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라마지 않는 (12)
때늦은 초가을 장마가 길어졌다. 창문을 열자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세시안은 빗소리를 대작 상대로 삼아 술을 홀짝였다. 같이 술을 마실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멱살을 잡을까 두려워 쫓아낸 오랜 친구를 제외하더라도, 시종이나 대공가 출신의 친구 몇 정도는 불러다 술자리를 못 만들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썩 내키지 않았다. 자작은 그의 오랜 취미였다. 결혼한 이후 잠시 끊은 취미였으나, 잠시 아내와 소원해지자 술이 매일 당겼다.
그는 손에 든 잔을 흔들었다. 고풍스러운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보다 나이를 오래 먹은 술은 향이며 맛이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촉감 모두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리고 정말 맛이 없었다. 세시안은 창문을 닫고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깊은 한숨에 술향기가 섞였다. 죽을 만큼 우울했다.
보고 싶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본 것은 황제가 주최한 가족 만찬 때였다. 심사가 수틀리면 하나 뿐인 아들 결혼식에도 불참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탓에, 세시안은 아롈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롈은 제 시간보다 일찍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치장한 채로, 한 점 흠도 없이 강해 보였다. 밤에 그토록 무너졌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나 그녀의 뼈아픈 힐난을 재차 떠올리면서도 물색없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은 아롈이 쓰러진 순간 경악으로 바뀌었다.
쓰러지는 데에는 전조도 없었다. 그 나지막히 내리누른 쌀쌀맞은 목소리로 크리스틴과 대거리를 하다가, 식기를 소리없이 내려두었다. 물이라도 마시려나 싶은 여상한 동작에 이어져 소녀가 옆으로 쓰러졌다. 세시안은 포크를 팽개치고 그의 반대편으로 고집스레 쓰러지는 아내를 당겨 안았다. 손이 차가워 몰랐는데 이마가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그 때부터 그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찌어찌해서 침대에 눕히고 밤새 손을 잡고 있는데 온갖 안 좋은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움직이는 데에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겪어보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아내의 죽음을 두 번 체험했다. 아롈이 이대로 숨을 멈추면 어떻게 될지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속속들이 떠올릴 수 있었다. 흰 천, 수의, 관, 관을 채우는 꽃, 망자를 보내는 입맞춤, 장례식, 묘, 그리고 묘비. 그런 추상적인 이미지 뒤에 따라오는 사망 확인서, 사망을 증명해주는 외교문서, 친정 식구들에게 보내는 위로 편지, 지참금에 대한 서류, 한 사람의 죽음을 증명해주는 수백 장의 종이들. 최악의 밤이었다.
그리고 새벽녘 아롈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명령했다.
-나가주십시오.
-아렐르.
-당장!
열에 들떠 쉰 목소리가 높아지기가 무섭게 그는 손을 놓고 침실을 나섰다. 찌른 듯한 마음의 상처보다도, 아롈이 다시 경기를 하다가 쓰러지는 게 훨씬 두려웠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부터 단 1초도 보지 못했다.
아롈은 두문불출했고, 한 번 더 쓰러졌다고 들었다. 병문안을 가도 되겠느냐는 요청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자비관에서 리젤로트나 크리스틴과 약속을 만들어 불쌍하게 얼쩡거리던 것도 잠시, 그는 포기하고 얌전히 정의관에 처박혀 있기로 결정했다. 그렁그렁 고이다가 쏟아지는 눈물이 코 앞에 들이닥치는 검보다 더 무서웠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운 아내와 차도 마시고 내친 김에 식사까지 하고 왔다며 친구가 자랑을 하면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닌가. 세시안은 그렇게 미셸의 발끝을 밟은 일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마쳤다. 평생 같이 자란 친애하는 친구는, 곧 결혼하는 사람 특유의 오만을 한껏 발휘해서 참견을 늘어놓았다.
싫다고 해도 좀 가서 붙어 있어라. 외로워 보이더라. 무조건 잘못했다고 가서 빌어라. 사랑한다고 납죽 엎드려라. 선물이라도 가져다 바쳐라 등등.
하등 도움되지 않는 조언이었다.
다소 억지를 써서 붙어 있으려고 시도를 했더니 벌레보듯 싫어하다가 급기야는 울더라. 나가라고, 눈 앞에서 사라지라고 화를 냈다가 애원했다가, 이내는 울더라. 그 자존심 강한 사람이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도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는데 아무런 생각도 안 나더라. 잘못해서 빈다고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사랑한다고 했더니 자기를 우습게 보는 거냐면서 화를 내더라. 대체 코시카 일순위 계승권에 상응하는 선물이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 있으면 내가 먼저 좀 알고 싶다.
듣기 좋은 달콤한 말로 달래고 예뻐하는 것 뿐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금 더 알고 싶었다. 가끔 꾸는 악몽, 불을 끄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색, 말하려다가 입을 다무는 습관. 그 모든 것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유를 알아야 맞추고 해결해줄 수 있으니. 그래서 처음 부딪쳤을 때에는 조금 기뻤다. 충돌하면 한 발짝 멀어질지 몰라도 세 발짝 가까워질 수 있겠지.
그러나 아니었다. 아롈이 품고 있는 문제는 그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미셸에게 주절주절 늘어놓을 수 없었던 세시안은 불만스레 반박을 참았다.
미셸에게는 빚이 많았다. 황후가 볶아댈 때 옆에서 같이 당한 것만 해도 평생 이야깃감이다. 사 년 전 쯤, 미셸이 리젤로트와 한창 싸우고 찾아와 한탄을 늘어놓을 때 다른 여자 찾아보라고 했다가 장갑으로 얻어맞았다. 식사 자랑만 안 했어도 쫓아내지 않고 참았을 텐데. 나가라고 슬며시 구두를 즈려밟자 미셸은 그를 정말이지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난 대체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아주 바보가 다 됐네.
그는 굳이 여동생과 아내를 비교해서 한 쪽을 깎아내리는 대신 웃었다.
-그러게. 나도 모르겠네.
창틀을 양손으로 잡고 이마를 창문에 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조금 숨이 막혔다.
보고 싶다.
얼굴만 보는 거라면 지금도 가능하다. 당장 자비관에 쳐들어가면 된다. 아롈이 울든 싫다고 소리지르든 소리지르다가 쓰러지든 눌러앉으면 된다.
조금 더 비열한 방법도 있었다. 세시안은 사람의 약점을 파악해서 휘두르는 데에는 능숙했다. 정치적 뒷공작을 하는 데에 있어서 언제나 정정당당한 거래만이 오갈 것이라는 건 환상이므로. 가문의 사생아, 비자금, 정부의 존재, 식민지 착취, 가문의 일원이 저지르는 위법 행위 같은 큼지막한 것부터 지기 싫어하는 성격, 겉치레를 중시하는 성격, 오만함, 비열함, 가학성 등등 갖가지 치부와 허점을 끌어내고 암시할 줄 알았다.
사실 아롈에게는 거창한 것도 필요없었다. 그가 반한 성실함, 책임감, 의무감은 뒤집으면 융통성 없음으로 바뀐다. 그의 양심을 거세하면 된다. 세시안은 아롈의 남편이었다. 아롈이 울든 말든 슬퍼하든 말든 그 성격의 연약한 부분을 꾸준히 자극하면 그녀는 세시안의 곁에 남을 것이다. 그 날 밤, 그가 아롈을 논쟁으로 끌어내기 위해 거짓으로 정사를 암시했을 때, 아롈은 거부하지 못했다. 겁먹어서는 덜덜 떨었지만 차마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정사는 부부의 의무이기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하자 자조감이 취기처럼 끼쳐올랐다. 와, 정말 바닥이다. 쓰레기 같으니. 상상한 것만으로도 오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아롈을 보고 싶었다. 끌어안고, 입맞추고,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우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그 눈물도 슬픔도 그가 만든 것이고, 그가 아롈을 슬프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옆에 없었을 것이다.
답이 없었다.
세시안은 서늘한 유리에 머리를 식히려 그대로 자세를 유지했다. 품위 없는 자세라고 예법 선생에게 꾸중 들을 나이는 지났으므로 그는 마음껏 방종했다. 그런 그의 눈에 분수대로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빨간 우산에, 흰 옷, 등롱을 들고 있었다. 익숙한 옷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우비를 찾다가 급한 김에 코트만을 들고 사층부터 일층까지 뛰어내려갔다. 조용한 정의관에 그의 발소리가 울렸다.
정의관을 지키는 근위병이 인사를 하는데 응답도 해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빗속에 망설임도 없이 걸어들어갔다. 여자를 쫓아가는 것은 쉬웠다. 밤비 오는 어두운 밤에 불빛이 등대처럼 선명하게 반짝였다. 비가 정수리와 어깨, 뺨과 인중을 적셨다. 어쨌거나 성큼성큼 걷는 남자의 걸음이다. 발에 꼭 맞는 구두를 신고 종종걸음 치는 여성의 걸음과는 그 속도가 달랐다. 그는 금세 여자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그녀는 이블린 오른쪽에 있는 정원으로 향하던 도중에 세시안에게 추월당했다.
"아렐르, 아."
그는 순식간에 실망했다. 앤 폰 레르헨펠트였다. 그러나 그 옷은 분명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가 예쁘다고 칭찬해주었던 옷이었다. 흰 바탕에 알록달록한 실로 수를 놓아 앙증맞아보였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검은 눈의 처녀가 얌전히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빨간 우산이 등롱 빛을 받아 밝은 주황색으로 보였다.
"실례했군요. 그럼."
"대체 이 밤에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분명히 실망했는데 목소리를 듣자마자 거짓말처럼 꺼졌던 기대감이 부풀어올랐다. 그는 감히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기 힘들었다.
"전하."
죄스럽게도, 그 쪽을 바라보는 순간 눈앞이 환해지는 듯 기쁘고, 또 슬펐다. 파란 우산을 쓴 아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