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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8. 열 (13)


  코시카 황도의 사람들은 아직도 겨울을 살고 있었다. 릴레벨트 해를 타고 올라온 열기가 완연히 여름이라고 불릴 만한 형태를 갖추었으나, 사람들은 겨울 내내 연탄재에 콜록거리던 벽난로와 페치카(화덕)를 해방시켜주기는커녕 오히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아이들을 단속했고, 장을 보러 나가더라도 혹시 책을 잡힐까 걸음을 빨리 해서 집에 들어왔다.

그러한 분위기의 황도 한 저택 응접실에 건장한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비록 군복을 걸치고 있지는 않았으나 짧은 머리카락, 곧은 자세, 악무는 것이 습관이라 사각형으로 불쑥 튀어나온 턱 등을 보면 어린아이가 보아도 군인이라 알 수 있었다.

“대체 저 로렌 여자의 횡포를 어디까지 두고 볼 셈인가!”

털이 부숭부숭 난 두꺼운 손이 응접실 탁자를 내리쳤다. 오랜 시간 총과 검을 잡아 단단해진 손은 굉장한 소리를 냈다.

“어허, 언사를 조심하십시오, 샤마노프 장군.”

모여 앉은 남자들은 침묵을 지켰으나 은근히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나마 입조심을 하라고 한 남자도 딱히 ‘로렌 여자’를 옹호하려는 의도는 없엇다. 순전히 발언한 샤마노프를 위한 발언이었다. 성토를 한 남자, 샤마노프 장군은 눈에 힘을 주었다.

“본관이 틀린 말을 하였는가, 카라키예프 대령! 우리 코시카 남자들이 외국 계집에게 겁을 먹어 이리 몸 사리고 있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지난 달 근위대 영관급 장교의 집에 화재가 발생했다. 코롤프 ​중​령​(​п​о​д​п​о​л​к​о​́​в​н​и​к​)​은​ 제2 근위연대의 부대장이었다. 그는 쫓겨나듯 남쪽으로 시집간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최측근이었다.

중령은 따르던 여대공이 계승권을 포기한 뒤에도 공공연히 옐레나 키릴로브나 여제의 즉위를 비난했다. 그나마 가장 정당한 피를 지닌 어린 미하일 대공에게 황위를 물리고, 황실 어른인 콘스탄틴 대공에게 섭정을 맡긴 뒤 뒷방으로 물러서는 것이 옳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마침 화재가 났을 무렵 그는 고주망태가 된 채 친구의 집에서 코를 골고 있어서 무사했으나, 집에서 자고 있던 그의 열 살, 여덟 살 먹은 딸들과 아내는 숯덩이가 되었다. 충격을 받은 그는 군에 사표를 내고 본가로 내려갔다.

‘우연찮은 불행’을 당한 것은 비단 코롤프 중령 뿐만이 아니었다. 옐레나 여제에게 반기를 드는 귀족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대놓고 황제를 습격하는 세력이 발각되었다며 황도에 계엄령이 떨어졌고 여러 명의 귀족들이 교수대에 매달렸다.

자연히 귀족들의 반발이 물밑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모임은 샤마노프 장군의 응접실 말고도 코시카 황도 여기 저기, 혹은 지방 여기저기에서 술모임이나 차모임을 가장해 일어나고 있었다.

옐레나 여제의 신병을 지키는 이들이 코시카 근위병이 아닌 로렌 중앙 기사단(로렌은 아직까지 군대에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제1 보병 연대, 일명 푸른 장미 연대라는 사실이 반항심을 더욱 부추겼다.

북부에서 코시카 황제는 신의 제일 된 대리인이며 신이 직접 권위를 부여한 푸른 피 중의 푸른 피였다. 태고로부터 내려온다는 키옌의 피야말로 그 권위를 뒷받침하는 기둥이었다.

샤마노프 장군의 ‘로렌 여자’라는 지칭은 그들의 적개심을 응축한 상징물이나 다름없었다.

키옌이 아닌데도 제위에 오른 예로 소피야 여제도 있었으나, 그녀는 엄연히 북쪽 출신의 여인이었고, 표트르 대제의 정당한 유언에 따라 황위를 승계했다. 또한 그녀는 엄연히 키옌의 피를 이은 후손이 장성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황위에 오른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옐레나 여제는 다른 나라의 군대를 빌려 황위에 올랐으며 자신의 손으로 키옌의 피를 이은 파블 1세를 살해했다. 공식적으로 파블 1세는 로렌 기사가 살해한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그걸 그대로 믿을 만큼 멍청한 사람은 없었다.

코시카 근위병이 정권 교체의 날 흘린 피는 결코 적지 않았다. 옐레나 여대공을 인질로 하였으므로 그날 당직을 서고 있던 제3 근위연대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살육 당했다.

지금 응접실에 모여 있는 군인들은 모두 근위대에 몸담고 있거나, 한 번 이상 근위대를 거쳐 승진한 자들이었다.

응접실 문이 열렸다. 사내들의 어깨에 긴장이 들어갔다.

“늦었네.”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를 벗은 남자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모자는 코시카 전통의 원통형이 아니라 군복에 딸려있는 ​삼​각​모​자​(​t​r​i​c​o​r​n​)​였​는​데​,​ 대단히 낡았다.

앉아있던 군인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오셨습니까, 대원수 각하.”

“뒷방 퇴물은 무엇 하러 부른 거요, 샤마노프 장군.”

그 자신의 말과 달리, 그만큼 ‘퇴물’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남자도 드물었다.

남자, 드미트리 블라디미로비치 예가체프 장군은 코시카 군의 전설이었다. 그는 예가체프 공가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군생활 중 자식이 없던 형이 죽자 예가체프 공위를 물려받았다.

안나 여제 시절에 소위로서 임관했고, 소년 시절부터 웨데나와의 전쟁에 참전해 청년 시기에는 눈부신 전공을 쌓았다. 안나 여제가 붕어하여 이반 3세 치세로 들어선 다음에도 빠르게 계급장을 갈아치운 끝에 입대 28년 만에 소장의 계급장을 달았다. 근위대 총대장을 역임했고, 말년에는 대원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옐레나 여제가 즉위하자마자 사표를 제출했다.

예가체프 장군은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담뱃갑 역시 그가 쓰고 온 모자만큼이나 낡았고, 구석이 찌그러져 있었다. 그는 딱 한 개 들어있는 식민지 산 고급 시가에 불을 붙였다. 가느다랗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설마 술자리에도 전관예우가 있는 것은 아닐 테고. 사내들끼리 모여 혼기 찬 처녀들처럼 수다라도 떨고 있는 건가?”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었지만 웃는 사람은 없었다. 샤마노프 장군은 너스레를 떨며 예가체프에게 자리를 권했다. 장군이라고는 해도 샤마노프와 예가체프의 사이에는 십 년 넘는 군 경력의 차이가 존재했다.

“맞습니다. 소뿔을 어떻게 꺾어야 염증이 나질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지요.”

“소뿔……?”

“예. 소뿔은 속이 비어서 자칫 잘못 꺾었다가는 고름이 속까지 퍼져 소가 죽게 되지요. 그러니 불로 지져 잘 소독을 해줘야 합니다.”

“멀쩡한 소뿔은 왜 꺾고 그러나.”

“말씀대로 소가 멀쩡하다면야 저희라고 왜 소를 잡고 싶겠습니까. 미쳐 날뛰며 아무 곳이나 치받으니 그러는 게지요. 그나마 수소는 아닌 암소라 다행이라 해야 할는지요.”

응접실에 모여앉은 일곱 명의 군인들은 예가체프 공을 포함해 전부 세습 귀족 출신이었다.

로렌 장교의 상당수는 돈을 주고 귀족의 지위를 구입한 법복 귀족이었으며, 세습 귀족들은 이름만 올릴 뿐 실질적인 위치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중부를 비롯한 소국의 군대에는 평민 장교의 수가 귀족 출신 장교의 수를 눌렀다. 대륙을 통틀어 이토록 세습 귀족 비율이 높은 군대는 코시카가 유일했고, 코시카 군 중에서도 근위대 장교는 전부 세습 귀족 출신이었다.

이는 높은 문맹률과, 권위적인 귀족들의 의식, 중류층의 부재, 표트르 대제로부터 이어지는 군국주의적 사고, 안나 여제와 이반 3세로 이어지는 호전적인 군주의 즉위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결합한 소산이었다.

군대는 어느 장소 어느 시대에나 가장 보수적인 조직일 수밖에 없으나, 코시카 군대는 개중에서도 특별히 보수적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반 3세 치세에 임관한 자들이었고, 주군을 따라 파블 1세를 못마땅해 하는 인식이 암암리에 박혀 있었다. 그 뿐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반 3세가 유언으로 점지한 후계자인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을 밀어내고 사생아인 표트르 유리예프스키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려는 시도는 규율과 체제 속에서 살아온 군인들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쫓겨난 옐레나 여대공이 어린 나이와 적은 경험, 그리고 여성이라는 결정적인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쉽게 근위대를 장악해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장교들의 성향이 큰 몫을 했다. 물론 정당한 후계자인 여대공이 사서 폐위(廢位)라는 약점을 짊어지면 군이 황위를 휘두를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옐레나 여제는 코시카 군을 장악할 수도 없었고, 장악할 생각도 없었다. 로렌의 군사 지원을 등에 업고 있는 옐레나 여제에게 있어서 코시카 본국의 상비군은 하루 빨리 국외에 치워 소모해버려야 할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대-피아스트 전은 필요 이상으로 장기화되었고, 의미 없는 해안 순시선 증강으로 인한 반도 삼국과의 긴장이 촉발되었다.

물론 사표를 낸 예가체프는 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샤마노프 역시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겉에 문장이 음각된 것으로 한눈에도 멋스러운 고급품이었다. 손톱이 닳아 없어져 짧고 투박한 손끝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문 장군은 담배 끝을 쟁반 위에 있는 시가 근처로 가져가 숨을 빨아들였다.

훅, 불이 붙었다.

“불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묵직한 시선이 오갔다. 샤마노프가 말하는 불이 고작 담뱃불이 아님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예가체프 장군은 일 분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선선히 대답했다.

“불이라면 얼마든지.”

예가체프는 탁자 위에 무언가를 놓고 일어섰다. 잠시 남자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가, 탁자 위의 물건을 확인한 뒤 어두워졌다. 부싯돌과 백린이었다.

“저녁식사에 늦으면 아내가 바가지를 긁어서. 먼저 가보겠네.”

장군이 거의 피우지 못한 시가를 버려둔 채 막 응접실을 나서려는 순간, 대위의 계급장을 단 청년이 뛰어 들어왔다. 걸치고 있는 붉은 제복은 기병 연대의 것이었다.
“아버님! 큰일 났습니다!”

“이반. 무슨 일이냐.”

“코, 코롤프 중령님께서 시체로 발견되셨습니다!”

“뭐라고?”

누가 분위기를 망치로 후려친 듯했다.

“부두 어느 창고에서 발견되셨다고 합니다.”

예가체프는 샤마노프를 돌아보았다. 샤마노프는 침울한 얼굴로 담뱃불을 비벼 껐다.

“이런, 불이 꺼졌군요.”

“샤마노프.”

“불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지난 화를 꽤 고쳤습니다. 
번거로우시더라도 다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용은 변한 바가 없으니 재독하지 않으셔도 앞으로의 전개를 이해하시는 데에는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묘사와 연애 장면이 조금 추가되었습니다.

P.S.1. 오늘 이야기는 상당히 어설퍼서 시간 나는대로 고치겠습니다. 어째 요즘 귀찮게 해드리는 것 같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5.08.30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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