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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3)


그는 그 자리에 선 그대로 웃어보였다.

 “리즈가 속여서 끌고 온 모양이군요.”

 “예.”

 “미안합니다. 저 아이가, 음, 어린 구석이 있지요. 대신 사과하지요. 다음에 제가 ​주​의​시​키​겠​습​니​다​.​”​

 아롈이 범한 어마어마한 무례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의 역성을 들어주지 못해 안달 난 남매라니. 순수하게 부러웠다. 나도 오빠가 있었는데. 눈을 내리깔았다. 리젤로트의 천진한 호의는 독이 되어 돌아왔다. 목이 아팠다.

 “아닙니다.”

 옷자락이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치마를 움켜쥐었다. 진한 회색 옷자락 위에 얹은 흰 손등 위로 갈래갈래 힘줄이 두드러졌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뱃속에 지진이 이는 기분이었다. 속이 메슥거렸다. 아롈은 앤이며 다른 시녀들을 데려가 버린 리젤로트를 원망하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롈은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고 도망치겠다는 계획을 수정했다. 남편의 앞에서 쓰러졌다간 감시받는 생활이 조금 더 연장될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점심을 제대로 먹을 걸 그랬다. 아침도 점심도 입맛이 없어 새가 모이를 쪼듯 깨작거렸더니 어질어질했다.

 “먼저 가보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조금 더 있다 가려고 합니다.”

 남편이 먼저 자리를 뜨면 후원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지게 된다. 그러나 아롈은 무릎으로 이블린까지 기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세시안은 잠시 아롈의 얼굴을 가늠하는 듯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뛰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그가 아롈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아롈이 머뭇거리다가 손을 얹자, 허리를 깊이 숙여 손등에 입술을 누르고 놓아주었다. 손목이 바르르 떨렸다.

 “아렐르만 괜찮다면 잠시 걸을까요?”

 시선이 흘깃 바닥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스커트 바깥으로 비죽 나와 있는 신발을 확인한 것이다.

 “아니면 옆에 앉는 것을 허락해주겠어요?”

 마음의 고통은 때로는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아롈은 특히 그 벽이 낮은 편이었다. 가슴이 지끈거렸다. 

 비참하게도 아롈은 아직도 이 사람이 좋았다. 비록 지금까지 그가 베푼 다정함이 다른 여자가 남긴 아픔 때문이었다곤 해도. 너무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혹여 아롈을 향한 애정이 아닐까 하던 기대가 순전히 착각이었을 뿐이었다고 해도.

 모든 면을 살펴보고 베푸는 배려가 좋았다. 듣고 있으면 호사스러운 느낌까지 드는 목소리도, 차분하게 울리는 말투도, 가끔 소년처럼 빛나는 장난기도 좋았다.

 “아렐르. 아직 제가 불편한가요?”

 아직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불편할 것이다. 남편의 얼굴을 보자 저열했던 자신의 행동이 절로 떠올랐다. 아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치마가 엉망이 되는데. 도저히 주먹을 펼 수가 없었다. 

 한숨 같은 숨소리가 났다.

 “아직 불편한 모양이로군요. 만난 김에 식사라도 같이 할까 했습니다만, 무리겠지요?”

 아롈은 대답할 말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사과 없이 적절한 답변을 할 방법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아렐르의 산책을 방해해서 미안하군요.”

 이번엔 대답을 할 말이 있었다.

 “아닙니다.”

 “산책을 계속 할 생각인가요? 들어가겠다면 데려다줄게요.”

 “먼저 들어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는 조금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짜낼 때마다 목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렐르. 여기에 시녀 한 명 없이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어요.”

 왜? 목이라도 맬까봐? 아니면 칼로 목을 찌를까봐?

 혀를 벌주듯이 깨물었다. 다시 독을 바른 말로 빈정거릴까봐 두려웠다. 아롈은 어깨에 힘을 뺀 채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전하, 저는 죽지 않습니다.”

 수치와 비참함을 견딜 수 없어서, 차라리 이 손으로 끝내버릴까 고민한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닌 부부 사이로 시작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이제 와서 아이만을 낳기 위한 부부 관계로 돌아가기에 이미 너무 많은 기대를 품고, 너무 크게 연정을 키워버렸다.

 하지만 아롈은 살기로 결심했다. 누군가 아롈을 죽이려 한다 해도 발버둥치기로 했다. 하물며 이런 인적 드문 정원에서 목을 맬 리 만무했다.

 이러한 결심을 줄줄 말하면 믿을까. 세시안은 아롈이 아무리 유리조각으로 자살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지금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데면데면한 어색함과 불편함을 견디며 아롈의 침실에 붙어 잘 리가 없었다. 

 그는 그 날 밤 이후에도 줄곧 자비관에 와서 잠들었다. 아롈이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롈보다 늦게 잠들고, 아롈보다 일찍 일어나 악몽에 시달리는 아롈을 깨웠다. 그가 침실을 나서면 시녀들이 들어왔다.

 명백히 감시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이상한 것은, 그의 수면 양상으로 볼 때 아롈보다 수면 시간이 적어야 하는데 그는 멀쩡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낮 시간에 정의관으로 가서 잠을 더 보충하는 걸까. 대회의가 끝나고 그는 한결 여유가 생겼다고 알고 있었다. 

 지난 새벽에는 꿈 때문에 우는 걸 들켰다. 부끄러웠다. 다음에는 손수건을 가지고 잠들어야 할까.

 아, 물 위의 기름처럼 생각이 겉돌았다.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리 있는 생각이 아닌, 물이 자갈 사이를 흐르는 듯 이리저리 갈라지는 생각의 흐름이라니. 하지만 간밤에는 채 두 시간도 잠들지 못 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아롈은 둔탁하게 생각했다. 감정으로 호소해선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로 증명해야겠지. 무슨 말을 하면 납득할까. 납득하고 나를 홀로 내버려둘까.

 “오늘의 산책은 리젤로트가 청한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었을 턱이 없잖습니까.”

 아롈은 증명이라도 하듯이 손을 들어보였다. 손에서 빛나는 건 반지뿐이었다. 지금 아롈은 손가락을 장식한 반지 너덧 개와 옷가지 말고는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도 옷은 착 달라붙게 재단되어 상체의 선을 고스란히 드러냈고 팔에 꼭 붙는 소매는 팔꿈치에서 끊겼다. 오늘은 그 흔한 목걸이나 머리핀조차 하지 않고 왔다. 머리카락은 머리카락끼리 꼬고 땋아서 얽어놓아 리본으로도 묶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아롈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을 변명이랍시고 내뱉었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보장만 있다면 치마라도 들치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증명하고픈 기분이었다. 울 것처럼 피곤하고 서러웠다.

 “아렐르.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저 걱정되어서 한 말입니다.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군요.”

 아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눈꺼풀이, 혹은 빽빽하게 달려있는 속눈썹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슬슬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아롈이 그를 말로 찌른 뒤에도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로 아롈을 대하고 있었다.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아니, 사실 그 일 때문인 듯 더욱 저자세로 굴었다. 그 사실이 아롈을 괴롭혔다. 자살하지 않을 테니 그만하라고, 애정 없이 다정함을 베푸는 일 따위는 그만 두라고. 말라 죽여야 할 애정에 물을 주는 일은 너무 잔인하지 않느냐고 울고 싶었다.

 “만일 앤을 보신다면 제가 찾는다고 전해주십시오. 그걸로 충분합니다.”

 “제가 이블린으로 돌아가고, 레르헨펠트 양이 오는 동안은 혼자잖아요. 알고 있나요? 지금 안색이 좋지 않아요.”

 손이 무심코 뺨으로 올라갔다. 손가락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뺨의 색깔을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날이 좋은데, 손끝은 여전히 찼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지난밤은 예브게니아의 꿈을 꿨다. 삼 주 차이로 태어나 붙어 지내길 십오 년, 그녀는 아롈이 보는 앞에서 피를 뿌리며 죽었다. 꿈에서 제냐가 나타나 아롈을 몇 번이고 칼로 찌르고, 몸에 기름을 부었다. 횃불을 던지려고 했다. 아롈은 공포 때문에 추접스럽게 눈물을 흘렸고, 그 모습을 남편에게 들켰다. 그게 싫어서 코시카에선 내내 당직 시녀도 두지 않고 혼자 잠들었건만. 

 “옆에 있는 것만 허락해주겠어요? 아렐르가 들어갈 때에 데려다주도록 하지요.”

 도저히 적당한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롈은 그저 그가 아롈을 내버려두길 원했다. 그러나 세시안은 쉽사리 고집을 꺾지 않을 기세였다. 그는 어린애를 달래는 듯 말했다.

 "없는 듯 조용히 있을게요. 약속하지요."

 왜 이렇게 몸을 낮추고 나올까. 아롈은 혀를 꾹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부담스럽고,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아롈은 아직도 그가 좋았다. 더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유순해보이는 저 눈매가 얼음장처럼 변하는 게 싫었다. 
 
 남편은 저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아롈은 곁눈질로 옆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약속을 충실히 지키려는지, 세시안은 고개를 돌려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이한 실망감이 찾아들었다. 스스로도 남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관심을 주는 것? 아니면 관심을 완전히 끊는 것? 웃기지도 않아, 옐레나 파블로브나.

 아롈은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싫었다. 우유부단함이야말로 파블 1세의 가장 나쁜 성품이며 가장 닮고 싶지 않은 성품이기도 했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정말 싫으면 그냥 일어서서 떠나면 된다. 침실로 가서 문을 잠가버리면 설마 복도에서 잠들진 않겠지. 아니, 죽은 줄 알고 문을 부수라고 시키려나. 

 아니,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다. 아롈은 그걸 알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면 된다. 악몽을 꾸는 티도 내지 않고, 몰래 토할지언정 앞에서는 식사도 잘 하고, '돌봐줘야 할 것 같은' 기색을 풀풀 풍기고 다니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다. 위태해보이니 불안해서 이러는 것 아닌가.

 검지에 낀 석류석 반지가 뱅글뱅글 돌아갔다. 요 열흘, 위험할 정도로 살이 내렸다. 원래도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살이 내리고, 원인이 사라지면 다시 살이 오르고를 반복했지만 요즘은 조금 심각했다. 대회의 직전에 한 번 몸무게가 빠지고, 복구되지 않은 채 한 번 더 빠지기 시작해서 옷이 다 남아돌아 재단을 새로 맡겨야했다. 목걸이나 귀걸이는 몰라도 반지는 죄다 손가락에 남아서 돌아갔다. 여유있게 맞춘 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빠질 것 같았다. 

 리젤로트부터 시작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몸이 안 좋아보인다고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살이 내린 채 창백한 얼굴로 '나 아파요'하고 얼굴에 써놓고 휘청휘청 돌아다니는데 저 사람이 아롈을 신경쓰지 않을 리가 있나. 앤이 그러고 돌아다닌다면 아롈도 신경쓰여 어쩔 줄을 모를 텐데. 

 그래, 그러면 된다. 손수건을 옆에 놓고 잠들자. 꿈을 꾸지 않게 얕은 선잠을 자면 된다. 저녁 식사도 남기지 않고 다 먹고, 식사를 정 못 하겠으면 단 것이라도 청해서 먹자.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하지만 오늘만. 아니, 지금 당장 조금만. 오늘 밤부터 손수건을 가져다두고, 아무렇지 않은 듯하면 되니까 지금은 잠시 쉬고 싶었다. 피곤했다.

 아롈은 반지가 빠질까봐 손깍지를 꼈다. 눈을 가늘게 뜨자 기분 좋은 햇빛이 스며들었다. 해를 등지고 있는데도 감은 눈 안쪽에 발갛게 물들었다. 

 고개가 살짝 떨어졌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코멘트 읽는 재미에 열심히 쓰고 있어요.

P.S. 꿈은 얕은 잠에서 꾸는데, 딱히 표현할 만한 말이 없어서 그냥 썼습니다. 대체할만한 문장이 생각나면 퇴고할 때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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