 고유 명사의 발음은 감도 잡지 못 한 상태인데. 그나마 남쪽 말에 능한 앤을 붙들고 밤을 새도 가능할 지 모를 일이었다.

 "모레까지 해오시지요. 완벽할수록 좋으니까요."

봐준다는 기색이 역력한 말이었지만 아롈은 차마 한 번 더 내일까지 하겠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필리프는 남은 차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했다. 그는 이미 아롈에게 일일이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뒤였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사촌도 편히 마음을 놓고 있길 바랍니다."

하지만 필리프가 나가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주름살 가득한 노아이유 부인은 커다란 칠면조만큼이나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로 아롈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당장이라도 잔소리를 하고 싶어 오리 같은 입이 씰룩거리는 듯했다. 그녀는 아무리 필리프가 사촌이라 해도, 숙녀라면 남녀가 방 안에 단 둘이 머무는 건 안 될 일이라고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필리프의 막내딸이 아롈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아롈은 이 남쪽의 예절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느 황제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저승에서 축복받으리라.

"무슨 일인가?"

"예, 전하. 세르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롈은 머뭇거렸다. 아직 얼굴이 퉁퉁 불어있을 텐데. 솔직히 숙녀를 찾아오려면 먼저 전갈을 보내는 게 예의 아닌가. 머리도 제대로 못 감아서 대충 틀어올렸고 옷도 초라하고 장신구도 그냥 그런 것들인데다 화장도 안 했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해 보일텐데. 눈 밑에 그늘이나 안 생겼나 몰라.

"어, 밖에 계신가?"

"예."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몰골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엉망인 머리만을 풀어내려 대충 손으로 다듬었다.

"들어오시라 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가 들어왔다. 한 번 본 얼굴인데도, 낯설었다. 아롈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리따운 아가씨(ma belle),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음속에서 울려퍼지는 수많은 불평을 즈려밟고 아롈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