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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5)


 “알았어요. 그럼 도미니크를 불러오지요.”

이본느가 돌아서기 전에 필리프는 아내를 붙잡았다.

“굳이 당신이 갈 필요까지야 있나. 당장 필요한 일도 아니니 차라도 마시고 가지.”

“차보다는 이게 좋군요.”

이본느는 필리프의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가문의 문장 대신 섬세하게 인어를 조각해놓았다. 그녀의 통통한 손가락이 익숙하게 담뱃갑을 열더니 시가를 한 대, 필리프의 몫까지 두 대 뽑았다.

필리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를 접객용 탁자로 이끌었다. 던지면 누구 하나의 이마가 터질 법한 묵직한 주석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이본느는 손수 시가의 머리를 잘랐다. 필리프가 주위를 둘러보고 손가락을 퉁기자 불이 붙었다. 허공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흡입하자 황홀한 표정이 떠올랐다.

“평소 피우던 담배가 아닌데요? 좋군요.”

“그걸 알아차리나?”

“이렇게 향이 다른데 모를 리가 있나요. 바닐라를 섞었군요. 훨씬 섬세한데요.”

이본느는 애연가이자 폭연가(heavy ​s​m​o​k​e​r​)​였​다​.​ 그녀는 심지어 시가를 입에 대고 빨아들이기까지 했다. 조그맣게 벌린 그녀의 입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새어나왔다.

“하아.”

“나눠줄테니 그리 빨아들이는 건 그만 두지.”

“쩨쩨하긴. 나눠주는 건 또 뭐예요? 그냥 다 줘요. 파이프 담배나 피우는 양반이 시가는 무슨.”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하루에 한 갑 다 태울까봐 두렵군.”

이본느가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럴 수도, 안 그럴 수도 있지요. 재미없는 양반. 이런 취미도 없이 어찌 사나요?”

“세상엔 담배보다 훨씬 재미있는 게 많아.”

“사람 놀이 말이지요. 그래서 열여섯 살짜리를 그렇게 밟아놨어요?”

“누가 밟아놨다고 그래?”

“말 몇 마디 나누어보고 금세 알았답니다. 잔소리꾼 기질이 어디 가겠어요? 얼마나 자근자근 밟으셨는지 가엾게도 풀이 죽어서는 뭐 하나라도 실수할까 바짝 긴장하고 있던 걸요. 내일 모레 나이가 반백이 되는 사람이 어쩜 그렇게 사람에게는 박해요?”

“모빌이라도 가져가서 눈앞에서 흔들어줬어야 했나? 그만하면 다 컸지 뭘 그래.”

“잔소리를 하더라도 칭찬은 좀 해줘야지요. 조금만 친근하게 대해도 어쩔 줄을 모르던데. 이것 봐요. 오, 건수 잡았다, 이것도 가서 잔소리해야지, 하는 얼굴을 하고 있군요. 친애하는 마담 라 세르, 외람되오나 사람을 그리 함부로 믿으시는 것은 어쩌고 저쩌고.”

이본느는 표정을 굳히더니 훌륭하게 필리프의 말투와 표정, 몸짓을 따라해 보였다. 누가 봐도 깐깐한 신사인 필리프와 달리 동그란 얼굴에 유순한 분위기인 그녀가 필리프를 따라하니 매우 우스꽝스러웠다.

필리프는 실소를 흘렸다.

“안 되나?”

“열여섯 살이에요. 칭찬해주면 좋아서 더 힘낼 걸요.”

“코시카 황제를 하려고 덤벼들던 여자야. 잘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못하는 게 문제지. 굳이 이건 잘했네 저건 잘했네 일일이 얘기해주어야 하나. 차라리 숨 쉬는 것도 장하다고 하지 그래.”

필리프는 외눈 안경을 벗어 융으로 닦았다.

“굳이 입을 떼어 칭찬해야만 무언가를 하는 어린애 기질이 있다면 당장 고쳐야지. 나이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어도 칭찬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거잖아.”

“서른까지 칭찬해주라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은 주님의 나무 같은 거랍니다. 줄기가 채 굵어지기 전에 태풍을 불게 하면 꺾여버릴 수도 있어요.”

“그럼 그걸로 끝이라는 거겠지.”

“당신은 주님이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버텨낼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주시지만, 당신이 모든 것을 안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요.”

“견뎌낼 수 있을 만큼만 하고 있어.”

“그러다 잘못 되면 대체 불가능하지 않나요? 자식과는 다르잖아요?”

“그러니 더 혹독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 마.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강해.”

필리프는 아직 유리알처럼 쨍한 아롈의 눈을 잊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말.

-나는 마법사입니다.

비록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조항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코시카 황위 계승은 마법사인 황족의 계승권이 마법사가 아닌 황족에 우선한다. 그런데 그녀는 쫓겨났다.

그 사실을 황실에 밝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밝혔더라면 그녀의 아버지인 파블 1세를 건너뛰어 그녀에게 황위가 계승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테니. 하다못해 파블 1세가 ‘아들’이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황후와 딸자식의 지위를 폐하려는 멍청한 계획 따위 세울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머니에게 지위를 뺏기고 강제로 팔려나가는 상황에서도 마법사임을 밝히고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세 살 아이의 눈앞에 과자를 가져다놓고 참으라고 말했을 때 참을 수 있는 아이가 얼마나 될까. 권력은 그만큼이나 달콤하다. 충분히 강한 의지력이었다.

“자기 자리도 못 챙겨먹는 강함이지만 말이야.”

그 멍청함 덕분에 보르디는 차곡차곡 손해를 회복하고 있었다. 세르가 우회적으로 세탁을 해서 건네주기로 한 백만 루아르, 그리고 오를레앙으로부터 뜯어낸 오십만 루아르. 그밖에 옐레나 여제에게 받은 여러 이권들과 일부 식민지.

십년이나 이십년만 공들이면 된다. 이본느가 손을 뻗어 필리프의 이마를 쓸어 올리더니 머리카락을 한 가닥 뽑았다. 따끔했다.

“이제 흰머리가 다 나는군요.”

“흰머리라니. 그럴 리가. 새치겠지.”

이본느는 손에 든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게 흰머리가 아니라면 내 눈가에 있는 것도 주름살이 아니겠지요.”

“둘 다 아닌 걸로 하지. 그나저나 싸웠다고 하던데. 아는 바 있나?”

이본느는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아까는 놔두라고 했잖아요?”

“놔두라곤 안 했어. 칭찬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

“모르겠군요. 만나러 가도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아서.”

“칭찬해주니까 금방 마음을 열었다고 좋아했으면서 빈말이었나.”

“시간이 있어야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아무리 친해져봐야 나이 마흔다섯 살인 사촌언니에게 연애 얘기를 조잘조잘하는 열여섯 살짜리가 어디에 있어요?”

“그럼 소피를 시켜서 알아오라고 하든가.”

“당신 눈에는 막내딸이라 영영 어린 걸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소피도 벌써 스물 셋이랍니다. 그 나이에 일곱 살 차이면 천국과 지옥만큼의 거리가 있지요.”

“그 고집에 영 틀어져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아주 곤란해지지.”

“그러니까 왜 그렇게 황후를 충동질했어요?”

이본느는 사석에서 황후에게 ‘폐하’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필리프는 지적도 하지 않고 자연스레 받았다.

“내가 언제.”

“당신이 한 일 아니에요? 그 날은 원래 티파티 약속을 했던 날이 아니었잖아요. 대회의 중에 그런 거창한 차 약속을 잡는 가문이 어디에 있어요? 당신이 그 날로 하라고 우겨서 불러 모으긴 했지만요.”

“맹세코, 나는 황후에게 어떤 말 한 마디 한 적 없다고.”

그 날 보르디 대공가 쪽 가신들과 티파티가 있다는 초대장은 몰래 전했지만. 황후는 ‘황후’인 만큼 예의상으로나마 이블린과 그 근방에서 열리는 모든 행사에 대한 초대장을 받는다. 그 사이에 슬쩍 끼워 넣었다. 발견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도박이었다.

그 거짓말도 이본느와 소피를 시켜 ‘진실’로 만들지 않았는가.

“아무렴요. 고양이 앞에 쥐를 던져주었지만 먹으라고 말만 안 하면 그만이지요.”

“그러는 당신도 쥐를 던져주는 데에 협조한 것 아닌가. 왜,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내가 왜요? 내가 꾸민 일도 내가 한 일도 아닌 걸요.”

이본느의 눈매는 살짝 처져서 천사처럼 순해보였지만, 그 성정은 의외로 단호했다.

“내가 황후 폐하에게 그런 기막힌 계획을 실행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요. 왜 내가 죄책감을 가져야 하지요?”

“그러면서 왜 나는 비난하는 건가. 나도 계획을 알려준 적 없어.”

“당신은 정말 못됐으니까요. 황후가 무슨 일을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요?”

“아니, 짐작했을 뿐 알고 있지는 않았는데.”

“그게 알고 있었던 거랍니다. 그래서 만족스러운가요?”

“가장 신실하신 폐하께서 침묵의 대가로 거하게 챙겨주셨지. 만족스럽지 않을 리가 있나.”

“정말 못됐다니까요. 알고 그러는 거지요?”

“이건 단순한 산수야. 당신이나 내가 네 시간 무릎 꿇고 있어봐. 포도주 중앙세 5% 감면이 하늘에서 떨어지나.”

“오 퍼센트요? 농담이지요?”

이본느가 눈을 댕그랗게 떴다.

“어제 약속받았어.”

“너무 과하군요. 불안한데요.”

“삼 년 기한.”

“아, 그건 그럴 만하군요. 잘 되었네요.”

“거봐, 당신도 싸게 샀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처음부터 결과를 알고 저질렀다면 모르겠지만 운 좋게 많이 받은 거잖아요? 항의한다고 날뛰었으면 어쩔 뻔 했어요?”

“그럴 성격이었으면 지금 코시카 옥좌에 앉아있었을 거야.”

“당신, 정말로 못됐어요. 비열하고요.”

“칭찬으로 듣지.”

집무실 공기가 온통 연기로 부옇게 흐려졌다. 필리프는 몸소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햇살이 참 좋았다.

“어쨌든 지금 둘이 완전히 엇나가면 곤란해. 예상 외로 사이가 좋아서.”

“어떻게든 신경 써보지요. 그리고 제발 그 성격 좀 고쳐요. 내가 남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군요.”

“주님 곁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어. 이대로 살다 죽는 게 낫지. 이제 와서 착하게 살면 화병이 나서 죽을 거야.”

“어머, 죽으면 주님 곁으로 갈 수 있다고 누가 그래요?”

“그럼 난 지옥에 갈 테니 당신은 천국에 가든가.”

“당신 덕분에 내가 얼마나 못되게 변했는지 알아요? 가끔 등에서 박쥐 날개가 솟아날 것 같다니까요?”

이본느가 생글생글 웃었다.

“그럼 나는 엉덩이에 꼬리를 달도록 하지.”

“어머, 그걸 농담이라고. 앗, 또 흰머리가. 움직이지 말아요!”

쓰다가 잠들었네요. 마무리해서 올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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