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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8. 열 (8)


 아롈은 잠든 벨타를 앤으로부터 받아 목에 걸고는 침실에 앉았다. 옷은 갈아입지 않았지만 머리는 풀고 다시 가볍게 리본으로 묶었다. 하도 꽉꽉 땋아놓았던 탓에 머리카락은 타고난 고수머리인 양 보였다.

새 펜대에 촉을 끼우고 손목을 움직여보았다. 평소 쓰던 것보다 무거웠지만 무게중심이 잘 잡혀있어 썩 괜찮았다. 받침대를 오른쪽 상단에 놓고, 잉크웰에 푸른색과 붉은색 잉크를 적당히 번갈아 따랐다. 촉에 잉크를 찍어 매끈한 상아색 종이에 괜히 아무 말이나 끼적였다.

​л​ю​б​о​в​ь​(​사​랑​)​.​

종이에 맺힌 잉크가 천천히 스며들면서 진한 보랏빛으로 말라붙었다. 파란색이 평소 쓰던 것과 다른 톤인지 좋아하는 정도보다 색이 깊었다.

딱딱한 문자는 유연하게 휘어지는 낭창한 펜촉에 그리 어울리지 않는 듯해서 매끈하게 꼬리를 빼는 필체로 다른 말을 적었다.

LSJX.

L을 쓰는 순간 부끄러워졌고, 결국 남은 것은 머리글자뿐이었다. 어린 아이가 쓴 듯 어설픈 모양새를 한 네 개의 알파벳을 잠시 바라보던 아롈은 종이를 치우고 새 종이를 꺼냈다.

하루를 통째로 논 덕분에 할 일은 부족하지 않게 쌓여있었다. 체스말과 메모는 응접실에 펼쳐놓았으므로 일단 단순한 잡무부터 시작했다. 시녀들에게 시킨 계산을 검산하는 일이야말로 머리를 비우며 시간을 보내기에 적격이었다.

단순한 곱셈과 나눗셈, 덧셈과 뺄셈은 암산으로 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아롈은 굳이 또박또박 글씨를 써가며 계산을 대조했다.

평소와 달리 쉽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괜히 부채를 들어 땀을 날리거나, 시계를 보기를 몇 번이었던가. 두 번째 검산을 마치고 펜대를 받침대에 올려놓았을 때 시간은 두 시를 넘겼다.

늦는다. 오늘은 안 오는 걸까. 남편은 여태껏 약속을 어긴 적이 거의 없었다. 혹시라도 일정이 달라지면 항상 알려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니 인두로 잘 지져놓아 곱슬곱슬한 머리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어머니를 닮아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머리모양이 조금 헐렁한 것을 제외하면 어디에 나가도 썩 문제가 될 만한 차림은 아니었다.

귀걸이를 다시 할까 하며 귓불을 만지작대던 아롈은 창가에 가서 저 멀리 분수대를 내다보았다. 남편의 당부를 생각하며 두어 발짝 떨어져 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블린에 온 이후 아롈은 용건 없이 방 밖에 나가는 법이 없었고, 항상 시녀를 동반하고 다녔다. 도서관에서처럼 중간에 떼어놓더라도 미리 알려둔 행선지 밖으로는 벗어나지 않았다. 코시카에서는 이보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더라도 황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나갈까. 작센 왕궁에서 마르타에게 찔릴 뻔한 일은 역시 큰 충격이었다. 멘 공작 루이 앙투안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미친 여자가 살지도 않거니와-산다면 필리프가 말을 안 해주었을 리가 없었다-, 자비관 입구에는 근위병이 서 있다. 이블린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잠시 자비관 바깥으로 바람을 쐬는 데에 큰 문제가 있을까.

이윽고 아롈은 촛대를 들고 손수 문을 밀었다. 처음으로 밀어본 문은 예상외로 묵직했다. 문을 나서자 저 멀리 어둑어둑한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새카만 것이 사람이라도 하나 삼킬 것 같았다. 침이 넘어갔다.

역시 어두운 곳은 조금 무서웠다. 어지간한 악몽을 꾸지 않으면 불을 끄고 자는 버릇을 들여 방 안의 어둠에는 익숙했고, 달이 떠 있는 밤에 돌아다니는 것도 사람이 있는 곳에선 괜찮았지만 이렇게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고 빛 한 점 없이 스산한 복도라니.

이제라도 앤을 깨우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방에 돌아가서 남편의 당부대로 얌전히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는 것이 옳을까.

하지만 아롈은 천천히 발을 뗐다.

역시 보고 싶었다.

 

빛이 닿는 곳마다 어쩐지 스산해보였다. 낮에는 화려하던 금박 무늬도 밤에 보니 흉흉한 장식으로 탈바꿈했다. 아롈은 제 발소리에 흠칫 놀라 입술을 깨물거나 괜히 벨타가 들어있는 목걸이는 만지작거리는 등 바싹 긴장한 채 자비관 1층까지 단숨에 내려왔다.

아무리 용이 거짓말쟁이네 뭐네 해도 여기에서 아롈이 죽으면 용도 난감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키겠다는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어찌나 무서웠던지 1층 바닥을 딛는 순간 파하-하고 참던 숨이 터져 나왔다.

심호흡을 한 아롈은 건물 문 쪽으로 다가가 일부러 기척을 냈다. 들고 있던 창끝을 겨누려 하던 근위병들은 아롈을 알아보고 발을 굴러 예를 표했다. 손을 팔랑팔랑 저어 예를 거두라고 시키고는 분수대로 걸어가자 아롈의 등뒤에서 근위병들의 눈빛 교환이 바빠졌다.

그리고 아롈이 저 사 층의 창문 위치를 헤아려 불이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할 즈음에는 격한 수신호와 표정으로 의사소통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쪽에서 보이는 것은 침실이고, 응접실은 건물 반대편으로 가야 창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롈은 천천히 정의관과 자비관 사이에 나 있는, 중정(中庭)으로 향하는 길로 향했다.

이제는 정의관 근위병까지 합세해 누가 따라갈 것인가, 따라가긴 해야 하는 것인가 자비관 근위병들에게 소리 없이 악을 썼다. 근위병들은 직업군인인 평민이었고, 장교인 귀족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에게 마담 라 세르란 하늘처럼 높으신 분이었던 것이다.

항상 빈틈없이 치장하고 시녀들을 달고 다니던 그녀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에 촛대 하나 들고 몸소 산책 비슷한 것을 나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들이 아는 바가 없었다.

아롈은 정말이지 별 생각이 없었다. 호위가 필요하면 명령하면 그만, 시립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더라면 앤을 데려왔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의 목에 걸린 용은 근위병 전체를 데려오는 것보다 더 힘 있는 호위였다.

아롈은 중정에서 얼쩡거리던 붉은 머리의 청년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멘 공작?”

멘 공작 루이 앙투안 드 발루아, 혹은 앙투안 드 클라리 경은 그 시각 중정을 뱅뱅 돌며 먼발치에서 4층 방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십 대로서 어여쁜 여자를 보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나이였고, 자신의 감정에 취해있었다.

로렌에서 결혼한 여자와의 염문은 드문 일도 아니라는 점이 그의 연정을 부추겼다. 아니, 기실 결혼한 남자가 미혼의 여성을 정부(情婦)로 삼는 것이야말로 성교회가 금지하는 굉장한 죄악으로 여겼기 때문에 불륜은 기혼자끼리 성행했다.

물론 앙투안이 이복 형수와 무언가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해보려는 불순한 마음은 품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자라온 환경에서 이는 ‘절대로 안 되는 금기’ 또는 ‘죄악’으로 치부되지 않았으며, 그는 자비관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 행동이 어떻게 여겨질지에 대해 명확한 생각이 없었다.

오를레앙 기사단 소속인 ‘클라리 경’이라면 근위병들에게 희한한 놈으로 낙인찍혔겠지만 그는 어쨌거나 황제의 사생아인 멘 공작으로서 알려져 있었고, 굳이 따지자면 황실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중정에서 얼쩡거렸다.

그러던 그의 앞에 아롈이 나타났을 때 그는 잠시 이게 환상인가에 대해 의심해보았다.

여전히 눈부시게 예뻤다. 어떤 조화를 부린 건지 곧았던 금빛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화려하게 구불거리며 갸름한 얼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목 부분이 깊숙이 파인 옷 덕분에 길고 가느다란 목이 돋보였다. 정성들여 틀어 올린 것이 아니라 풀고 리본으로 한 갈래로 가볍게 묶었을 뿐인데도, 그녀는 예뻤다. 어쩐지 살이 조금 빠진 것도 같은 것이, 화장기 없는 얼굴이 도리어 청순해보였다.

그녀는 보란 듯이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고는 호칭을 고쳤다.

“아니, 클라리 경.”

목에 핏대가 섰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인사도 안 하나?”

“아, 저, 혼인 축하드립니다.”

그는 허둥거리며 허리를 숙였고, 아롈은 피식 웃었다.

“인사가 늦은 것 같지만 일단 받지.”

미네트에게 잘못 걸려 용에 대한 사실을 탈탈 털린 뒤로 앙투안은 혹시 미네트에게 걸릴까 두려워 자비관에 가지 못했다. 하루 이틀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제 와서 혼인 인사랍시고 당당히 들어가기에는 시일이 너무 지나버렸다.

“그나저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그것이야말로 앙투안이 가장 두려워하던 질문이었다.

“어, 그러니까, 그게…….”

그는 필요할 때에는 잠잠한 자신의 직감을 원망했다. 이걸 미리 알려줬더라면 진작 도망쳤을 것을.

앙투안은 차마 이복 형수를 눈앞에 두고 ‘당신의 창문을 보면서 그 자태를 상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배짱은 없었다.

“밀회?”

앙투안은 펄쩍 뛰어올라 아니라고 부정했으나 아롈의 눈에는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나 다름없이 보였다.

아롈의 착각은 전적으로 미셸 탓이었다. 그는 리젤로트와 처음 약혼했을 때에 자비관의 그녀의 창문에 비치는 그림자를 하염없이 보았다 운운하며 아롈에게 자신의 애정을 과시한 적이 있었다. 아롈은 그 행동을 대단히 징그럽다고 여겼던 탓에-밤에는 침실에 기어들어가 곱게 잠을 잘 것이지 왜 남의 창문에서 그림자를 훔쳐본단 말인가- 그 일을 잘 기억해두고 있었다.

아롈은 작센 왕궁에서 조금 평가가 나아진 앙투안을 훑어보았다.

이 시간에 창밖에서 얼쩡거리다니. 게다가 저 눈빛 하며. 앤의 염문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시녀들의 말이, 몇 번 밤의 정원에서 만나는 것은 물론 앙투안 쪽이 밤의 정원에서 얼쩡거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이는 아마 동갑이나 한 살 차이 정도일 것이다. 이렇게 보니 허우대는 썩 나쁘지 않았다. 신분은, 사생아지만 앤도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아버지를 두었다.

계승권은 방계 황가가 다 죽어 나자빠진 뒤에야 쓸모 있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적자로 인지받았다고 하니 연금도 계속 나올 것이고 아마 멘 지방의 조세권을 가지고 있겠지.

앤의 신랑감으로는 꽤 괜찮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앤은 전하 지위가 없지만, 그는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작센 국왕, 아롈의 친사촌-에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앤의 아버지는 아롈의 고종사촌인 동시에 작센 국왕의 이종사촌이기도 했으니, 영지 없는 HSH 공작으로 삼아 달라 부탁한다면.

아롈은 이들의 연애가 삼 년을 무사히 가면 결혼시켜 주리라 결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주지.”

앙투안이 알면 거품을 물고 땅을 쳤겠으나, 아롈은 완전히 결론을 내렸다. 그의 파란 눈에는 열정의 열기가 명백히 스며있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한 소녀였고, 자신의 직관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생각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원래 목적대로 고개를 들어 사 층을 확인해보니 역시나 불이 켜져 있었다. 대부분의 창문이 캄캄한 자비관과 달리 정의관의 창문은 반 넘게 밝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자들은 밤에 만나 응접실에서 노는 일이 거의 없으니.

한편 앙투안은 정의관 사 층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빛에서 부드러운 애정을 발견하고는 절망해버렸다.

이복형인 세시안은 그가 봐도 정말 좋은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마음이 흔들렸다. 정말이지 뭘 어떻게 해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저 동그란 어깨를 끌어안는다거나, 보드라운 손을 잡고 싶은 욕망 따위는 절대 없는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꽃잎처럼 분홍빛을 띠는 저 입술로 웃으며 앙투안, 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생각도 분명 하긴 했지만 이상한 생각은 맹세코 하지 않았다!

자신을 사모하는 혈기왕성한 십대 청소년의 머리에서 어떤 발칙한 생각이 오가는지 꿰뚫어볼 재주가 없었던 아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뒤돌아섰다.

“그럼.”

앙투안은 차마 호위하겠다느니 하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덩그러니 남겨져 머리를 쥐어뜯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P.S. ​h​t​t​p​:​/​/​y​a​r​d​.​j​o​a​r​a​.​c​o​m​/​m​a​r​o​n​t​r​e​e​에​ 가시면 제가 그린 그림들이 몇 장 있습니다. 관심있으시면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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