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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6. 가시 장신구 (1)


 수만 년의 세월이 가느다란 줄에 걸려 빛났다. 가을 하늘을 뚝 떼어다 빚은 듯한 이름 모를 구슬 사이로 그녀가 어깨 너머로 보고 이름을 익힌 사파이어며, 영롱하게 빛을 제 속에 가두고 일렁이는 수정이며, 내뿜는 광채가 오만하기까지 한 다이아몬드 등이 제각기 찬란하여 황송할 지경이었다.

실제로, 앤은 이 대단한 보석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다. 이 정도 가치를 지닌 패물은 아말리에 왕비나 빌헬미네 왕비도 몇 개 갖고 있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이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왕비에게 선물한 루비 세트 정도가 겨우 이에 비할 만 했는데, 왕비는 그 보석을 어찌나 애지중지하는지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감히 꺼내지도 않고, 침실에 보관할 정도였다.

[그렇게 탐이 나면 그냥 가지지 그래.]

"그런 게 아녜요, 벨타님."

[아니긴 뭐가 아니니? 요 며칠 밤만 되면 그걸 쳐다보고 있으면서.]

유리잔에서 느긋하게 헤엄치고 있던 벨타는 긴 목을 까닥였다.

[계집아이가 어여쁜 걸 욕심내는 게 뭐가 이상한 일이라고 그래?]

"하지만."

[네 어린 주인님은 벌써 그런 게 있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을걸.]

과연 그 말대로였다.

앤은 작센을 떠난 직후 묵은 성에서 클라리 경을 만났다. 그 붉은 머리의 기사는 앤에게 이 목걸이를 찾았다며, 주인께 전해달라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정말 욕심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다. 앤이 목걸이를 고이 들고 아롈의 방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전하.

아롈은 돌아앉은 채로 손을 내저었다. 다른 시녀의 도움을 받았는지, 이미 머리를 다 풀고 잠자리에 들 채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시중은 되었으니 나가라. 피곤하다.

-전하께서 찾아오라 명하신 목걸이 말씀이온데.

신성한 주님께 맹세하건대, 앤은 분명 그 때 목걸이를 내밀었다. 주인이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감히 들고 있기조차 두려운 가격의 보석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롈이 아주 조금만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보았던들, 앤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목걸이를 바치고, 이 목걸이를 찾아준 클라리 경의 공을 치하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못 찾은 거면 됐다. 나가거라.

-전하.

-나가라니까!

앤은 하릴없이 제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 뒤로 아롈은 단 한 번도 그 목걸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정말로 잊어버린 것이다.

[걔는 네가 그 목걸이를 자기 눈 앞에서 걸고 다녀도 모를 거야. 자기 걸 일일이 기억하는 성격도 아니잖아?]

과연 그랬다. 아롈은 자기가 입다 말고 앤에게 준 옷들도 태반은 기억을 하지 못했다. 앤이 받은 옷을 입고 갔더니 기장이 맞지 않는데 뭐 이런 옷을 입었느냐 면박을 주다가 나중에나 기억하고 재봉사가 게을러터졌다고 짜증을 낸 적도 있었다.

깔깔깔. 벨타가 웃었다. 벨타의 목소리는 '사람이 아닌 것'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아름다웠다. 다른 사람과 부딪칠 일이 많아진 아롈이 거의 매일 벨타를 앤에게 맡겨놓는 탓에 익숙해진 목소리인데도, 저렇게 악기처럼 울리는 웃음을 듣고 있으면 곧잘 기분이 몽롱해졌다.

[한 번 해 봐. 걸쳐보기만 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앤은 벨타의 말을 따라 목걸이를 목에 대보았다.

[거봐. 내 말이 맞지?]

벨타가 속삭였다.

[잘 어울려.]

거울 속의 앤은 분도 칠하지 않은 민낯인데도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다. 솔직히 말하면 이 목걸이는 아롈보다는 앤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작센 궁정에서의 아롈은, 물론 어여뻤지만 옅은 피부색 때문에 파란색의 보석을 얹으면 지나치게 차가워보였다. 짙푸른 사파이어는 앤의 검은 머리칼과 눈을 더 깊어보이게 만들었다. 어쩐지 주근깨도 없어진 듯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잠금쇠를 잠그려는 찰나 종이 울렸다.

댕. 댕. 댕.

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급히 목걸이를 서랍 속에 쑤셔박았다. 벨타가 꼬리를 흔들었다.

[다녀와.]

가슴이 돌덩어리라도 든 것처럼 무거웠다. 앤은 대충 머리를 한 번 쓸어내리고 촛대를 집어들었다. 앤의 방은 아롈의 방과 작은 복도를 통해 바로 이어져 있었다. 복도는 고작 두세 걸음 걸으면 끝날 거리에 불과했지만 심호흡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앤은 남부의 풍습대로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촛불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짙은 사향 냄새가 났다.

"일어나라."

고개를 들자 참 어여쁜 소녀가 촛불빛을 휘감고 앉아있었다. 어둑한 방 안 여기 저기에 촛불을 켜놓아 청보랏빛 어둠과 주황빛 불빛이 여기저기 뒤섞였다. 길고 곧은 백금발이 부드럽게 빛나며 꼭 후광처럼 보였다.

겨우 열여섯, 아직 달거리도 널을 뛰는 어린 소녀의 긴 목덜미에선 여인의 냄새가 났다. 아롈은 톡, 톡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자고 있었느냐?"

"아니옵니다."

"그럼 손을 좀 주무르거라."

앤은 들고 온 촛대를 탁자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아롈의 앞에 앉았다. 먼저 향유를 자기 손에 발라 비비고는 촛불에 데운 다음 주인의 손을 잡았다. 손은 얼음장처럼 찼다. 앤은 그제야 사향내가 누르고 있던 시큼한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앤은 이해했다. 어지간히 둔감한 처녀들도 신경이 곤두설 결혼식 전날 밤이었다. 하물며 그녀의 주인은 보통 여자들보다도 훨씬 성격이 예민했다.

"내일 보르디 쪽에 자리를 하나 얻어냈다."

앤은 다소 놀랐다. 노아이유 부인이 그토록 물어뜯었듯이 아비가 죽어 영지조차 없는 중부의 백작녀인 앤으로서는 감히 들러리의 들러리조차 될 수 없었다. 세르의 결혼은 여섯 대공가문의 직계손이 들러리를 서는 것이 전통이라고 했다. 성당에 들어가지 못 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로렌의 모든 귀족들이 황도로 몰려왔지만 성당에 들어설 수 있는 이들은 푸른 피 중에서도 가장 엄선된 사람들뿐이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필리프의 막내의 옆자리를 내주라 했다. 흠을 잡히지 않도록 해라."

​"​명​심​하​겠​사​옵​니​다​.​"​

"이거, 가져가거라. 쓰려고 주문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작은 상자였다. 아롈이 쓰고 싶지 않은 장신구를 넘기는 일은 앤의 짧은 시녀 경력 도중에도 번번이 일어나서, 아무 생각 없이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배신하지 마라."

앤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실로 직설적인 말이었다. 아롈은 북부 특유의, 전혀 완곡하지 않은 직설법을 종종 사용했으나 앤에게 '배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은 것은 앤을 받아들인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좀처럼 혈색이 돌아오지 않는 손톱과 대조적으로, 그녀의 뺨은 촛불 빛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는 작센 국왕의 오촌 조카이며, 내 오촌 조카이며, 네 할머니는 코시카의 여대공이었다. 네가 비록 키예나는 아니라 해도, 네 흠은 곧 나의 흠.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리라 믿는다."

"예."

"고개 숙이지 마라. 내가 아닌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마라. 네가 신의를 보인다면, 나는 충분히 네게 보답하겠다."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내가 코시카에서 밀려났을 때."

아롈은 그대로 공기를 삼키듯 입을 다물었다. 꿀떡, 목울대가 움직였다. 아주 잠시 갓 구운 빵처럼 말랑하고 무방비해보였던 소녀는, 다시 대리석처럼 딱딱하고 우아한 주인으로 돌아가 손을 거두었다.

"이만 되었다. 가서 자거라. 내일 시중은 들 것 없으니 벨타만을 신경쓰거라. 절대 몸에서 떼어놓지 말고."

앤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정수리로 변명의 재료가 떨어졌다.

"네가 가장 아름다워보이는 것들을 골라 치장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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