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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26)


 “전하. 대체 왜 제게 화를 내시는 겁니까?”

기실 세시안은 아롈이 화를 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앤 폰 레르헨펠트에게 명령을 했던 일 이후 처음이었다. 평소의 아롈도 표정이 풍부한 편은 아니지만, 지금 그녀가 풍기는 날카로운 분위기에 비하면 창가에 앉아 볕 쬐는 고양이나 다름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신 것은 전하십니다. 그리고 저는 한 가지 질문에 답변 드리겠다고 맹세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의 권리를 사용하시면 대답해드리겠다고 한 겁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세시안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런 사태야말로 그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일인 동시에 그가 가장 원했던 상황이었다. 조금만 덜 피곤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렐르에게 저는 뭔가요?”

“논점을 흐리시는 겁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말아주십시오.”

“대답을 위해서 필요한 질문입니다. 미안하지만 아렐르가 먼저 대답해주었으면 좋겠군요.”

아롈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배우자십니다.”

“주님의 앞에서 신실과 신의를 맹세한 남편으로서, 고작 그 정도의 이야기도 맹세 없이는 들을 자격이 없는 건가요?”

“고작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전하께서 별 것 아닌 사안이라고 판단하셨다고 해서 저 역시 그래야 합니까?”

“일의 경중을 따지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럼 질문을 정확하게 바꾸지요. 저는 아렐르가 손목을 찌르려는 걸 봤어요.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니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할 정도로 아렐르가 정신적으로 몰려있었던 것은 분명해요. 아렐르가 제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제가 믿음직하지 못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아렐르의 심정을 들을 자격이 없을 정도로 하찮기 때문인가요?”

“굳이 하찮다는 어휘를 고르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제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어요. 그래서…….”

“하.”

핏기 없는 입술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의사를 부를 때 옷은 갈아입었지만 화장은 하지 않아서, 뺨이며 얼굴이 창백했다. 얼굴빛만 보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허리는 곧았다.

“그렇군요. 제가 모욕당한 이야기를 전하께 낱낱이 전하지 않으면, 전하께서는 하찮아지신다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다음부터는 이 점을 숙지하고 모욕을 당하도록 하겠습니다.”

“빈정거리지 말아요.”

“먼저 빈정거리신 건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명백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전하께 어떤 질문이든 하나 답변해드리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저는 맹세를 허투루 하지 않습니다.”

“결국 저는 그 맹세 없이는 이야기를 들을 주제가 못 된다는 거군요.”

“전하, 아까부터 자극적인 어휘만 고르시는 이유가 저로 하여금 대답을 토하게 만들기 위함이시라면, 헛수고십니다. 저는 강제성 없이는 세상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가슴이 답답했다.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무시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그를 싫어하는 것이라면 괜찮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기다리면 될 테고, 기대도 덜었을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롈은 정말로 의아한 듯 턱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낯선 공격성 너머로 익숙한 표정이 설핏 비쳐보였다.

“기회를 쓰겠다고 한 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그럼 소원대로 말해드리겠습니다. 왜 그리 꺼려하십니까?”

그는 드물게 대답을 망설였다.

세시안은 지금껏 아롈이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애정이란 ‘사랑한다’고 계약서를 쓰듯 말을 주고받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눈이 달린 남자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티가 났다.

최소한 아롈이 그에게 차지하는 위치만큼은 아롈도 그를 생각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세상 누구에게도’라니. 모르겠다. 어떻게 같을 수 있는지. 저 아래 거울의 홀에서 춤추는 남자를 아무나 잡아와서 그와 함께 저울에 달면, 저울이 평형을 이룬다는 소리인가?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문은 순식간에 확신을 좀먹었다.

정말로 맞게 생각한 건가? 있다고 생각한 감정은 사실 착각이었던 게 아닐까?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자신이 애정 없이도 달콤하게 웃어오지 않았던가. 지금은 몰라도 결혼 초에, 웃고 떠들고 끌어안던 때에, 진심이 얼마나 담겨있었지? 왜 아롈의 말이나 웃음은 전부 진심이라고 생각했을까?

혼란스러웠다. 무엇 하나 믿을 수 없게 된 순간, 그는 하려던 질문을 던질 수 없게 되었다.

저는 아렐르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 아닌가요?

아니, 이 질문이 아니다. 꺼낼 생각도 자신도 없지만 조금 더 솔직한 질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졌을 때 아롈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면, 그가 받을 상처가 두려웠다. 겁먹은 그는 기세등등한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돌려 도망쳤다.

“그러는 아렐르야말로 왜 그리 이야기해주는 것을 꺼려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잖아요.”

우회전술이라고 믿었는지는 몰라도, 분명한 적전도주였다.

그 순간 아롈은 미세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그 다음 날아든 말은 다행히도 허점을 빗겨 찔렀다.

“그럼 제가 전하께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변하는 게 있습니까? 제 수치심만 커질 뿐입니다.”

“도와주겠어요.”

“전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해주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면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아뇨. 전하께서는 일을 해결하실 수 없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지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어요. 그러니까 원하는 걸 말해요. 제가 뭘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제……!”

아롈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높아졌다.

동공이 커졌다. 도자기 인형처럼 흰 얼굴에 피가 몰려 붉어졌다. 아롈은 의자 팔걸이를 움켜잡고 헐떡거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야기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소리가 헛 나왔을 뿐입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아렐르. 거짓말하지 말아요.”

“거짓말이…….”

차마 아니라고는 하지 못했다. 원래 거짓말에는 서툴렀다. 아니, 사실 거짓말을 할 일이 없다시피 했다.

세시안은 갑자기 아롈이 구석에 스스로를 몰아버린 상황에 얼떨떨해졌다. 순식간에 전황이 뒤집힌 것이다.

“부탁할게요. 말해줘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비명에 가까웠다. 소리를 지른 아롈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가 깜짝 놀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이, 아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늦었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계속 말을 웅얼거렸다.

“지금 내려가도 늦을 겁니다. 전하께서는, 아, 손이. 저 혼자라도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니까 앤을 불러서.”

세시안은 따라 일어나 아롈의 손을 잡아챘다.

“내려가야 합니다.”

“안 가도 돼요.”

“어제 이유도 없이 빼먹었잖습니까. 오늘도 안 갈 수는 없습니다.”

“지금 도망치려는 거잖아요.”

“말하기 싫습니다. 놔주십시오.”

왜 갑자기 이렇게 흥분했을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는 아롈은 사회성이 좋지 않고, 말수 적고 무뚝뚝한 소녀였다. 좀처럼 흥분해서 화내는 법도, 웃으며 날뛰는 법도 없었다. 하물며 소리를 지른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겁에 질린 듯 손목이 조금 떨렸다. 얼굴이 온통 붉어졌다.

“놔주십시오.”

“아렐르. 진정해요.”

아롈은 다시 소리를 지르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간신히 어깨를 늘어뜨렸다. 흥분한 어깨가 이내 다시 들썩였다.

“알겠습니다. 다시 안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렐르?”

“손목이건 어디건, 다시 유리로 찌르지 않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맹세도 하겠습니다. 만족하십니까?”

“아렐르. 여길 봐요.”

그러나 아롈은 반대로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감추었다. 레몬빛 머리카락이 눈부셨다.

“그게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황제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어디 가서 무슨 멍청한 소리를 듣든 다시는 자해 따위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끝나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만 하십시오.”

멍청한 소리라니. 무슨 말일까.

세시안은 아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몸을 낮추고 고개를 들자 그제야 얼굴이 보였다. 초록빛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가슴이 한 번 무너졌다.

아롈은 황급히 잡히지 않은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표정은 금세 정돈했지만 눈가에는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뭐하시는 겁니까.”

“아렐르. 그 맹세 지금 쓰지요.”

“무슨…….”

“아까 하려던 말, 이야기해줘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 전에 말하려고 했던 말, 그 말만 들으면 그만하겠습니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아롈은 앉아있는 세시안을 노려보았다.

“그걸 들으셔도,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건 들어보고 생각하도록 하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주겠어요. 그러니까 말해요.”

“대답을 강요한 것을 후회하실 겁니다.”

“제가 감당할 몫이겠지요.”

“제가 원하는 것은……,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은…….”

“듣고 있어요.”

아롈은 이를 악물더니, 칼로 목을 치듯이 맹세를 지켰다.

“제 계승권을 돌려주십시오.”

여름눈송이 연재 중 가장 쓰기 힘든 화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틀 내내 앉아서 이 부분만 썼는데 어딘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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