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붉은 올가미, 푸른 가위 (6)
아롈은 옷을 갈아입자마자 나와서 다과회에 참석했다. 당연히 크리스틴을 기다렸으나, 그녀는 문도 열어주지 않고,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한사코 사양하며 먼저 가라고 아롈을 밀어냈다. 말까지 더듬어, 어쩔 수 없었다.
섬세한 장식 접시에는 색감과 조화를 신경 쓴 것이 분명한 과자들이 예쁘게 놓여 있었다. 음식 사이사이에 놓여 있는 꽃은 북쪽에서는 사치의 극치로 통하지만 남쪽에서는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닌 듯했다.
파릇파릇한 풀이 깔려있는 정원에는 화사한 흰색 칠을 한 테이블과 의자가 가득 놓였고, 피부 미용에 신경을 쓰는 숙녀들을 위해 넓은 차양까지 쳤다. 비단으로 만든 귀한 구두로 바닥에 깔린 평평한 돌길을 밟아 온 아가씨들은 색색의 옷을 입고 보석을 주렁주렁 달아 한껏 꾸미고 있었다.
아롈은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올려 생긋 웃었다.
포의 아가씨는 대공비가 없는 나바르 가문에서 실질적인 안주인 역할을 맡고 있었고 그녀의 시녀들은 대부분 나바르의 기수가문의 장녀들이었다. 아롈의 시녀들과 포의 아가씨의 시녀들이 뒤섞여 앉은 오후의 티파티는 나른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이어졌다.
적을 만들지 말고 남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아롈은 잔으로 얼굴을 가리며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이렇게 멀쩡하게 하고 있잖은가.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그냥 안 하는 것 뿐이었다.
차를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은은한 과일향이 올라왔다. 항상 느끼지만 남쪽의 차는 맛이 엷었다. 황금빛 고리가 고운 수색은 볼만 했고, 분명 신중하게 골랐을 잔과도 잘 어우러졌지만 정작 향기만 있고 색만 곱지 맛은 없었다.
아롈은 정말 차가 맛있다는 듯이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고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기 와서 대부분이 낯선 것들이긴 하지만 가장 자주 보이는 것은 사람의 생김새였다.
아롈의 눈에 남쪽의 아가씨들은 다들 생김새가 비슷비슷해 보여서 아주 특징적인 얼굴이 아닌 한 잘 구분이 안 가지 않았고, 옷과 장신구로 구분을 지어 사람의 이름을 대충 외우고 정 안 되면 그 쪽으로는 말을 걸지 않는 방법을 사용해 대화를 나눴다.
북쪽에서는 다들 키가 길쭉길쭉 큰데다가 피부가 다들 희었다. 그런데 남쪽의 아가씨들은 다들 피부가 노르스름하고 땅바닥에 붙어 다니는 것처럼 작았다.
그리고 녹색 눈. 순수 북부인들에게는 녹색 눈이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황궁을 통틀어도 녹색 계열을 띠는 홍채를 가진 사람은 어머니와 자신뿐이었는데 여기에는 무슨 조약돌처럼 녹색 눈인 사람들이 굴러다녔다.
갈색이 섞인 개암색, 짙은 숲 같은 초록색, 회색 섞인 암록색, 햇빛을 받은 두꺼운 나뭇잎의 뒷면 같은 녹색.
"헌데 전하의 반지가 참 곱네요."
아, 장신구에 대한 이야기 중이었던가. 문득 진주를 만지작거린 아롈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아니네."
"어머나, 겸손이 지나치세요. 그렇게 아름다운 진주는 제 평생 본 일이 없는 걸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흔히 진주는 백진주를 쓰니까요."
"진주는 순결과 부의 상징이지요. 약혼 반지신가요?"
처녀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꼭 진주라고 해서 약혼 반지라는 법은 없는 걸요!"
금세 테이블이 시끌시끌해졌다. 아롈은 많게는 자신보다 나이가 1.5배 가량은 될 것 같은 숙녀들이 볼을 붉히고 의견을 나누는 것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남부 말은 살짝 발음을 끄는 것도 많고 연음이 많아서 전체적으로 흐르는 것처럼 들렸고 단어와 단어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흥분한 처녀들은 말을 더더욱 빨리 했다. 아롈은 거의 반은 알아듣지 못 하고 내용을 흘려야 했다.
아롈은 무심코 뺨에 손을 얹었다. 상처라도 난 것처럼 뜨거웠다.
반지며, 뽀뽀며, 그게 뭐라고 지금까지 애타게.
생각을 멈췄다. 애타게라니.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아롈은 생각을 되감았다.
뺨에 와 닿는 입맞춤은 보드랍고, 따뜻하게 스쳤다.
아, 젠장. 또 다시 돌아왔다. 아롈은 포기하고 생각을 쭉 이어나갔다. 이 생각만 벌써 이틀 째였다. 경의의 표시로 손등에 입 맞추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기실 뺨에 입술이 닿는 것과 손등에 입술이 닿는 것이 뭐 그리 차이가 있을까. 아롈은 숨까지 멈추고 떨었던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여동생을 부탁하여 자존심도 굽히고 고개 숙여 부탁하는 오라비를 보고 질투했던 것도. 그리고 그의 검은 머리를 보고 알렉산드르를 떠올린 것도.
뭘 그렇게 불쌍한 척 하고 있어, 옐레나 파블로브나.
알렉산드르와 안녕을 고하지 않았어?
이제 세상에 그가 자신의 오라비였다는 증거는 별로 남지 않았다. 이반 3세는 광기에 들린 듯 손자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웠다. 계보는 지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필사했고 궁에 걸려있던 초상화들은 전부 태웠다. 알렉산드르가 좋아하던 말까지도 죽여 묻어버렸을 정도로 철저했다.
알렉산드르가 도망친 지도 벌써 8년. 머리를 터트릴 듯 쏟아지는 지식과 삶의 홍수 속에서 아롈이 알렉산드르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초상화의 회랑 덕이었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회랑의 초상화는 건드릴 수 없었다. 코시카가 세워진 지 한참 전부터, 세상에 마법사가 널렸다던 시대로부터 내려온 시조의 유물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모르지만 키옌, 키예나의 피를 가진 사람만을 들여보내는.
짝, 짝.
쥬스티느가 박수를 쳐서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롈은 다른 생각이라곤 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자연스레 손을 내렸다.
"마담 라 세르께서 답을 알려주실 때가 된 것 같은 걸요."
"약혼 반지가 맞네."
사실이긴 했다.
"리즈 양, 대단하시군요."
"정말이지. 리즈 님의 안목은 못 따라가겠어요."
"어머나, 제 안목이 중요한가요? 세르의 배려심이야 말로."
깔깔 화사한 웃음이 흩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던 쥬스티느가 갑자기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롈은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마담 르와이얄 크리스틴이, 아롈에게 빌린 옷을 입고 그 곳에 서 있었다. 아롈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일제히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어서 와요, 크리스틴."
-왜, 왜, 왜, 갑자기 그, 그렇게 부르나요?
처음 마차를 같이 탔을 때, 크리스틴은 어린 짐승처럼 아롈을 경계했다. 아롈은 안 그래도 알아듣기 어려운 남쪽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그녀에게 부아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정말 넝마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용도 줍고, 앤도 줍고, 아버지의 사생아도 줍고, 이제 그도 모자라 시누이까지 줍는 꼴이라니.
-그럼 황궁에 가서도 계속 마담 르와이얄이라고 불러드릴까요?
크리스틴의 얼굴은 분칠을 솜씨 있게 했는지 아침보다 곰보자국이 좀 옅어진 듯했다. 머리칼을 반쯤 늘어뜨리고 화사한 리본자수를 놓은 스토마커를 달아 안색이 한층 나아보였다.
"얼굴이 참 밝아보이는군요, 크리스틴."
"어, 음. 분을 바꿔서 그런가보네요."
"내 분은 북쪽에서 가져온 것이니. 맞는 화장품을 찾았다니 잘 되었군요. 자, 어서 앉으세요."
숙녀들은 분분히 한 자리씩 내려앉아 마담 르와이얄의 자리를 비워냈다. 포의 아가씨인 쥬스티느도 HGDH 대공녀로서 전하라 불릴 자격이 있었으나 황제의 장녀인 HIH 마담 르와이얄보다는 그 지위가 한참 아래였다. 앉은 이들 중 가장 지위가 낮은 시녀들이 바삐 움직이며 쓰던 다구들을 한 자리씩 밀어 옮기고 크리스틴의 찻잔을 가져왔다.
"옥체 미령하시다 들어 걱정했답니다, 마담 르와이얄. 이리 쾌차하신 것을 보니 마음이 흔흔하옵니다."
"한동안, 음, 한동안."
아롈은 말을 더듬는 크리스틴을 거들어 매끄러운 말로 바꾸었다. 크리스틴을 보자마자 인삿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해두었다.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 주님을 모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리 나오게 되니 몸이 놀랐나 봅니다, 나바르 대공녀."
"갑자기 오신다 들어 대접이 미흡합니다. 하오나 이는 오로지 소녀의 부족함일 뿐 창검의 나바르는 언제나 발루아의 충실한 가신임을 잊지 말아주시옵소서."
"그, 그, 그럴게요."
아롈은 찻잔을 들어 차를 홀짝였다. 아가씨들은 까르르 웃으며 다음 화제를 찾아 헤맸다.
다과회를 마치고 만찬까지 끝내고 돌아와 침의로 갈아입은 아롈은 반쯤 의자에 기대 누워 있었다. 머리를 다 풀어 내리고 눈을 감으니 당장이라도 잠들 것 같았다. 굉장히 지쳤다.
"전하. 어디 미령하시옵니까?"
눈을 게슴츠레 뜨자 검은 머리의 처녀가 아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다."
"미열이 있으신 듯 하온데."
"아니다. 그냥 해라."
앤은 아롈의 다른 손을 붙잡고 손톱 손질을 시작했다. 물어뜯었던 손톱은 다시 희게 자라나면서 끝부분이 울퉁불퉁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한 손이 다 끝나자, 아롈은 손을 바꿔 내밀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들이 겹겹이 껴 있었지만 알이 작은 것들이 대부분이라 또 그리 화려하게 보이지만도 않았다. 흰 손에서, 파란 빛이 도는 진주는 유난히 두드러졌다.
"전하, 뺨은 붉으신데 손이 차시옵니다."
"항시 있는 일이다. 여독에 지쳐서 그렇겠지."
"나바르 대공녀에게 시의를 불러오라 이르오리까?"
"남쪽 의사에게 몸을 맡겨 뭘 하겠느냐."
"하오면 내일 연회를 취소하라 전하는 것이 좋겠사옵니까?"
귀족의 성을 들를 때마다 공연을 보고 화려하게 차린 채 무도회에 나가고, 공연을 보고. 사람을 잡겠다는 것인지 사람의 마음을 잡겠다는 것인지. 아롈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벨타는?"
"소녀의 방에 계시옵니다."
"데려와라."
아롈은 약지까지 손질을 마친 손을 슬그머니 뺐다. 이 정도면 되었지. 어차피 나갈 때는 장갑을 낄 것이 아닌가.
"소금값을 못 하면 노래라도 불러야 할 것이 아니냐."
수도원에서는 벨타를 데려가지 않았으니 그렇다고 쳐도 그 이름도 잊어버린, 마리야를 만난 귀족의 성은 방이 너무 작고 다닥다닥 붙어있어 노래를 들을 겨를이 없었다.
벨타의 노래를 들으면 그나마 깊이 잠들었다. 꿈을 꾸고 소스라치는 횟수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오늘처럼 상념이 많은 날에는 꼭 악몽을 꾸게 된다. 지난 밤에도, 아롈은 필리프의 과제를 하느라 기어이 한숨도 자지 못 했다. 그걸 다 아는 앤은 두 말 않고 곁방으로 사라졌다. 아롈은 침대에 걸터앉기 전에 잠시 머리칼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머리칼이 길다보니 대충 앉았다가는 끄트머리를 깔고 앉기 일쑤였다.
한 갈래로 곱게 모아 어깨 너머로 넘기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조심성 많은 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전하."
멘 공작도 아닌데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벨타 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아롈은 속에서 내장을 토막치는 기분에 휩싸여 이를 악물었다. 오만(五萬) 생각이 다 났다. 보석으로 보이니 시녀나 하녀 중 누가 손을 댔을까? 아니면 그 변덕스러운 용이 갑자기 새 주인이라도 찾아간 걸까? 가끔 그 귀여운 외모 때문에 잊어버리지만 노잡이 노예를 열 명이나 삼킨 흉포한 용이었다.
온 방을 다 뒤집어 엎어도 벨타가 나오지 않자 아롈은 다 다듬어놓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북부는 마녀 사냥이 행해지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지역이었다. 표트르 대제로 이어져 내려온 마법사의 피는 근처 공국들로도 퍼져 있었고 지배자는 대대로 강력한 마법사였다. 북쪽에서 여성의 계승권을 인정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었다. 마법사의 피는 여성에게도 공평하게 이어지므로.
북부의 자연은 혹독하다. 남부에서 북부까지, 동부에서 서부까지 이어지는 대륙의 길이 뚫리기 전까지 북부는 항상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렸고, 고대에 군주들의 마법은 필수였다. 군주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북부는 최북단의 키예프처럼 사냥을 해서 동물을 잡으며 바들바들 떨고 다니는 미개한 지역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오백년 전 동부의 대마법사가 사라지고, 모든 왕가에 각성한 마법사가 사라진 다음 교회가 기승을 부리며 무고한 평민들을 마녀랍시고 잡아다 죽이기 시작한 다음에도 북부는 교황이 아니라 마녀를 인정하지 않는 정교회를 선택했다. 마녀를 연못에 빠뜨리거나 불태우지 않았다. 마법사의 피를 이은 것으로 유명한 소국의 왕족들이 사냥당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아롈은 삼백 년 만에 처음으로 각성한 마법사. 그 사실이 북쪽에 알려졌을 때 반응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아롈은 남쪽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미셸, 필리프, 앙투안 역시 마법사의 피를 잇고 있다. 그 말은 어떤 식으로든 남쪽의 피에도 마법사가 이어져 있다는 뜻이고 그 쪽이 밝혀져 공론화 된다면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면 그만이었다.
사실 어떻게든 증명할 방법도 없다. 남부는 마법사가 사라지기 전부터 마법사가 적은 땅으로 유명하지 않았나. 아롈은 그들이 그 사실을 공론화 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사이에서도 각성한 마법사가 있었을 확률이 높다. 쉬쉬하며 마법의 피를 전해왔을 그 가능성. 감히 드러낼 용기가 있을 리 있나.
그러나 북쪽은 다르다. 황실의 피에 마법사의 피가 내려온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표트르 대제가 마법사였다는 야사도 전해 내려온다. 정치적으로 강한 이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법사가 끊긴 이후 만들어진 황실 전범에도 적혀있다.
마법사인 황족의 계승권은 마법사가 아닌 황족의 계승권에 무조건 우선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당연하게도 정통성이 없었다.
삼십년을 넘게 쌓아올린 인맥과 신뢰, 그리고 소피야 황후의 전례. 요람에 누워 있는 미하일 파블로비치 키옌으로 황위가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
그것들이 부실한 정통성을 지탱하며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기둥이었다. 아롈은 어차피 화려한 마법을 펼치며 황위를 장악할 수도 없는 몸이었다. 차라리 그럴 수 있었더라면 계승권을 포기하는 짓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롈은 어머니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쳤다.
살고 싶었기 때문에 벨타를 받아들였지만 벨타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그 성질 더러운 용의 비위를 맞췄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허무하게.
온 서랍과 옷장을 다 엎었고, 앤은 낑낑대며 가구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란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아롈은 손톱 다음으로 손톱 밑의 살들을 전부 이로 뜯어냈다. 지금이라도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서 애걸복걸해야하나. 살려만 달라고. 정말 죽은 듯이 살 테니까 살려만 달라고. 정말 비밀로 하겠노라고.
아니야, 이건 아니야. 아니면 세시안, 남편에게 가서 목숨만 어떻게든 보장해달라고 울고 불어야 되는 건가. 그는 다정해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설마 죽게 내버려두지는.
아롈은 손가락을 꽉 물었다. 지금 비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니, 이건 생각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저급한 공포다. 애초에 그 비린내 나는 용 새끼를 데려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죽이든 살리든 하라고 그 때 배짱을 부렸어야 했다.
[뭐 하니?]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롈은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그 목소리는 아롈의 머릿속에 울리는 것이라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우스꽝스럽게 뱅글뱅글 돌다가 노란 눈의 용이 엉금엉금 기어오는 걸 발견했을 때. 일순간 그녀를 구둣발로 짓이기고 싶다는 격렬한 충동을 느꼈다.
"뭘 하냐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대체 어디 있었던 건가!"
[서랍 속에서 자고 있었지. 저어기.]
꼬리가 나른하게 움직였다. 맥이 풀렸다.
아롈은 지금껏 앤의 방만 뒤집어엎고 있었다.
"벨타 님!"
급히 앤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소중히 벨타를 주워들었다. 아롈은 간신히 침대까지 걸어가 걸터앉았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정리는 됐으니 너는 오늘 내 침대 발치에서 자거라. 나머지는 내일 나바르 대공녀에게 말해 치우겠다."
[노래 불러줄까?]
"제발, 부탁하는데, 닥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