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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2)


     

“청록색이 참으로 잘 어울리시는군요.”

아롈은 백서른여덟 번째쯤의 칭찬에 웃으며 감사를 표하면서도 지긋지긋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황실이 주최하는 연회였다. 거울의 홀에서 두세 번 대공가 주최의 연회가 열렸으나 아롈은 참석하지 않았다. 인사를 오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쇄도했다.

그런데 아롈은 본의 아니게 눈에 띄었다. 인사를 온 숙녀들의 반 이상이 흰 옷을 입고 있었기 떄문이었다. 그저 새하얀 옷, 흰 바탕에 금실로 장식한 옷, 은실로 장식한 옷, 흰 바탕에 자잘한 잔꽃 무늬를 넣은 옷 등등, 흰 색 바탕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양이란 모양은 전부 이 곳에 모여있는 느낌이었다. 눈까지 부실 지경이었다.

단순한 청록색 옷감에 분홍색 리본으로 장식한 옷을 입은 아롈은 남쪽의 평균보다 큰 키의 덕까지 더해 흰 비둘기떼에 둘러싸인 공작처럼 눈에 띄었다.

인사를 온 소피는 결혼식 때문에 시작한 유행이 이제야 빛을 본다며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런 그녀도 흰 옷감으로 옷을 지어입고 있었다. 아롈은 자신의 웨딩 가운이 이런 사달을 내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코시카에서 아롈은 치장이나 복장에 대한 칭찬을 그리 많이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신분이나 지위가 있으니만큼 입에 발린 칭찬 몇 번은 당연했으나 진심은 어려 있지 않았다. 그에 대해 불만도 없었다. 눈에 띄고 싶어 안달하며 꾸미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치장에 크게 시간을 쏟지 않는 아롈이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그거야 말로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즉 이 상황은 지속 가능한 현상이 아니었다. 아롈은 영양가 없는 칭찬들을 웃어넘기고 필리프가 뽑아준 목록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데에 치중했다.

필리프의 혹독한 훈련은 효과가 있어서, 인사를 해오는 사람들 중 처음 듣는 이름은 없었다. 누구의 친척이니, 누구의 사돈이니 하는 정보를 머릿속에서 꺼내 이야기하며 아는 척을 하자 금세 시선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혼맥이 이리저리 얽혀있는 정보를 제대로 기억하는 건 어려운 일이기도 했으며, 아롈은 로렌에서 평균적으로 데뷔하는 숙녀들과 비슷하거나 더 어린 나이였으므로 다소의 감탄이 섞여있었다.

주력으로 외운 보르디나 나바르의 가신들뿐만 아니라 남편의 손님들 몇 명에게도 아는 체를 했다. 부르고뉴 측의 인물들 몇 명은 아롈을 보는 얼굴까지도 바뀌었다.

분위기는 금세 부드러워졌지만 아롈은 그럴수록 긴장했다. 저 멀리에는 필리프가 보고 있었고, 옆에는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소피가 있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실수를 하지 않는지 세 번은 점검해보고 이야기했다.

게다가 더웠다. 살갗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처럼 덥고 건조했다. 아롈은 더위에 약했다. 하물며 오늘은 치마를 예쁘게 부풀리기 위해 속치마도 여러 겹 걸쳤고, 허리도 평소보다 더 조였다. 목이 말랐다.

“안녕하세요. 공작부인.”

“어머나, 참으로 어머니를 닮으셨군요.”

한창 지쳐있을 무렵 한 공작부인의 순서가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있었다.

조제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아롈의 기억 상 전 부르고뉴 대공의 셋째 딸로, 전 오베르뉴 대공의 둘째 며느리였다. 부르고뉴에는 부르고뉴 대공인 카트르 말고 남자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는 엘리엔의 절친한 친우였답니다.”

코시카 폐하, 혹은 여제 폐하가 아닌 ‘엘리엔’이라고 했다. 아롈은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속으로 차게 비웃었다. 친우라고? 것도 절친한?

-아롈 여대공 전하. 체사레브나께서는 지금 바쁘십니다.

-그래?

-예. ……를 만나고 계세요. 나중에 전하께서 오셨다고 전해 올리겠습니다.

어린 시절, 알렉산드르가 떠나고 아롈은 어머니의 방 근처를 얼쩡거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시녀들은 아롈을 잘 달래 돌려보내려 이런 저런 사람들의 핑계를 댔다.

수많은 손님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자랐으므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적어도 저런 종류의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알았다. 하물며 어머니는 보르디고 그녀는 부르고뉴. 친했을까.

그녀의 얼굴에는 미숙한 아롈조차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진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호의가 아니라. 어미와 똑같은 성격일까, 아닐까, 그렇다면 호구일까, 아닐까. 그런 의문으로 가득해 보였다.

아롈은 저 멀리 있는 필리프를 돌아볼 것도 없이 미소 지었다.

“어머니의 친구 분을 뵙게 되다니 저로서도 기쁩니다.”

“이쪽은 제 아들들이랍니다.”

셋 모두 나이가 많았다. 그 중 장자는 남편과 비슷한 나이로 옆에 부인을 데리고 있었다. 조제핀이 어머니의 연배인 만큼 그것이 응당 당연했다. 죽은 오라비인 이반 파블로비치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스물여덟일 것이다. 아롈보다 열두 살이 많았으니.

아롈은 그들에게 손등에 입 맞추게 하지 않고 가볍게 인사만을 건넸다.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네.”

대공의 손자인 공자들은 장자가 아니라면 그 자신들까지만 귀족의 일원으로 인정될 뿐 그 아래로 작위를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성직자가 되든, 군인이 되든 제 살 길을 찾아야 할 터였다. 가문에 속해 있는 남작이나 백작 작위를 떼어줄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그러지 않는다.

잘못하면 가문의 세가 작아지고 땅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중부가 그 꼴이 아닌가. 현 오베르뉴 대공에게는 베리 공작이라는 아들이 있는 만큼 조카들이 뒤를 이을 확률도 적었다. 그토록 의미 없는 아이들이건만, 조제핀은 아들들을 여왕의 보석처럼 뽐내며 웃었다.

“어머니가 놓친 자리를 딸이 가져가는군요.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신지.”

속이 긁혔다. ‘어머니가 놓친 자리’란 마담 라 세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롈의 어머니는 보르디의 엘리엔으로 불리던 시절 현 황제인 루이 오귀스트 황제에게 파혼 당했다.

거기까지라면 넘어갔을 것이다. 조제핀은 다시 한 번 혀를 휘둘렀다.

“어서 빨리 아이를 얻으시는 게 좋답니다. 부부지간이란 결국 아이를 낳기 위한 것, 뒤를 이을 아이 없는 부부는 열매 없는 과실수 같은 것 아니겠어요.”

‘뒤를 이을’이라는 부분이 아주 의미심장했다. 옐레나 여제는 자식을 내세우는 대신 자신이 직접 쿠데타를 일으켰다. 네가 얼마나 뒤를 이을 만하지 못했으면 그랬겠냐는 뜻으로 해석하라는 걸까.

아니, 아롈은 발끈하려는 자신을 내리눌렀다.

너무 나간 생각이었다.

남쪽에는 아롈의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여제 같은 머리 아픈 자리에서 도망치셔서 다행이에요. 여자의 행복은 역시 바쁜 일은 남편에게 맡기고 주님께서 주신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거지요. 그래서 세르께서는 ​잘​해​주​시​나​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처음에는 조롱이라고 생각했으나 얼마 걸릴 것도 없이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평생 동안 여자가 대공위나 공작위나 왕위, 심지어 황위를 이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북쪽의 일에는 신기할 정도로 무지했고, 외국에 그런 여자들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그 사람들은 어쩐지 불쌍하다’고까지 이야기했다. 조제핀이라고 해서 예외일 이유가 없었다.

다른 나라니 풍습과 생각이 달라 어쩔 수 없다고, 비굴하게 웃어넘겼다. 어느 정도는 이골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화가 났다. 임신, 임신, 임신!

얼마 전에 다섯 번째 월경이 터졌다. 시녀들은 신부가 어린데도 왜 아직 임신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치였다. 대체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앤을 족쳐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안 봐도 뻔했다.

-알자스 공작의 탄생을 위하여!

아직 시집온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첫날밤도 치르기 전부터 모두들 아이 얘기만 했다. 남편이 지금 잘해준다 해도 그것은 잠깐, 어차피 여인의 미모는 시들고 젊음은 마모되어 늙어가는 것,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다른 여자에게 눈이 돌아갈 테니 아들을 낳아야 나중에 행세할 수 있다고들 입방아를 찧어댔다.

나아졌다고 생각했건만, 다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아롈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어쩌면 웃는 얼굴로 굳어버렸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남부 갈리아 어가 아니라 페란토, 동부 말, 중부 말, 북부 말 등 아롈이 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뒤져도 알 수 없었다.

어쩌지. 아무 말도 안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텐데. 여긴 이렇게나 사람들이 많고, 실수하면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텐데. 그래. 그렇게 얘기해야지.

그렇군요.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공작부인. 이렇게.

“그렇군요.”

그 때 풍부한 목소리가 아롈의 말을 가로막았다.

“에모주 공작부인. 축원은 감사합니다만, 너무 서두르시는군요. 아이는 주님께서 정하시는 바이지 사람이 정하는 바가 아니잖습니까.”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빡인 조제핀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눈웃음쳤다.

“세르께서도 참. 사람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어쩌실 수 없는 것도 분명 존재하지 않나요?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잘 아시는 것 같던데요.”

이놈의 이블린은 남의 밤일에 대한 것이 공공의 안주나 다름없었다. 대놓고 입에 올리며 까르르 떠들어댔다. 그나저나 받아칠 수준하고는. 만일 아롈 자신이었더라면 ‘후계자에 대한 기대 때문에 너무 서둘렀다’고 웃으며 빠졌으리라.

세시안이 아롈의 손끝을 슬며시 눌렀다. 아롈은 남편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 역시 얼굴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좋은 말씀입니다. 그 다복함을 본받고 싶군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좋은 소식이 들렸다지요, 공자.”

세시안이 눈짓을 하자 조제핀의 장자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조제핀은 자연스레 이야기에서 빠졌다.

과연. 관록이 있었다. 아롈은 잠시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쉬었다. 짧게 이야기를 마친 세시안은 아롈을 잡아당겼다. 눈이 마주쳐 반사적으로 웃었다.

“잠시 쉴까요?”

앞으로 주 2~3회 올릴 것 예정입니다. 초고는 챕터 9까지 쌓았고요, 챕터 9 연재 다 하면 챕터 10 연재 쌓기 위해 열흘 쉴 ​생​각​입​니​다​만​.​.​.​ㅠ​ㅠ​ 2학기 일정이 지나치게 과중할 경우에는 별 수 없이 휴재하고 겨울방학을 기다려야겠지요.
챕터 9는 무사히 연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P.S. 부르고뉴의 조제핀은 외전1 보르디의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 보면 나오는 분입니다. 레벨업 해서 돌아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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