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여름 눈송이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32)


 “사랑해?”

“그걸 왜 네게 말해야 해?”

“이십칠 년, 유모 젖도 나눠먹은 사이에 그것도 못 물어?”

사랑이라. 통속적인 단어였다. 세시안은 일부러 그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질문으로 답을 받아쳤다.

-논점을 흐리시는 겁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괜히 술을 콸콸 따랐다.

“넌 리즈를 사랑해?”

“당연하지.”

“왜?”

미셸은 눈부시게 잘생긴 얼굴로,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예쁘잖아.”

“그런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내 여동생이지만 솔직히 과장이 심한데.”

“넌 여자 외모를 품평할 자격이 없어. 눈은 왜 달고 다니는 거야?”

“난 미추를 모르는 게 아니야. 미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지.”

“리즈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 네 눈이 정상이면 그걸 모를 리가 없어.”

“내 눈이 이상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 눈이 다 이상할걸.”

“여기 어디 장갑이 있었는데…….”

“장갑 던지면 뭐하게? 검 없다며.”

“우리에겐 주님께서 주신 무기가 있어.”

“아, 아까 잘랐어야 했는데.”

“내가 말한 건 주먹이라고, 미친 자식.”

술기운이 오른 둘의 대화는 그야말로 주정뱅이의 표본이라 할 만 했으나, 그들은 나름대로 진지했다. 맨정신일 때도 한 가지 대화를 하고 있으면 여기저기에서 곁다리 주제가 튀어나오곤 했다. 취기는 갈팡질팡하는 폭을 조금 더 크게 만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잠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소년처럼 킥킥거렸다.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고민해보다가, 세상에서 가장 길고 이상한 이름을 만들어냈다. 선조들의 이름을 그 중에서 몇 개 뽑아내서 솔직히 우리 가문의 선조가 잘못했네, 너희 가문의 선조가 잘못했네 말다툼을 했다.

그런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유쾌한 잡담이 쏜살같이 오가다가 마침 화제가 떨어졌을 즈음이었다. 미셸이 갑자기 분위기를 잡았다.

“세시안. 친구로서 무례한 충고 하나만 해도 돼?”

세시안이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인 루이 세바스티앙 조제프 자비에의 세바스티앙에서 적당히 철자를 따서 만든 애칭이었다. 세시안은 세바스티앙이라는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인 미셸과 이마를 맞대고 고민해서 애칭을 지었다.

그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거의 모든 서명을 세시안으로 했으나 썩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를 세르나 전하나 오라버니가 아닌 세시안이라고 호칭하는 사람은 고작해야 미셸 정도였다.

“해.”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단지 네가 지쳤다는 이유만으로 끝으로 삼기로 했다면 그것도 비극이야.”

다시 이 이야기인가. 세시안은 쓰게 웃었다.

“미셸. 방금 너는 네 부모님을 모욕한 것 같은데. 대부분의 부부는 배우자에게서 사랑을 찾지 않아.”

세시안은 그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러 제외했다. 삼십 년 째 회자되는 연애결혼을 한 부모님 슬하에서 자랐지만, 감히 평가하자면 그들의 결혼이 행복해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우리 부모님이 오를레앙 승계 문제 때문에 결혼하긴 하셨지만 두 분이 다시는 재혼 않고 혼자 살겠다는 생각은 않으셔. 네가 말한 대부분의 부부들도 그래. 그런데 넌 아니잖아.”

미셸은 술로 목을 축였다.

“그래서?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재혼하라는 뜻이야?”

“아니, 네가 위안 삼을 곳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아내에게 충실하는 건 괜찮아. 이번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아. 그런데 그 이유가 단지 네가 지쳤기 때문에, 더 상처받기 싫어서 그런 거라면 그만 두라고. 차라리 아롈에게 시간을 쏟는 걸 그만 두고 따로 애정을 쏟을 곳을 만들어. 그게 정부든 하다못해 네가 좋아하는 책이든.”

세시안은 쓰게 웃었다.

“정말 놀랄 정도로 무례한 말이네.”

“그래서 미리 물어봤잖아? 해도 되냐고.”

“나는 네가 아렐르와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름을 부르기에.”

“꽤 좋게 생각해. 하지만 그 호의의 대부분은 그녀가 네 아내라는 점에서 온 거지.”

미셸은 이런 당연한 말까지 해야 하느냐는 투였다.

“그리고 이건 아롈을 위한 말이기도 해. 널 좋아하잖아.”

“어떻게 확신해?”

“리즈가 그러던데. 반해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고.”

“미셸.”

“내 생각도 그래. 아니면 싸웠겠어? 실망할 게 있었다는 거고, 새삼 이모님께 실망하진 않았을 테니, 너한테 화가 난 거겠지. 그 성격에 네게 화낼 만큼 기대할 이유가 애정 말고 또 있을 것 같진 않아.”

LSJX. 이복동생이 머뭇거리며 알려준 ‘사랑’이라는 단어. 보랏빛의 잉크.

그 쪽지가 그대로 가슴 안주머니에 들어있는데도, 세시안은 확신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 자신이 알아차린 것과 아롈이 그간 보였던 행동 중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그 성격은 또 무슨 소리야. 아렐르는 부당한 일을 당하면 화풀이도 못한다는 거야?”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저지르는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속으로 삭이는 성격이라는 뜻이야. 바꾸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짜증 좀 내고 마는. 눈앞에서 주먹다짐이 오가고, 웬 미친 여자가 소리 지르며 쓰러져도 시끄러운 게 싫으니 넘어가자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이제 말이 되네. 아까 항의 안 하겠다고 한 거, 공작이 결정한 게 아니라 그냥 본인이 하기 싫다고 한 거 아니야?”

“그건 또 무슨……. 네 말이 맞다 치자. 날 좋아하니 더 잘 해주는 게 아니라 걷어차라고?”

“네가 행동을 바꾸면 그 쪽에서도 대처를 하겠지. 아롈도 따로 애인을 만들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키우든. 처음에는 죽을 만큼 힘들어서 울지 몰라도 아직 어리잖아. 금방 극복할 거야.”

그러니까 ‘너를 먼저 생각해’. 미셸은 그렇게 말했다.

세시안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미셸의 말은 딱히 반박할 만한 곳이 없었다. 대부분의 부부는 백 중 아흔아홉은 애정 없이도 잘 살아간다. 푸른 피들의 결혼이란 언제나 감정보다는 이권이 우선하는 법이다. 아이는 같이 만들고, 연인은 따로 만든다. 혈통은 영원하고 감정은 일시적이니. 제법 합리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지금 그는 아롈에게 남는 시간을 모두 쏟아 붓고 있었다. 그 시간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독서 시간도 늘어날 테고, 충분히 쉬거나 이런저런 다른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 세시안은 그 모든 여가를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감정적 유희가 필요하면 다른 여자를 고르면 된다. 차기 황제의 정부로서 이블린에 들어오고 싶은 아름답고 재기 넘치는 여자들은 얼마든지 있고, 그가 몇 명의 정부를 두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마음만 먹으면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자비관에 있는 소녀 한 명을 즈려 밟을 결심만으로도 대가는 충분했다.

마음속의 그가 속삭였다.

미셸은 루이즈 마리의 일을 몰라서 이러는 거야. 그냥 급사했다고만 알고 있으니까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지. 혹시라도 지금 아롈이 잘못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그리고 다른 세시안이 속삭였다.

멍청이. 그런 죄책감보다는 너 자신을 우선하라는 뜻이잖아. 끝이라고 단정 짓는 건 비극이라는 말 못 들었어?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그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될 선택의 분기점임을 알아차렸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아롈이 끝이라고 정했다. 아롈과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세시안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롈의 계승권을 빼앗는 데에 협조했다. 그리고 아롈은 자신의 계승권 때문에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아마 그런 원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평생의 미련으로 남을지도 몰랐다.

아롈은 오늘 그의 어머니 때문에 손목을 그으려고 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런 괴롭힘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르그리트 안 황후가 얼마나 집요한지 알고 있었다. 또 애정을 부은 여자가 눈앞에서 죽어나가면, 얼마나 타격을 입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는 오늘 아롈에게 신뢰를 잃었다. 맹세를 어겼고, 상처 입을 것을 뻔히 알면서 홀로 놔두고 도망쳤다. 신뢰를 되찾을 날이 없을지도 몰랐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멀어지려면 지금 뿐이었다. 상처를 붙이듯 화해를 한 뒤 멀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잔인한 일이 될 터였다. 그 모든 것을 차분히 검토하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마음 한 갈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모든 것을 검토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세시안은 웃었다.

“네 말이 다 맞아.”

그가 생각을 하는 동안 앞에서 리젤로트의 초상화를 쳐다보고 있던 미셸이 로켓을 탁 닫았다.

“그래.”

“그런데 그게 싫어.”

미셸은 조금 놀란 듯했다. 세시안은 친구에게 다소의 배신감을 느꼈다. 이런 결과를 유도하려고 충동질한 줄 알았건만 멀어지라는 말이야말로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갈색 눈이 동그랬다.

“너 아롈을 사랑해?”

“지금 아렐르가 혼자 있을 게 걱정 돼.”

생전 구경 한 번 못 해 본 낯선 땅에 홀로 똑 떨어진 북쪽나라 황녀님. 귀하게 자랐을 텐데도 사교성이 나쁘다 못해 없다시피 했다. 저 높은 느티나무에 올라가 가만히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표범처럼 혼자였다.

그나마 리젤로트와는 조금 어울리는 듯 했으나, 먼저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친척인 보르디 가문의 사람들과도 의례적인 만큼 어울렸다. 그 쪽에서 찾아오니 받아준다는 듯이 고상하기만 했다. 그렇게나 예쁘니, 사귀던 남자 몇은 있을 줄 알았건만 그것도 아니었다.

나뭇가지 위가 좋아서 스스로 올라가 스스로 내려올 수 있으면 괜찮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올라갔는데 애옹거리며 도움을 청하는 것조차도 부끄러워서 고고한 척 입 다물고 있는 거라면 어쩌지. 모두 괜찮을 거라고 넘기면, 홀로 그 위에서 말라 죽어버릴 것이다.

미셸은 진중하게 충고했다.

“동정심에 휩쓸리지 마. 동정심이 평생 가진 않아.”

“동정심이 아니야. 사실 아직 아렐르에게는 아직 화가 나 있어.”

“너, 싸웠다고 해서 설마 했더니 열두 살 어린 여자애한테 정말 진지하게 화를 냈어?”

세시안은 경멸 어린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건 아렐르도 마찬가지겠지. 서로 화난 상태에서 내가 도망쳐 나왔거든. 더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서. 나한테는 네가 있고, 리즈가 있고, 그밖에도 하소연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데, 아렐르에게는 남편에게 정을 떼고 정부라도 만들어 즐기라는 말을 해줄 사람이 없겠지.”

“결국 그게 동정심 아니야?”

“지금 혼자서 울고 있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버둥대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그게 싫어. 죽도록 싫어. 이게 동정심이야?”

“내가 보기에는?”

미셸은 비밀 서랍 아래칸의 서랍을 열어 시계를 꺼냈다. 동그란 시계 위판에는 오를레앙의 사자를 돋을새김 해놓았고, 시계 안쪽 위에는 수은을 칠해 거울로도 쓸 수 있는 고급품이었다.

“지금 네 시 십 분 전이네. 우는 게 아니라 자고 있을 걸? 조금 있으면 해가 뜨겠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럼 무슨 말인데? 내가 물어봤잖아. 사랑해? 아니면 그만 둬. 뻔히 가시밭길이야. 쉬운 길 놔두고 왜 돌아가려고 해? 그 이유가 죄책감 말고 더 있어?”

미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 불쌍하지. 누가 몰라? 낳아준 어머니한테 쫓겨나서 여기까지 시집왔는데 당연히 의지할 곳이 없겠지. 내가 봐도 안타까워서 조금은 잘해주려고 노력했어. 불쌍해 보이면 손 가는 건 당연해. 고난에 처한 숙녀(Damsel in ​d​i​s​t​r​e​s​s​)​를​ 돕는 건 기사의 의무니까. 그런데 네 인생 전부를 털어서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쓰지 말라고. 내 말 못 알아들어?”

“…….”

“너 지금 지쳤잖아. 폐하께서 화를 안 내셨어? 내가 오늘 대회의에 안 나가서 모르지만, 아마 폐하께서 원하신 대로 표가 나오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런데 폐하께서는 대들지 못하지. 왜냐하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네가 못 한 거니까. 그래서 아롈하고 싸우다가 터진 거겠지.”

그는 세시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일어나서 가면 너는 영원히 아내에게 헌신할 거야. 폐하께 헌신하듯. 다시 화내면서 뛰쳐나오는 일도 없겠지. 적어도 내가 아는 너는 그래. 그래서 말리는 거야. 네게 그 여자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

예뻐서 그런 것도 아니잖아. 내가 널 몰라? 미셸의 목소리가 가라앉다가 이내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아, 술 마시고, 큭, 소리 질렀더니 목이. 콜록.”

하지만 세시안은 답답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 동정심, 죄책감, 책임감뿐일 거라고 단언하는 거지?

물론 시작이 동정심과 죄책감과 책임감임은 부정하지 않는다. 결혼으로 맺어진 신부가 아니었다면 아롈이 얼마나 가엾든 의례상의 유감만을 표하고 지나갔을 테니.

예뻐서가 아니다. 그 미모, 물론 감탄스럽고 흥미로울 때가 있지만 그저 그 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총명함이었다. 언어능력, 지식, 교양이 놀라울 정도로 풍부했다. 네 가지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모르는 고전이나 책이 드물었다. 외국어 면에서는 세시안보다도 나았다.

총명함 다음은 성실함이었다. 빠르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했다. 빼먹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엉덩이를 한 번 붙이고 앉으면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는 열여섯 살 때 그만큼 하지 못했다. 그 때는 갓 결혼해서 허둥거리던 시절이었다. 공부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검술은 하기 싫어 죽을 것 같았다. 사람이 쓸 수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황제든 거지든 예외란 없다. 한 가지에 매진하면 다른 것들은 등한시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손쉽게 파악했다. 그 굉장한 지식과 교양과 일처리 실력은 어린 시절을 거세한 성실함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도 해본 적 없고, 저것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안타까워서 뭐라도 더 채워주고 싶고, 같이 하고 싶었다. 이걸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네 인생 전부를 털어서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쓰지 말라고. 내 말 못 알아들어?

아니야, 이건 단순히 ‘의무’이기 때문에 품은 감정이 아닌데. 나는.

한 문장이 불쑥 튀어나갈 뻔했다. 가슴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솟았다. 발루아의 문장은 푸른 장미라는 것처럼. 로렌의 수도는 렌이라는 것처럼.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당연하게 알고 있는 답이 톡, 꽃망울을 터트렸다.

“미셸. 다시 한 번 물어봐.”

“뭐?”

“다시 한 번 물어보라고.”

미셸의 눈이 좌우로 굴러갔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 입가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어렸다. 깍지 낀 손을 그의 무릎 위에 올리자 미셸은 매우 거만해보였다. 그는 턱을 치켜 올린 채 물었다.

“사랑해?”

“당사자한테도 안 한 말이야. 네게 맨 처음 들려주긴 아깝네.”

삼 초 정도의 침묵이 흐르고, 세시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미셸은 멍한 얼굴로 그의 폭소를 지켜보다가, 의자에 올라가있던 쿠션을 집어던졌다. 쿠션이 세시안의 팔뚝에 맞고 떨어졌다.

“네 문장의 사슴뿔에게 감사해. 네가 세르만 아니었어도 오늘 장갑 다섯 번은 던졌을 거야.”

그 문장의 사슴뿔이 아직도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세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가봐야겠어.”

“정말 후회 없겠어?”

“아마도.”

미셸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쫓겨나면 와라. 술은 같이 마셔줄게.”

“고마워.”

세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놓았던 웃옷을 걸쳐 입었다. 가슴에 쪽지가 닿자 말도 안 되지만 조금 들떴다. 취하긴 한 모양이었다.

“너.”

미셸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그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이것만 물어보자.”

“뭔데?”

“대체 어디가 좋아?”

천 겹의 나뭇잎처럼 얇게 펴져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덧없는 호감과 애정 위에 불을 뿜은 것은 자존심, 혹은 명석함.

새파랗게 날이 서서 아롈을 지탱하던 자존심과 사람을 뚫어본 듯한 명석함. 그 둘 중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 순간에 반했다.

당장 쓰러져 울거나 실신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롈은 끝까지 허리를 곧게 펴고 서있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도, 눈물을 닦고, 그에게 맞설 무기를 찾고, 그를 충분히 상처 입힐 때까지 버텼다.

계승권 이야기로 시작된 죄책감에 섞여든 건 분노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깊숙이 찔러 아프고, 슬프고, 화가 나게 만든 검 끝은 심장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채 자각하기도 전에 도망쳤다. 강렬한 증오와 분노 앞에서 무방비하게 갓 태어난, 혹은 갓 깨달은 여린 애정을 내보이기 두려웠으므로. 또 그 애정을 스스로 공격하여 죽여 버리는 것이 전처에 대한 온당한 예의라고 느껴졌으므로. 스스로 솟아난 분노와 애정을 주체할 수 없었으므로.

세시안은 그 모든 이야기를 버무려서 한 마디로 줄였다.

“예뻐.”

조금 망설이다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세상에서 제일.”

다시 쿠션이 날아왔다. 이번엔 가슴에 맞았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P.S. 설익은 혹은 농익은 챕터는 한 편 더 올라오면 끝입니다. 다음 화는 아주 짧게 올라올 예정입니다. 같이 붙이면 흐름이 깨질까봐 나누어 올릴게요. 오늘 밤에 또 뭐가 올라오면 그거라고 생각해주세요.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