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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7. 꽃과 별과 수수께끼 (13)


 아롈은 장장 사흘을 누워있었다.

그 말인즉슨 앤이 사흘 내내 눈을 못 붙이고 간호를 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앤은 주인이 시퍼런 담즙을 토해내는 것을 보고 기함해서 꿀물을 올렸지만 아롈은 뭐든 입에 들어가는 족족 게워내기만 했다.

이 더운 날에 손발이 차게 식어 앤이며 다른 시녀들이 돌아가면서 탕파(湯婆)에 든 뜨거운 물을 수시로 갈고 손을 주무른 끝에 상태가 나아졌지만 그 다음날도 아롈은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결국 앤은 황후의 방에 제 발로 내려가 다시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황후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그 딸인 마담 미네트가 나와 이야기를 듣고는 앤을 돌려보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롈은 이를 갈았지만 금세 지쳐 늘어졌다..

방문객도, 남편도 전부 거절하고-특히 남편은 절대 오지 못하게 하라고 백 번은 강조했다- 잠을 청하기만 한 지 이틀이 지나 앓아누운 지 나흘이 되던 날, 드디어 아롈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치장을 시켰다.

앤은 시중을 들다가 다른 시녀들과 교대하여 혼자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하녀가 방에 식사를 가져다주겠지만 시녀들이 사용하는 식당은 또 하나의 사교장이었다. 너무 오래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뒷말이 떠돈다.

연회가 없는 날조차 항상 빈틈없이 꾸미고 손님을 접대해야 하는 이블린의 특성상 조식을 들러 온 시녀들의 옷차림만 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예식이나 연회에 어울리는 성장(盛裝)은 아니었으나 바로 그렇기에 더 어려운 법이다. 과하게 꾸미면 비웃음을 사고 그렇다고 정말 편하게 나오면 경멸받는다. 아무렇게나 다녀도 어여쁜 여인이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필사적으로 자연스러운 미를 연출하는 것이다.

앤만 해도 아침부터 머리카락을 인두로 지져 흐트러진 듯 풀어 내리고 물망초를 수놓은 선명한 청색 옷을 입었다. 손목에는 벨타가 든 목걸이를 두 번 감았고, 보석이 감긴 머리띠를 써서 청순한 느낌을 내려 했다.

눈밑에 그늘이 진 피곤한 얼굴은 분으로도 감추기 어려웠지만.

“어머나, 라루에트(종달새) 양. 간만에 얼굴을 뵙는군요.”

아롈의 결혼식에서 보르디 대공비가 그렇게 부르고, 그녀의 손녀인 소피가 따라 부르면서 자비관에서는 반쯤 공식이 되다시피 한 이름이었다. 앤은 다소곳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는 분명 리젤로트의 시녀였다. 시녀는 환하게 웃었다. 아마 백작부인이라고 했던 것 같다. 암묵적으로 백작녀 신분으로 인정받는-로렌에서 이 경우 상속녀가 아니고 남자 형제가 없는 앤의 신분은 붕 떠 있었다- 앤은 그녀와 위계가 같아 누가 먼저 말을 걸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사람 좋게 웃으며 앤의 앞에 앉았다. 하녀가 재빨리 둘의 식사를 날라 왔지만 입맛이 떨어졌다. 질척하던 소리와 채 삼키지 못한 교성과 기기묘묘하게 얽혀있던 알몸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시녀는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참 좋네요.“

“주님께서 미소 지으시는 듯 고운 날이옵니다.”

몇 가지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뒤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마담 라 세르께서는 아직 편찮으신가요? 제가 모시는 마담 리젤로트께서도 깊은 걱정을 표하셨답니다.”

마담 리젤로트는 칩거 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앤은 망막에 맺힌 장면을 문질러 지우듯 눈을 깜빡이고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제 쾌차하시어 거동에 불편함은 없으신 듯하옵니다. 전하께 마담 리젤로트께서 부인을 통해 안부를 물으셨다 전해 올리겠습니다."

"그래주신다면 감사한 일이지요.“

부인은 음식을 단 한 술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까.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닌가?

“그럼 다음에 뵙지요."

부인은 앤을 스쳐지나가며 앤의 치마폭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갔다. 실로 교묘한 손놀림이었다. 앤은 엉겁결에 그걸 잡아 주먹을 꼭 쥐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뾰족했다. 설마. 앤 역시 음식을 버려두고 제 방으로 급히 올라갔다.

잘못 보았을까. 계단을 밟는 내내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문을 닫고 몇 번이나 잠근 것을 확인한 앤은 땀에 젖은 주먹을 폈다.

알밤만한 다이아몬드가 눈부신 빛을 뿜었다.

 

아롈은 옷을 입고 머리를 남부식으로 잘게 땋아서 틀어 올렸다. 원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살이 빠지지만 이번엔 좀 심했다. 원래 숨도 못 쉬게 졸라매야 맞던 옷의 허리 부분이 대충 조이고도 조금 남았다.

얼굴은 더 심하게 상했다. 피부에 별 신경을 안 쓰고 대충 분을 바르던 버릇대로 화장을 했더니 얼굴이 희게 떠올랐다. 거울을 보고 기절할 뻔 했다. 한 번 한 화장을 다 지우고 화장수와 크림부터 다시 꼼꼼하게 바르느라 시간이 걸렸다.

옷을 입고, 화장을 하는 동안에도, 그리고 준비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속으로는 도망칠 생각만 가득했다. 지금이라도 픽 쓰러지면 안 될까.

남편은 오늘 괜찮다면 정의관으로 와줄 수 있겠느냐고 전갈을 보냈다. 눈치 없는 시녀 하나-클레르 드 뤼시용-가 벌써 몸이 많이 나아지셨다고 전갈을 가져온 시종에게 속삭여버렸던 탓에 더 칭병(稱病)하기도 힘들었다.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일이지만 하필이면 왜 지금일까. 자비관을 나서서 정의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작게 숨을 들이켠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없을 터였다.

정의관 경비병들의 경의를 뒤로 하고 문을 넘어서자마자 대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있던 남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아, 왔군요.”

아롈은 남쪽에 있는 내내 ‘먼저 말을 하지 않으면 타인과 대화를 할 일이 없다’는 규칙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갑자기 튀어나와 인사를 하는 남편에게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기다렸어요.”

"전하.“

“올라갈까요?”

세시안은 아롈의 손을 잡고는 물 만난 고기처럼 계단을 올랐다. 아롈은 얼결에 끌려갔다. 시녀들이 뒤를 조르르 따라왔다. 결코 앙증맞지 않고 길쭉한 손이 폭 감싸였다. 제멋대로였지만 빠르지는 않아서 발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중한 에스코트. 어찌나 아무렇지 않은 듯 구는지 하마터면 술자리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시선은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벌써 아롈을 보는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의관에는 생각보다 여자가 많았다. 고급 창부들, 연인이나 가족들, 혹은 심부름 온 시녀들. 황제에게 불려갈 때에는 긴장감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남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문. 소문. 지긋지긋한 소문. 그들 중 누군가는 황제에게 달려가고, 또 누군가는 필리프에게 달려가겠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정신없이 4층에 도착했다. 완전히 대칭형으로 생긴 건물이라 정의관의 집무실이 어디에 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롈의 응접실에 해당하는 곳의 문을 그가 손수 열었다. 데려온 시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블린에서 금박 장식이 없는 방은 또 처음이었다. 나무 냄새와 종이 냄새가 났다. 서류가 잔뜩 쌓여있는 커다란 책상과 책장이 놓여있었고, 다른 쪽에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자리가 있었다. 긴 의자와 낮은 탁자, 간단한 회의를 위한 높은 탁자가 모두 갖춰져 있다.

부러웠다. 이 방에는 책상이 있고 서류가 있고 잉크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리젤로트가 공들여 꾸며놓은 응접실보다는 훨씬 편안한 공간이었다.

“앉아요.”

세시안은 회의용으로 보이는 의자를 빼주었다. 북쪽에는 없는 예의였으나 미셸에게 배워 그럭저럭 아무렇잖게 앉았다. 그는 아롈의 건너편이 아니라 바로 옆에 앉고는 아롈을 보며 생긋 웃었다.

아롈은 그게 무슨 뜻인지 한 박자 늦게 알아채고는 시녀들에게 차를 내오라고 명령했다. 그녀들이 우르르 나갔다.

둘만 남았다. 아롈은 입술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하려고 했던 말이.

“무슨 일이십니까.”

약속을 당일에 잡는 것은 상당한 결례다.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물론 ‘급한 일은 아니니 일정이 있다면 다음에’라고 붙였으니 당장 오라고 명령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미리 약속을 잡는 것보다는 무례하다.

“오늘 다른 일정이라도 있나요?”

“없습니다.”

누가 억지로 다 취소해버리는 바람에.

“그럼 서두를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차라도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 하지요.”

그럼 이 불편한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뜻이다.

손이 아롈의 뺨을 쓸어내렸다. 아롈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서 비명이라도 지를 뻔 했다. 이 사람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손을 댄다. 알렉산드르 이후 허락 없이 아롈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엄밀히 말하면 알렉산드르도 불가능했지만- 이 사람이 처음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화장이 그렇게 잘못 되었던가. 거울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왔는데.

“별 것 아닙니다.”

“별 것 아니긴요. 이렇게 살이 빠졌는데요. 손목도 그렇고.”

그는 엄지와 검지로 고리를 만들어 아롈의 손목을 감싸보았다. 고리는 손목에 붙지 않고 남아 헐렁였다.

지금은 빈틈이 없다. 푹 쉬어서 몸 상태는 지극히 정상이다. 머리는 맑고, 심혈을 기울여 치장하여 사라판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아롈은 순식간에 허점을 드러낸 듯 부끄러워졌다.

“봐요. 뺨도 이렇게 해쓱하고.”

분가루라도 걷어낼 것처럼 꼼꼼한 손길이 눈가와 뺨을 문질렀다.

낮의 햇빛을 머금은 눈은 밤과는 완전히 달랐다. 눈가의 잔주름이나 피부의 색깔이나, 작은 점이나, 입술의 모양 등이 환하게 보여 낯설었다. 이렇게 생겼던가. 이런 눈으로 지켜보는 건.

똑똑똑.

시의 적절하게 노크가 들렸다. 뺨에서 손이 떨어졌다. 시종이 들어와 따뜻한 차와 달콤한 과자를 놓고 나갔다. 벨망 경만큼은 아니라도 얼굴이 익은 이였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바로 나갔다.

아롈은 차에는 손을 대지 않고 예의상 은제 포크로 파이를 조금 잘라 입에 넣었다. 겉에 설탕을 바르고 표면에 잎사귀 모양을 장식한 ​갈​레​트​(​g​a​l​e​t​t​e​)​는​ 며칠을 굶은 입에는 황홀할 정도였다. 턱이 저리게 아프면서 침이 괴었다. 허겁지겁 먹고 싶은 것을 참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전하. 저 역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용건을 지금 말씀하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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