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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최신화를 삭제하고 새로 썼습니다. 도저히 퇴고로 커버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10. 바라마지 않는 (16)


 정의관 사 층에 위치한 세르의 집무실에선 여전히 나무 냄새가 났다. 큼지막하고 넓은 책상도 여전했다. 호두나무일까? 아니면 마호가니? 아롈은 짧은 부러움을 뒤로 하고 벽난로 근처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남편이 침실로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동안, 당직을 서고 있던 시종이 그 나름대로 아롈을 극진하게 대접해주었다. 입술이 새파랗다며 이른 계절이지만 벽난로를 켜게 시키고, 담요와 먹을 것, 그리고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가져다주었다.

꿀을 제법 많이 탔는지 희미한 향이 감돌았다. 차갑게 식었던 몸 안팎이 따뜻해졌다. 달콤한 우유를 마시며 타닥타닥하는 벽난로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톡 튕기면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했던 신경이 다소 느슨해졌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롈은 그간 몸 상태를 돌려놓는 것에만 힘썼다. 토하지 않는 선에서 악착 같이 식사를 하고, 간식을 꾸역꾸역 먹고, 밤에는 브랜디를 세 모금 마시고 억지로 잠드는 노력 끝에 간신히 체중이 조금 늘어났다. 간밤에도 꿈 없이 잠들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뜬 순간 깨달았다. 공기의 색깔조차 다른 듯했다. 날짜를 짚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신의 곁에서 평안하기를, 이 한 마디를 망자(亡者)에게 보낼 자격이 아롈에게는 없었다. 어머니가 파블 1세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아롈이 파블 1세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딸 행세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죽은 사람들에게 사과할 수도 없었다. 아롈은 분명히 이길 방법이 있었다. 그들의 죽음을 딛고 성공할 방법이 있었는데도 스스로의 명예와 긍지를 위해서 승리를 포기했다. 그러니 시녀들이나 죽은 병사들을 위해 슬퍼할 자격은 없다.

우울한 와중에도 우유는 달고 담요와 벽난로는 따스했다. 살아있기 때문에. 아롈은 눈을 내리깔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자살한 여자를 건드린 건 잘못이었다. ‘실수’나 ‘그럴 수 있지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일’이 아니라 ‘잘못’했다. 혼자서 멋대로 품은 애정과 혼자서 멋대로 품은 기대를 당연히 남편이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보상심리, 그리고 그 보상심리가 깨어진 순간에의 배신감. 순전히 아롈의 문제였기 때문에 그것을 남편에게 전가하는 것은 부당했다. 아롈은 이미 자각한 지 오래된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런데 사과하기 싫었다. 이미 다른 일로는 사과를 했으니 사과 자체에 대한 부담은 아니었다. 그저 그 여자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더 내뱉는 게 끔찍했다.

그런데 왜 그 여자에 대한 변명을 들으러 여기에 와 있는 걸까.

순전히 남편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는 아롈의 질문에 짧게 생각하더니 오히려 되물었다.

-제가 이야기하면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해줄래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달라는 뜻이에요. 중간에 일어나서 도망치거나, 절 쫓아내거나, 안 듣겠다고 귀를 닫거나, 혼자 멋대로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대답하기 싫으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도망치는 건가요?

-도발하시는 겁니까?

-예.

그리고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유를 설명하려면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해요. 그리고 그건 제게 있어서는 각오가 필요한 일이고요. 약속이라는 강제성이 없으면 아렐르는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도망치겠죠.

그 ‘다른 사람’이 자살한 여자일 것임은 분명했다. 그저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것이 맞는 선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아롈이 첫날밤을 떠올리지만 않았더라면 우산도 버려두고 빗속으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 결심이 아롈의 발목을 붙잡았다. 머뭇거리는 기색을 예리하게 잡아챈 세시안은 거부할 수 없는 거래를 제안했다.

-다 듣기만 해요. 그래도 제 감정이 납득되지 않는다면, 아렐르가 원하는 대로 해요.

-제가 여기에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말 그대로, 아렐르가 원하는 대로 해요. 자비관에 얼씬도 하지 말아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요. 마담 라 세르의 의무, 혹은 장차 황후의 의무를 전부 등한시하고 살고 싶다면 그것도 마음대로 해요. 이블린에서 두 번째로 신분 높은 여성으로서 군림하며 사는 것도 좋겠지요. 저와 밤을 보내고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어요. 시골로 내려가도 좋아요. 제가 전부 책임지지요.

아롈은 그 파격적이다 못해 정신 나간 제안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밤을 보내고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다’고?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형과 남동생은 사망한 지 오래고, 멘 공작 루이 앙투안은 사생아다. 여동생은 네 명이나 살아있지만 이 남쪽에서는 붉은 장미 법이라는 멍청한 법 때문에 여성에게 계승권이 없고, 황가는 대공가 및 여타 귀족가와 달리 여계(女系) 남성 자손에게도 계승권이 없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고, 후계자의 부재는 그 사실만으로도 군주의 안정성을 깎아먹게 된다. 후계자가 필요한 것은 군주뿐만이 아니라 제1 후계자도 마찬가지다. 제1 후계자에게 아이가 여럿 있다면 다른 계승권자들이 보위를 노리기 어렵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데도 후계자가 없는 제1 계승권자는 그 자체로 제2 계승권자의 표적이 된다.

지금 제2 계승권자는 남편의 숙부, 제3 계승권자는 사촌이었다. 보위를 두고 어머니에게 뒤통수를 맞은 북쪽 나라 여대공으로서, 아롈은 각각 남쪽 황제의 동생과 아들이라는 혈연이 황위 승계를 포기할 수 있는 말랑한 관계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즉, 그에게는 절실하게 아이가 필요했다. 그의 목숨에 관련된 문제였다.

“늦어서 미안하군요.”

아롈은 격식 있는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의자를 끌고 와 아롈의 바로 옆에 앉았다. 손을 잡혔다. 목욕을 했는지 손이 뜨거웠다. 그는 의례적으로 손에 입맞춘 뒤에 놓아주었다.

“손이 너무 차군요. 괜찮아요?”

목숨을 걸고 거짓을 이야기 하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럼 진심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게 가능할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영영 보지 못할 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그럼 그게 애정인가?

아롈이 알고 있는 사랑은 파블 1세와, 마리야 여공과, 오라비의 사랑이었다. 혹은 빌헬미네와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 루드비히와 마르타. 정말 잘 쳐서 푸른 짐승의 애정까지 넣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사랑에 소유 없는 방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록빛에 훨씬 가까운 개암색 눈이 아롈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웃었다.

“마음이 변했나요? 도망치고 싶어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결정권은 아렐르에게 달렸어요. 저와 정말로 멀어지고 싶다면 이야기를 전부 듣고, 믿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면 돼요. 아니면 제안을 거부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요?

이미 남편과 멀어져야 할 이유에 대해서 정당화를 끝낸 상태였다. 제안을 거절한다는 자체가 미련이 남았다는 방증이 된다. 그래서 아롈은 여기까지 제 발로 걸어왔다. 알면서도 걸려들 수밖에 없도록 정교하게 짠 판이었다. 어디까지 꿰뚫어보고 계산한 걸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투명하게 비춰졌길래?

이것이 자질의 격차인지, 아니면 나이 때문에 벌어진 격차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대신 아롈은 공격을 생각하기로 했다.

“전하께서는 이미 한 번 맹세를 어기셨습니다.”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제 문장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었으니까요.”

“그럼 이번 약속도 어기실 거라고 생각해도 됩니까?”

“문장 따위가 아니라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로렌의 루이 세바스티앙 조제프 자비에, 발루아의 장자로서. 아렐르가 제 이야기 중에 도망치지 않는다면, 저는 약속을 지킬 거예요.”

가슴에 손을 얹은 정식 맹세였다. 기껏 생각해 낸 발악을, 남편은 가볍게 깨버렸다. 성물, 문장 같은 물건에 거는 맹세가 아닌 이름에 거는 맹세를 의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마법사의 전통이 남아있는 북쪽에서 ‘이름’을 거는 맹세는 곧 목숨을 거는 맹세와 같은 말이었다. 마법사가 이름을 건 맹세를 어기면 그 순간 마법을 잃기 때문에 생긴 전통이었다.

아롈은 방금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음을 깨닫고 눈을 감았다. 꼼짝없이 이야기를 듣는 길밖에는 남지 않았다.

“그럼 합의가 된 걸로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성 소피야 훈장의 별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어떻게 되든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다. 상처투성이가 될 각오를 다지고, 눈을 떴다. 떠야만 했다.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요즘 계속 번거롭게 해드리네요. 며칠 고민해봤는데 도저히 퇴고로 커버될 수준이 아니라 본의아니게 글을 고쳤습니다. 오래 기다리시게 했는데 별 새로운 내용이 없어서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제가 이번 주 토요일부터 시험이에요.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글을 쓸 여유가 나지 않을 것 같아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글을 쓸 수 있었어요.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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