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4)
“제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질려서요.”
그는 빠르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평소의 상냥함이나 다정함이 있을 자리를 화와 짜증이 밀어내고 앉은 데다 빈정거림마저 스며있었다. 아롈은 보지 못하는 각도에 있는 그의 얼굴은 충분히 차가웠다.
“도대체가. 남자들은 여자들의 기 싸움을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체면 때문에 여자에게 화는 못 낼 테니 알아들어도 상관없다고 믿는 건지 모르겠군요. 전자라면 저도 머리를 달고 있다고 항변하고 싶고, 후자라면 분이 치밀어서.”
하도 꽉 끌어안아 어깨가 아팠다.
“제가 뻔히 보고 있는데도, 눈앞에서 혓바닥에 칼을 달고 소중한 사람을 칼로 석둑석둑 다지면서 웃고 있죠. 지긋지긋해요.”
“에모주 공작부인 말씀이십니까?”
“네. 그 징그러운 여자요.”
대답은 단호했다.
그 거친 말투에 경악을 느낄 새도 없이 아롈은 주먹을 쥐었다. 하마터면 분위기도 모르고 탄성을 내지르며 기뻐할 뻔했다. ‘소중한’이라는 말이 연모의 감정보다는 친애의 감정이 짙게 드러난 말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도, 샘물에서 펄쩍펄쩍 노니는 은빛 고기처럼 행복했다. 남편에게 ‘소중한’ 사람.
파문을 그리는 마음이 톡톡 심장을 두드렸다. 물색도 모르고 좋았다. 피곤하고 화가 났다는 사람 앞에서, 화를 내주어 좋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고작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런 ‘말’조차 아롈에게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롈은 얼굴을 가리려고 더욱 깊숙이 안겼다.
제발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피곤하다. 아파서 예민해지는 바람에 거의 잠들지 못했다. 몇 가지만 더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아 낮에 남편 몰래 일어나 시녀들을 입단속하고 일처리를 하느라 요 며칠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은 아롈도 마찬가지였다. 허리를 너무 졸라매서 배도 고프고, 신발이 작아서 걸을 때마다 아팠다. 침대에 머리만 대면 화장도 지우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이 이렇게 굴면 아롈은 또 설레서 한숨도 못 잘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큰일이다.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 보름은 아프면 안 되는데. 그러니까.
세시안은 아롈을 갑자기 품에서 놓아주고는 손으로 어깨를 감싸 쥐었다. 눈이 똑바로 마주쳤다. 아롈은 간신히 표정을 수습했다.
“아렐르가 아까의 말뜻을 이해 못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웃고만 있었어요?”
공식석상에서 마담 라 세르가 가신의 부인에게 화를 냈다간 평판이 나빠질 테고, 그러면 필리프가 화를 낼 테니까. 필리프는 아롈의 가장 큰 약점을 잡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의 비위를 맞추어 줘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런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은 많고, 그들을 상대해서 일일이 화를 낼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말하면서도 우스웠다. 분명 그녀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단지 꾹꾹 눌러 참았을 뿐이었다.
“전하. 그런 사소한 일에 반응했다가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저러는 거라 도리어 헛소문이 퍼지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전하께서도 그걸 아시기 때문에 웃어넘기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군요……. 저도 그냥 웃었죠.”
뭘까. 그에게 있어 아롈의 알렉산드르나, 파피나, 마리야 같은 것, 마음의 바닥의 바닥에 깔려 있는 감정을 갈고리처럼 푹 찍어버렸다.
한순간 뇌리에 아주 희한한 생각이 스쳤다. 직관이 사람을 관통하듯, 아니 가늘고 투명한 실로 기억을 알알이 엮듯 그렇게 뭔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 통찰은 너무 가냘파 아롈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 무의식으로 가라앉았다.
아롈은 언뜻 생각하고 잊어버린 깨달음 대신 남편에게만 집중했다.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대체 무엇이 항상 여유롭던 사람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 걸까.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롈은 그에 대한 애정으로 침묵했다. 느닷없이 파헤쳐진 나무의 진액처럼 흐르던 감정이 호박(琥珀)처럼 굳을 때까지.
대강 휘몰아치는 생각을 정리한 듯 희미하게 웃은 세시안이 아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무엇입니까?”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밀 사항만 아니라면 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고 아롈은 굳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 ‘부탁’은 아롈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안아줄래요?”
“예?”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잠자리에서 남편이 생글생글 웃든, 애타는 얼굴을 하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슬리는 대로 넘어가곤 했지만, 이번만은 절대 안 된다. 침실에서 냈던 가장 부끄러운 목소리며 보였던 가장 비밀스러운 얼굴들을 다 끌어 모아다가 펼쳐놓아도 여기에서 치마를 들치는 것에 댈 게 아니었다.
“저, 전하, 여기서는…….”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허락해버릴 것 같아 아롈은 주변을 흘끔흘끔 둘러보았다. 이미 전적이 산더미처럼 있었다. 적당히 어두워서 사람의 눈이 편하긴 하고, 문은 분명히 닫혀 있긴 하지만. 아, 왜 장의자는 두 사람이 누워도 될 만큼 넓고 긴 걸까.
온 이블린 의자를 당장 갈아치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다지고 있는데, 뺨이 쿡 찔렸다. 놀라서 돌아보자마자 입술과 입술이 쪽, 맞닿았다. 작은 새의 부리가 쪼듯이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설마 지금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요?”
아. 아롈은 석양처럼 부끄러워졌다. 세시안은 아롈이 파닥파닥 일어나 도망치지도 못 하고 잠시 멍해진 틈을 타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갇혀버렸다. 아롈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지금 당장 혀를 깨물어도 이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도망칠 수 있는 수만 가지 생각으로 어쩔 줄 모르는 아롈의 가슴에 지친 새가 날개를 접듯 남편은 고개를 기댔다.
“안아줘요.”
“전하…….”
다들 기다릴 텐데요.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머뭇거리는 아롈의 마음을 채근하듯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로 잠시만요. 조금만 있다가 같이 나가요.”
귀가 바싹 가슴에 닿아있었다. 스토마커에 울퉁불퉁한 리본자수가 놓여있으니 불편할 텐데도. 새카만 머리카락이 아롈의 흰 살결 위로 흩어져 턱까지 닿아 간지러웠다. 아롈은 몸의 각도 때문에 거의 정수리를 턱에 걸치다시피 해야 했다.
세시안은 아침마다 단정하게 머리를 정리하는데도, 저녁쯤 들어오면 머리에 더듬이가 솟아났다. 바로 그 더듬이가 아롈의 숨결에 살짝 날렸다.
남편을 사랑한다. 그리고 남편이 아롈을 사랑해주었으면 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아롈의 모든 것을 종이 들여다보듯 알고 있는 것처럼, 대신 화를 내주고 지쳤으니까 안아달라니.
아릿하게 달콤해서 불공평하다. 정작 아롈은 남편이 뭘 해줬으면 좋겠는지, 무얼 원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아롈은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면서도 조심조심 손을 올려 머리를 감싸 안고는 다른 한 손은 날개뼈 위에 얹었다.
용기를 내어 새카만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파묻고 쓸어내렸다. 보드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