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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1)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세시안은 잠에서 깼다. 그는 로렌 황족답게 기척에 민감한 편이었다. 로렌을 통틀어 그의 앞에서 먼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는 헛기침, 발소리, 옷 소리 등을 통해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사람을 빠르게 알아내야 했다.

“으.”

침대가 아닌 장의자에서 잠든 탓에 등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그러나 그는 등의 통증을 신경 쓸 새도 없이 침대로 달려가 천개를 걷어 올렸다. 성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모델로 탐낼 법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백한 얼굴과 흰 시트 위로 흩어진 눈부신 금발에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드리웠다.

소녀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의미 있는 말이 한 마디라도 흘러나올까 두려운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흐릿하게 신음했다. 관자놀이부터 가슴팍까지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가슴이 절박하게 오르내렸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렐르.”

베개를 묵직하게 채워 넣은 거위깃털이나, 새싹 위에 내려앉은 봄눈처럼 부들부들한 목소리. 아롈은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항상 두근거렸다. 음성에 감싸여 눈을 감으면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듣고 싶지 않다. 영원히 듣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아렐르!”

날카로운 여성의 음성이 거위 깃털 베개를 찢었다. 아롈은 눈을 떴다.

검은 어둠이 갈라지고, 햇살이 쏟아져들었다. 코시카 황실에는 웨데나의 아스트리드 공주로부터 전해진 색소 부족증이 내려왔다. 선조의 유전적 결함을 물려받은 아롈의 홍채는 빛에 취약한 연둣빛이었다. 아롈은 눈이 부신 나머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깜빡이다가, 습관적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눈 앞이 새카매졌다가, 새빨갛게 변했다. 쉽사리 시야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렐르. 괜찮으세요?”

리젤로트였다. 아롈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눈을 대여섯 번 깜빡였다. 겨우 눈앞이 보였다. 이제 곧 신부가 될 그녀는 고동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롈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셸은 보르디의 소피와 파혼하고, 리젤로트와 다시 약혼했다. 리젤로트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마르그리트 안과 리젤로트를 비교하여 이블린이 와르르 끓어올랐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아이를 낳기 전에 결혼식을 마치지 않으면 태어날 아이가 사생아가 된다. 따라서 황실과 오를레앙은 부랴부랴 결혼식을 서둘렀다.

그래, 그래서 리젤로트가 웨딩 가운을 같이 봐달라고 부탁했다. 아롈은 승낙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졸았단 말인가? 아롈은 낭패를 본 느낌에 혀끝을 깨물었다. 리젤로트의 시녀 몇 명과 아롈의 시녀 몇 명만 동참한 조촐한 자리였지만 아롈은 시녀들의 입을 믿지 않았다. 빌어먹을.

“리젤로트. 실례했습니다.”

“아니에요. 어디 아프신 것 아닌가요? 대회의 때도 이틀이나 앓아누우셨다고 들었는걸요.”

그건 아픈 게 아니었다.

하루는.

그리고 하루는.

아롈은 혀를 끊어져라 강하게 깨물었다. 아직 남아있던 잠이 달아났다. 하지만 뇌리에 들러붙어 있던 생각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롈은 그 생각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조금 피곤했을 뿐입니다. 민망하군요.”

“요즘 잠을 못 주무시나요? 제가 예전에 쓰던 수면제가 있는데요, 처방전을 알려드릴까요? 효과가 좋아요.”

“어제 늦게 잠들었을 뿐입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정말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죄송한 걸요.”

리젤로트는 아롈의 손을 모아 쥐었다. 아롈은 그 친근감의 표현에 어깨를 움츠리지 않으려고 힘썼다. 리젤로트는 아롈이 보르디에게 말을 잘 해주었기 때문에 보르디가 순순히 파혼해주었다고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이름을 불러도 되겠느냐고 생글생글 웃는 앞에서 거절할 도리가 없었고, 아롈은 꼼짝없이 아렐르라고 불려야 했다.

리젤로트는 신이 나서 한 마리 종달새나 카나리아처럼 즐겁게 지저귀며 종이에 그려진 시안들을 살펴보았다. 아롈은 멍하니 그 스케치를 들여다보았다.

어제 늦게 잠들었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아롈은 정확히 열흘 째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순전히 그 짐승 탓이었다. 릴레벨트는 ‘어두운 방 안에서 촛대를 들고 있는 긴 머리 여성’이라는 아롈의 아픈 기억을 정확하게 끄집어냈다.

스스로 악몽에 익숙하다고 자부했건만, 아니었다. 아롈은 재발한 불면증과 악몽에 발버둥 쳐야 했다. 한 번 악몽이 촉발되자 다른 악몽도 미끼에 걸린 고기처럼 줄줄이 끌려올라왔다.

사샤가 없어진 다음 텅 비었던 황궁이나 아무리 쪼그리고 앉아 숨어있어도 찾으러 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소한 기억은 악몽 축에도 못 끼었다. 눈앞에 아버지의 목이 덜렁였고, 아는 사람들이 줄줄이 시체로 나타나 아롈의 앞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시녀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아롈은 피가 무서웠다. 폭력이 두려웠다. 비록 꿈이라고 해도 아롈은 매일 피를 보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꿈을 꿀 때마다 눈물과 땀으로 전신이 흥건했다. 손끝이 저렸다. 매일 밤 버틸 수 있는 한도까지 버티다가 쓰러지듯 잠들었고, 그나마도 깊은 잠에 드는 순간 꿈 때문에 깨어났다.

수면이 부족했다. 하루에 네 시간 정도 자는 것은 괜찮았다. 코시카에서도 여섯 시간 이상 잠들 수 있는 날은 드물었다. 하지만 하루 수면 시간이 세 시간 이하라니.

아롈은 주먹을 꾹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졸음 때문에 눈앞이 오락가락했다.

“이건 어떨까요? 여기다가 금빛으로 된 레이스를 다는 거예요. 아렐르는 금빛 좋아해요?”

“예.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장미 무늬? 아니면 백합 무늬? 어느 게 나을까요?”

“장미 무늬가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백합 무늬도 보기 드물게 예쁘네요! 어쩌지요?”

“마담 리젤로트. 오히려 레이스는 자제하시고 코사주를 다시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맞아요. 그 편이 긴 목이 돋보이지 않을까요?”

적절히 끼어든 시녀 덕분에 아롈은 무한히 반복되는 ‘취향 고르기’ 대화에서 벗어났다. 곁눈질로 앤의 목에 걸려있는 벨타를 노려보았다. 저 짐승새끼. 필리프가 적당한 사람만 찾으면 바로 보내버릴 것이다. 피로 목욕을 시켜주지 못하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세 시간이 넘게 앉아서 수다를 떨었지만 결혼식에서 입을 옷은 고르지 못했다. 리젤로트는 임신부 특유의 까다로움을 한껏 발휘해서 이것도 퇴짜를 놓고, 저것도 퇴짜를 놓았다. 지금도 허리가 날씬하니 괜찮을 거라고 달래보아도, 겨우 한 달 뒤에 있을 결혼식이면 배가 부풀어 뚱뚱해질 거라고 철썩 같이 믿는 듯했다.

“아렐르. 산책이라도 같이 나가실래요? 그리고 우리 함께 저녁 식사도 하고요.”

아롈은 생각할 것도 없이 승낙했다. 지금 당장 쓰러져 기절할 지경이었지만, 일 분 일 초라도 방에 돌아가는 것을 늦추고 싶었다. 그리고 설마 걷는 도중에 쓰러지진 않겠지. 태어날 때부터 조산으로 병약했지만 적어도 걷다가 쓰러져 기절한 적은 없었다. 하물며 수면부족으로 쓰러질까.

자비관을 나서자 제법 서늘해진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렸다. 여름의 가장 더운 부분이 지나고 가을의 초입으로 들어서 새파란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떠다녔다.

“이제 정말 가을이네요.”

“그렇군요.”

로렌의 여름은 아롈이 생각하는 여름 그 이상이었다. 이렇게 더운 여름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러나 로렌 출신의 여러 숙녀들은 이번 여름이 덜 더운 편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럼 대체 더운 여름은 어떻다는 거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임신부가 있었으므로 일행의 움직임은 호수 위를 헤엄치는 아기오리처럼 느긋했다.

리젤로트는 연신 결혼식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질 것인가에 대해서 떠들었다. 아롈은 그 기대감에 짜증을 내기는커녕 감사했다.

아롈은 신부의 어머니를 대신하여 신부 쪽의 결혼 준비를 도맡겠다고 자청했다. 대회의가 끝나고 할 일이 없었다. 방에 갇혀 죽도록 자기 연민에 빠지느니 응접실에 앉아 숫자와 문자에 잠겨있는 편이 나았다.

후원의 여름꽃은 대부분 질 시기였으므로, 가을꽃으로 바뀌어 있었다. 적당히 의자를 찾아 앉았다. 아롈은 머리카락을 깔고 앉지 않도록 조심스레 가슴 앞으로 모은 뒤에야 앉을 수 있었다.

“아렐르. 요즘 머리를 자주 풀고 다니네요?”

“예.”

“잘 어울려요. 이렇게 예쁜 금발이라니 부럽네요. 저도 금발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런 고동색은 너무 흔하잖아요?”

“감사합니다.”

머리카락을 풀어 내린 것은 사소한 반항이었다. 틀어 올리는 머리가 좋다고 말한 누군가가 좋아할만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대체 언제부터 기른 거예요?”

“잘라본 적이 없습니다.”

“와. 굉장하네요.”

아롈은 평소와 달리 리젤로트의 반응이 건성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녀는 분명히 아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리젤로트가 아롈의 눈치를 볼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아롈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리젤로트가 품고 있는 말이 아롈에게 썩 달가운 말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이번 챕터로 (제 안에서의) 2부가 끝납니다. 2부 끝나면 1부에서 그랬듯 비문 고치고, 설정 오류난 부분 수정하고, 장면 가필하는 등의 대대적인 수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2부 끝나면 외전 두세 개 쓰고 3부 쓰고 3부 끝나면 완결 예정이에요.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는데, 제가 납득할 만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멘트 항상 즐겁게 보고 있어요.

P.S. 학업으로 몇 달 잠수타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챕터는 끝내고 가고 싶어서 미흡한 점이 많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연재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저는 원래 같은 장면을 어절 단위로 수십 수백 번 고치는 병이 있는데ㅠㅠ 연재하면서 강제로 병을 고치는 중이에요. 평소에도 퇴고를 많이 해서 올리는 편은 아니지만 조금 더 허술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속도와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양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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