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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5. 붉은 올가미, 푸른 가위 (5)


 그는 아롈을 데리고 별 것도 없는 정원으로 나갔다. 아롈은 찬찬히 그를 관찰했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롈은 아버지의 성정과 자질에 대해서는 혹평을 내리고 있었으나 그의 외모에만큼은 딱히 입을 댈 생각이 없었다. 파블 1세는 전나무처럼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전형적인 북쪽 미남이었다. 푸른 눈은 가만히 있어도 우수에 넘친 것처럼 보였고 콧날은 쭉 뻗어 인중으로 이어졌다. 기실 아롈은 어머니를 닮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곤 여인치고 큰 키와 좀 넓어서 옷을 입을 때마다 신경 쓰이는 어깨, 그리고 직모 정도였지만.

각설하고 그런 남자를 아버지로 둔 아롈의 눈에 세시안은 썩 화려한 미남은 아니었다. 한 눈에 봐도 바람둥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잘생긴-그의 키가 남쪽 사람답게 좀 작았음에도- 미셸과는 달랐다. 키가 아롈보다는 컸지만 그렇다고 얼굴 한 번 보려면 고개를 좀 올리거나 멀찍이 서야 했던 북쪽의 사내들과 비교할 것은 못 되었다.

그렇다고 딱히 떨어지는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피부나 머릿결은 귀한 출신답게 말끔했고, 약식으로 입었는데도 복장에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여동생처럼 곰보 자국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이 찢어진 것도, 매부리코인 것도, 언청이인 것도 아니었다.

멀쩡한 눈, 멀쩡한 코, 멀쩡한 입이 달려야 할 곳에 잘 달려 있었다.

"먼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유감이라는 말을 하고 싶군요."

머릿속에서 남쪽 말이 뱅글뱅글 돌아갔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 거였더라. 페란토가 나은가? 필리프는 제발 페란토를 사용하는 걸 자제하라고 아롈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급기야는 이미 문자로 다 외운 걸 확인한 작위명을 암송으로 다시 외우라는 특단의 조치까지 취했다.

그러나 아롈이 대답하기 전에 세시안은 빙긋 웃었다.

"사정이 있어서. 부디 양해해주었으면 합니다."

"전하께서 이유 없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예법을 어길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필연 어떤 연유가 있겠지요."

결국 아롈이 고른 것은 페란토였다. 서툰 남쪽 말을 조합해 머릿속에서 할 말을 완성시키는 데에는 간신히 성공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가 페란토 어로 바꾸어 말했다.

"이해해주어 고맙습니다."

아롈은 잠시 멈춰서는 손을 거두어 머리를 매만졌다. 분을 바른 것처럼 흰 손 아래로 세시안의 손가락이 드러났다. 모양이 매끈한 손에는 금속의 테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롈의 왼손 약지에서 차가운 빛을 내는 그것과 같은 것. 진주는 없지만 분명했다.

작은 은. 플라티나.

왼손 약지에는 심장과 이어지는 혈관이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반지를 나눠끼는 것은 심장을 나누는 맹세라고들 한다. 아롈은 저릿한 가슴을 부여잡는 대신 오른손을 다시 곱게 얹어 반지를 가렸다.

"마담 르와이얄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크리스틴이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군요. 여동생의 일로 심려를 끼쳐 할 말이 없습니다."

아롈은 그 말이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는 정중한 부탁임을 해석해냈다. 그가 여동생에게 얼마나 애틋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한 배에서 나온 동기가 아닌가. 여동생이 자신이 도착하기 직전에 목을 매달았으며 특히 그 광경을 자신의 신부에게 목격당했다는 사실이 그리 유쾌하지 않을 것은 뻔했다.

"실로 유감을 표합니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크게 다친 곳은 없다니 금세 쾌유하실 겁니다."

주님의 은총이 어쩌고 하는 말을 덧붙일까 잠시 고민하는 아롈의 뺨에 보들보들한 살덩이가 아주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뒤늦게 숨이 멎었다.

-저기 다른 애들 엄마 아빠는 매일매일 밥도 같이 먹고 밤낮으로 뺨에 뽀뽀도 해준단 말이야.

칭얼거렸던 어린 시절.

-그런데 나한테는 아무도 뽀뽀를 안 해주잖아.

파프너.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롈은 마차에서 내려 중얼거렸다.

"여기가 나바르 대공성인가."

그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인사를 시작했다.

"어서 오시지요, 마담 라 세르,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마담 르와이얄. 그리고 리무쟁 공작 전하, 샤를루아 공작 전하."

아롈을 맞은 것은 나바르 대공이나 그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나바르의 쥬스티느, 포의 아가씨는 정확한 예법으로 무릎을 꿇었다가 우아하게 목을 가누고 일어났다. 백조 같은 목이 유독 돋보이는 처녀였다. 미리 전갈을 받았는지 크리스틴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어나게. 그대가 나왔는가?"

"아비와 오라비가 황도에 있는 고로 소녀가 나왔습니다. 부족한 대접이오나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주시기를."

"노여움이라니 당치 않네. 그렇지 않나요, 크리스틴."

"그, 그렇지요."

마담 르와이얄, 크리스틴 엘리자베트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목소리도 그만큼이나 부자연스러웠다.

"어, 그렇지요? 시, 실례일리가."

"헐후히 넘겨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드시지요. 샤를루아 공작과 리무쟁 공작도."

"가실까요? 크리스틴."

필리프와 포의 아가씨는 오촌이었다. 둘이 잠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아롈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시누이는 입술이 허옇게 될 정도로 분칠을 해서 곰보 자국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린 뒤 자신의 오라비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블린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세르와 함께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세시안은 아롈에게 그녀를 고개 숙여 부탁했다.

-미안합니다.

아롈은 한 나라, 그것도 제국이라고 불릴만한 나라의 후계자가 남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여동생을 위해 고개씩이나 숙일 수 있는 그 우애가 가상해 기꺼이 승낙하자 두 번째 입맞춤이 다시 뺨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아롈은 크리스틴의 손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친근하게 잡아끌었다.

 

-돌아가자꾸나.

목을 매고 깨어나, 오라버니가 있었을 때 크리스틴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항상 부모님의 기대를 듬뿍 받았던 오라버니, 여동생들의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받아들이면서도 항상 웃기만 하셨던 오라버니.

크리스틴이 얼굴이 완전히 망가진 채로 괴로워하다가 약혼자와 파혼하고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도 오라버니만은 그녀의 결심을 존중해주었다. 도저히 이런 얼굴을 하고 마담 르와이얄이랍시고, 황제의 장녀랍시고 떵떵거릴 자신이 없다고 울었다.

온 상반신, 막 부풀어 올라 모양이 잡히기 시작하던 젖가슴과 그 아래로 매끈하게 내려오는 허리와 배꼽 주변에까지 흉하게 남아버린 열꽃을 두고 어떻게 아내의 의무를 다하며 자식을 낳고 살 수 있을까.

가슴 바로 위까지 깊숙이 파인 옷을 입고 허리를 졸라맨 채 거울의 홀과 전쟁의 홀과 그 외의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를 돌아다니며 우쭐댈 수 있을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크리스틴은 신앙심이 깊은 처녀는 아니었지만 수도원에서 신앙심을 가르는 시험이라도 하고 그녀를 받지 않는 바에야.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아 굳이 대침묵을 해야 하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기도에 매달렸다.

신이시여, 제게 구원을 주세요.

하지만 그럴수록 원망만이 부풀어올랐다. 왜 하필 저였나요? 왜 그 많은 처녀들을 두고 하필 저였나요? 차라리 저를 데려가시지 그랬어요. 마리안느랑 마고를 데려가시려면 저도 같이 데려가시지 그랬어요.

사랑하는 자매와 귀여운 남동생을 잃고 자신조차도 망가지는 바람에 휩싸인 격렬한 증오는 내적으로 향했다.

수녀원은 조용하기만 했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원죄를 신에게 참회하는 것.

누가 좀 들어달라고.

크리스틴은 속으로 비명을 질러댔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목을 매고 손목을 그어 봐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올케 언니라는 그 여자가, 천연두에 걸리기 전의 자신처럼 어리고 예쁠 그 여자가 온다는 말에 크리스틴은 다시 목을 맸다.

아마 죽지는 않겠지. 죽어도 상관없고.

오라버니는 실로 기적처럼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게 크리스틴의 얽어버린 뺨을 매만졌다.

-크리스. 돌아가자.

그 순간만큼은 아바마마가 어떻게 생각하실까, 다른 여자들이 얼마나 비웃을까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은 오라비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실로 바라던 일이었다.

오라버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갑자기 나이 어린 올케는 싸늘한 얼굴을 하곤 친근하게 굴어댔다. 마담 르와이얄이라는 지위, 그리고 마담 라 세르의 비호. 적어도 그녀의 앞에서 입을 뗄 사람들은 없으리라.

검은 창에 얼굴이 비쳤다. 본디도 절세 미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난 얼굴도 아니었는데. 예쁜 구석이 있던 새끼 고양이 같은 소녀는 어느새 다 늙어버린 추한 여자로 자랐다.

할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가서 아무 것도 듣지 못 한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귀를 막고 살 수 있을까.

-이블린 궁으로.

오라버니. 무리일지도 몰라요.

이 얼굴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은요.

"얼굴을 고치고 싶니?"

빗방울 소리처럼, 허공에 흩어지는 방울 소리처럼 어여쁜 목소리와 함께 차가운 팔이 크리스틴의 목을 뱀처럼 조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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