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라마지 않는 (19)
말문이 막혔다.
그가 아렐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당장이라도 뭉개지는 거품인 양 조심스러웠다. 손이 뜨거웠지만 차마 놓아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올 말이 뻔했다. 자승자박이었다.
“내리누르고, 날개를 꺾고, 새장에 가둬두어야만 진심인가요?”
손길 때문일까, 아니면 눈길 때문일까. 날개를 꺾는다는 거친 말이 신기하게도 겁나지 않았다.
단정한 얼굴에 자조가 어렸다.
“억지로 붙잡아 곁에 두고 말라죽는 걸 지켜보고 싶지 않아요.”
무서울 정도로 강한 감정이었다. 차마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이유를 몰라 두려웠다. 손을 빼보려고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말씀대로라면…….”
아롈은 이유 없는 애정도, 이유 없는 호의도 믿지 않았다. 아니, 자신에게 그것들이 주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반짝반짝한 감정 따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말씀대로라면 굳이 조건을 거실 필요가 없잖습니까. 그냥 가라고 하시면 그만입니다.”
자연스레 호의에 감사하고, 답례하는 혹은 부드럽게 거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으므로 아롈이 그의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은 알량한 논리뿐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그가 얼굴을 감추듯 손등에 메마른 입술을 내리눌렀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며 바르르 떨렸다.
“그런데 속이 뒤집어져서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손등에 거의 입술을 대다시피한 채로 말을 이었다. 숨결이 뜨끈하게 들러붙었다.
“누가 그러더군요. 아렐르를 그냥 내버려두라고. 동정심과 의무감에 인생을 바치지 말라고. 동정심은 평생 가지 않으니 아렐르에게 매달리지 말고 다른 여자를 만들라고. 아렐르는 잠깐은 죽을 만큼 힘들어서 울지 몰라도 곧 괜찮아질 거라고요. 아이를 낳아 아이를 키우든, 아니면 따로 애인을 만들든.”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정리되지 않은 생각은 채 말이 되어 나가지 못했다.
“마냥 허황된 생각은 아니에요. 사실 아렐르는 당장 다른 남자를 만나도 괜찮잖아요? 정절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어요. 아렐르에게 제 생각을 해서 다른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부당할 테죠.”
아롈은 그만 동요해서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다른 사람, 다른 남자. 그의 마음이 변할까 걱정했지 그가 아롈의 마음이 변할까 걱정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혼외정사를 경멸하니까.
“저와 멀어지는 게 아렐르에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건 알아요. 제가 아렐르에게 모진 일을 했다는 것도, 그리고 제 애정이 아렐르가 잃은 것들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네, 다 알고 있어요.”
불현듯 깨달았다. 아롈은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세시안이 힘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다 맞는 말인데 아렐르를 혼자 놔두고 온 것밖에 생각이 안 나더군요. 아렐르의 옆에 다른 남자가 붙어 있을 생각을 하니 속이 뒤집히더군요. 사실 그 때 알았던 것 같군요.”
애정을.
그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아롈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부러 매몰차게 굴었다.
“그럼, 왜 위험을 감수하신 겁니까. 그저 가만히 계셨으면 됐을 겁니다.”
“한 바퀴 돌아온 이야기지만, 아렐르가 새장 안에서 말라 죽어가는 게 싫어서요.”
“우스운 비유십니다. 저는 새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마침내 손등에서 입술이 떨어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새는 미물이라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어서 옆에 두려면 새장에 가두거나 날개깃을 자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에 있는 건 결국 제가 선택한 겁니다. 알량한 자기만족에 목숨을 걸지 않으셨더라도 저는 제 선택에 책임을 졌을 겁니다. 그런데 대체 왜 자기 손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위험만을 감수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롈이 방금 드러낸 허점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눈앞의 자잘한 말싸움에서 이기려고 달려들다가 큰 판에서 지는 길로 빠져버리는 전형적인 실수였다. 그리고 상대가 이걸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그럼 절 선택해줄래요?”
말이 잘렸는데도 불쾌해할 겨를이 없었다.
목소리가
절박해서.
“알려주면 안 될까요? 제가 어떻게 하면 제 옆에 있어줄래요?”
“전하.”
“부탁이에요.”
눈을 질끈 감았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애원하는 목소리만이 색을 띠었다.
“제가 망쳐버린 것들을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랑해요. 아렐르가 우는 게 싫어요. 하지만 같이 있고 싶어요.”
저 말을 듣지 않아야 할 이유가 천 가지 쯤 떠올랐다.
믿지만 않으면 된다. 믿지 않으면 마음대로 살 수 있다. 사람의 가냘픈 마음에 매달려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이본느가 가져온 진주 한 상자를 떠올려보았다. 알이 고르고 굵은 진주는 ‘쾌유를 빌며’ 주기에는 거한 선물이었다. 대번에 선물을 가져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롈이 항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르디가 대가를 받은 것이다. 아롈은 얼마를 받았느냐는 질문을 삼켰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기뻐할 사람이 있으니 되었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힘이 없으니 따지기도 귀찮았다. 웃으며 받고, 미셸을 통해 리젤로트에게 넘겼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까 제 옆에 있어줄래요?”
그냥 믿지만 않으면 된다. 그럼 다시는 황후에게 무릎 꿇을 일이 없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체념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불려가 황제에게 모욕을 당할 일도 없을 테지.
벨타 때문에 전전긍긍할 일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남편의 책임이었다. 그런 약속을 함부로 하면 안 됐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나 많았다.
눈을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면.
아롈의 손을 잡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저도 겁이 나는군요. 아무래도 사람의 마음은 붙들어놓을 수 없으니.
그 말이 불현듯 머리를 지배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롈이 죽 늘어놓은 말들에 대한 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겁도 흉도 많은 사람이었다. 한 번 결정하면 주변을 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달려드는 아롈과 달리 옆과 뒤를 살피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런 사람이 한 약속이었다.
사람의 진심은 말이 아닌 행동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대리물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다. 무릎을 꿇고 자존심을 내던지고 애원하는 사람도 없다.
이만큼의 무게, 애정이 아니면 뭐라고 하면 좋을까.
깨달았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롈은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정을 받길 원했다. 믿으면 안 되는 이유를 캐내어 도망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유를 알아버렸다.
줄곧 싸우던 마음이 웃었다.
아롈은 엉거주춤 일어나 바닥에 따라 내려앉았다. 남편의 손 위에 남은 손을 마저 겹쳤다. 몸살 때문에 허리가 시큰거렸다. 하지만 지금부터 할 대화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전하.”
“예.”
정면에서 보자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희미한 희망, 의아함, 슬픔과 두려움 같은 것들.
“전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던 말.”
의미를 가늠하는지 그의 눈이 흔들리면서도 가늘어졌다. 귀와 뺨이 화끈거렸다. 스스로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힘들었다.
이반 3세, 조부가 지금의 아롈을 보았더라면 무어라고 했을까. 사내 하나에 휘둘리는 계집아이라고 욕을 할까. 하지만 이미 계승권은 사라졌는데. 위축되는 마음을 억지로 잡아 뜯듯이 고백했다.
“사실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도저히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어서 눈을 피했다. 겹쳐놓은 손이 오므라들었다.
“다정하셔서 좋았습니다.”
아롈은 첫 걸음마를 하는 아기처럼 허둥거렸다. 한참 동안 단어를 고르고,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화를 낸 이유는, 전하께서 제게 다정하셨던 이유가 저를 죽은 여자에 대한 대리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런 적 없어요.”
사실 말을 내뱉는 순간까지도 미약한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대답은 단호했고, 약간의 모욕감까지 섞여있었다. 무너져 내리듯 안도했다. 그가 다시 힘을 주어 말했다.
“정말로, 그런 적 없어요.”
“예, 이제 압니다.”
“그리고, 또……. 또…….”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생각은 이미 잔뜩 했는데, 왜 입으로 나오지를 않을까.
뺨에 손이 올라왔다. 얼굴이며 귓불에 피가 몰린 탓에 서늘했다.
“저는 아렐르가 강해서 좋아요.”
얻어맞은 듯 아팠다. 강하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렐르는 강해요.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그렇게 똑똑한데도 항상 열심히 노력하고, 의연하고, 또 자존심 강하고, 긍지 높아서 좋아요.”
아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보니까 너 얼굴은 참 예쁘구나. 아무리 예뻐도 사랑받진 못하겠지만.
“그 전에는 왜 그런 말을 안 했느냐고 물었죠. 그 전에는 제가 아렐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이런 저런 부분이 좋다고 간혹 생각했지만, 부분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발전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어요.”
-좋아하지도 않는 옷을 입고, 액세서리를 달고, 인형처럼 얌전하게 앉아서 기다려도, 네 애교는 그냥 그래. 꼬리 흔드는 강아지는 강아지인데, 너무 미약해서 티도 안 나. 그런데 애교도 안 떨면 누가 널 예뻐해 주겠어?
눈물이 그렁하게 맺혔다가 이내 흘러내렸다.
아롈이 스스로 자랑스레 여기며 긍지 높게 다듬어온 덕목들을 이토록 명료하게 인정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성실함이나 책임감은 아롈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당연해서 스스로 장점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명석함이나 성실함이 애정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 또한 없었다.
-고귀한 혈통을 지닌 공주님, 아니 여대공 전하. 내가 장담하지. 너는 분명 훌륭한 태자비고, 훌륭한 황후가 될 거야. 네 남편의 곁에 묻히고 썩어문드러진 다음에도 사람들은 널 기억하겠지. 그리고 넌 영원히 사랑받지 못 할 거야.
“더 빨리 알아차리고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딱딱한 껍질 사이로 연약한 속살을 쿡 찔린 듯 눈물이 쏟아졌다.
“사랑해요.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될까요?”
뺨에 닿아있던 손이 아롈의 눈물을 훔쳤지만 닦기가 무섭게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울지 말아요. 싫다고 해도 괜찮으니까, 아니 괜찮지는 않지만, 참을 테니까요, 어쨌든 제발 울지 말아요.”
아롈은 그의 부축을 받아 도로 자리에 앉았다. 세시안은 품을 뒤져 손수건을 손에 쥐어주었다.
“사, 사샤는……, 알렉산드르는, 하아, 제가 여덟 살 때 도망쳤습니다.”
눈물에 익사할 것처럼 헐떡였다. 바로 앞에 있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자 손등 위로 눈물이 줄줄 떨어졌다. 감정이 북받쳤다. 사샤가 알렉산드르의 애칭이며, 알렉산드르가 오빠라는 것을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알렉산드르라면, 아렐르의 오빠 말인가요?”
다행히도 세시안은 대충 눈치로 알아들은 듯했다.
“예.”
“사랑의 도피였나요?”
어떻게 알았을까. 아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렐르, 제가 세르 자리를 내어놓길 원해요?”
습관적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공작 작위로 내려가면 아렐르의 지위도 함께 내려갈 텐데요. 그래도 괜찮다면 진지하게 생각해볼게요. 하지만 이 자리에서 확답은 주지 못하겠군요. 미안해요.”
입에 발린 말이나마 여지를 남기는 것이 놀라워 눈물이 그쳤다. 아롈은 손수건으로 끈적이는 얼굴을 닦으며 부정했다.
“그런 것 아닙니다.”
“미안해요. 본의 아니게 말을 끊었군요. 계속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요?”
세시안은 다시 아롈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사샤는 애정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지위보다도, 신분보다도, 목숨보다도, 다른 모든 것보다도. 파블 1세 폐하께서도 그런 분이었습니다. 제 고모나, 키예나의 피를 이은 제 조상 중에도, 한 대에 한 명 이상은 그런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아롈은 어금니 안쪽 살을 깨물며 ‘여동생보다도’라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아직 오라비가 자신을 버리고 간 상처가 아물지 않았나보다. 열여섯이나 먹었는데도, 칠칠치 못하게.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아롈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선언했다.
“저는 감정 때문에 책임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못 됩니다.”
“알아요.”
“저는 황제의 손녀로 태어났고, 제 긍지와 명예가 가장 소중합니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사샤처럼 그를 위해 황위를 버리고 도망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아롈에게 있어서 애정은 그런 것뿐이었다. 사람을 살게 만드는, 없으면 안 되는, 코시카 황위조차 버리고 도망치게 만드는 것.
세시안은 아롈의 말뜻을 알아차린 듯했다. 단정한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쓰라린 미소가 언뜻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는 아롈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아렐르가 그런 사람이어서 좋아요. 미안해요.”
다급히 입을 막았다. 겨우 그친 울음이 다시 터질 것 같았다. 숨을 몇 번 들이키자 눈가까지 넘쳐흐를 듯한 눈물이 잠잠해졌다.
“저는 생각하시는 것만큼 강한 사람은 못 됩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요. 하지만 명심해둘게요.”
“숨기고 있는 것도 많습니다. 영영 말씀 못 드릴지도 모릅니다.”
“아렐르가 말할 생각이 들 때까지 기다릴게요.”
“이런 반쪽짜리 마음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남편의 단정한 얼굴에는 아직까지 여유가 없었다. 아롈이 만분지일이라도 혹여 대리물로서의 애정이었다는 답변이 나올까봐 겁을 먹었던 것처럼, 그 역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롈은 속삭이듯 대답했다.
“이런 애정이라도 괜찮으시다면 곁에 있겠습니다.”
눈물이 부옇게 앞을 흐려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촉감만은 선명했다. 아롈의 손을 끌어다 만지작거리더니, 드물게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끌어안아도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그를 지탱하고 있던 자제력이 풀린 듯 그가 아롈을 당겼다. 아롈은 쓰러지듯 그의 품에 안겼다.
“사랑해요.”
목소리에 눈물기가 배어있었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아롈은 눈을 감으며 처음으로 또박또박 마음을 되돌려주었다.
“저도, 사랑합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