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라마지 않는 (23)
“무슨 일로 왔느냐, 내 사랑하는 아들아.”
속이 끓을수록 그의 목소리는 점점 깊고 부드러워졌다. 사랑하는 아들. 그래, 사랑하는 아들이다. 온 힘을 다해 갈고 닦은 후계자.
“폐하께서 저만 따돌리시는 듯하여 이리 와 앉았습니다. 설마 쫓아내시겠습니까?”
황제의 눈이 며느리에게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당황한 듯 움찔했다. 미리 말을 맞추지 않고 온 것이다.
“그럴 리 있겠느냐. 가서 차를 한 잔 더 내어오너라.”
문가에 서 있던 세시안의 시종이 허리를 숙이고 나갔다. 잠시 후 시녀 하나가 들어와 다과를 가져왔다. 새로 끓인 차에 잔이 세 개, 접시 가득 곁들여 먹을 간식이 담겨 있었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세시안은 보란 듯이 엘리엔의 잔에 설탕을 직접 타주고는 간식 접시를 끌어다 앞에 놓아주었다.
“우리 며느리는 슈를 좋아하는가 보구나.”
그는 인자한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까지 표정에 일절 변화가 없이 고상하기만 하던 창백한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무슨 추태라 할 것이 있겠느냐. 들거라. 혹여 선약이 네 남편과 있었던 것이냐.”
“그렇습니다, 폐하.”
아들이 대신 대답했다. 찻잔을 들지 않은 왼손이 며느리의 왼손을 단단히 잡은 채였다. 약지에 반지가 빛났다.
“부부간에 오붓하게 식사를 하고 싶었을 터인데 내가 끼어도 되겠느냐.”
싫다 할 리 없었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니.
“영광입니다.”
“헌데 옷이 무거워 보이는구나. 그리 무거운 자리가 아니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너라. 식사를 하고 산책이라도 잠시 하자꾸나.”
녹빛 시선이 아들을 향했다.
“너는 온 김에 그 동안 잠시 내 말동무라도 해주려무나.”
“그리 하겠습니다.”
축객령이었으나 황제로서는 핑계를 붙여 최대한 아들 앞에서 며느리를 예우해 준 것이었다. 며느리도 아들도 그것을 아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들은 직접 일어나 문 앞까지 며느리를 배웅해주었다. 잡은 손이 떨어질 때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문이 닫혔다.
아들의 눈에 맺혀있던 짙고 두터운 애정이 흐릿하게 흩어졌다. 그는 돌아와 황제의 앞에 다시 앉았다.
“그래, 신혼 재미가 여간하더냐.”
“제가 제 비(妃)를 챙기는 모습이 그리 눈에 밟히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보기 좋아 하는 말이다.”
꼬박 서른 해 가깝게 키운 아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단정한 얼굴에 갑옷 같은 미소가 서렸다.
“짐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하문하십시오.”
“그리 좋으냐?”
“예.”
잠시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새치 섞인 검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계승권보다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세시안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제 아내를 제 끝으로 정했습니다. 이번에 잘못되면 아이가 있든 없든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려 합니다.”
“후…….”
깊은 한숨이 흘렀다. 루이 오귀스트는 이마를 찌푸리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대체 무엇이 그리 못마땅하십니까?”
여전히 공손하고 예의바른 말투였으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정해주시어 신의 앞에서 맹세한 제 아내입니다. 결혼하여 채 사 계절을 함께 보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디가 그리 성에 차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는 방금 네 아내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그 아이가 말하길, 코시카와 웨데나가 전쟁을 할 것이라 하더구나.”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릴레벨트 해의 용 때문에 해상 봉쇄를 했지요. 그게 인접국에는 도발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판단의 근거가 부족합니다. 즉위 직후입니다. 전쟁을 두 개나 벌이는 일이 그리 가벼울 리 없습니다.”
“짐이 듣기에는 제법 믿을 만했다.”
“그러십니까. 이득을 볼 수 있는 정책이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웨데나는 멀고, 식민지가 접해있지도 않지. 두어라.”
“예.”
“그보다 짐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그만큼 내다볼 수 있는 아이다. 그 명석함이 언젠가 네 등에 칼을 찌르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세시안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벌리다가, 일단 말을 다 듣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그 어미가 남편의 등을 찌르고 제위에 올랐다. 그래, 안다. 로렌은 황후가 제위에 오르는 법은 없다. 그러나 너나 나는 그 아이의 아비를 죽인 원수가 아니냐.”
“모르시고 제 비(妃)로 요구하시지는 않았을 터입니다.”
여제에게 대가로 딸을 내놓으라 한 것은 황제였다.
“짐이 판단을 잘못했다. 그래봐야 어린 계집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어가 있겠는가 싶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아니더구나.”
그 쓸데없는 날카로움, 명석함, 총명함. 후계자 자리에 미련이 없을 리가 없다.
세시안은 짧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제 목조차 지키지 못하리라 여기십니까?”
“네가 이렇게 구는데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눈이 매섭게 날이 섰다.
“확신할 수 있느냐?”
“폐하.”
“그 아이가 원한을 품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맥없이 밀려나 떨어진 아이이리라 믿어서 네 짝으로 적당하다 여겼다. 헌데 지금 보니 아니구나. 밀린 것은 잠깐의 실수일 뿐이고 마음속에 복수의 마음을 품고 있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느냐?”
“원래 아버지와 사이좋던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아비와의 사이는 그래, 네 말대로라고 치자. 하지만 계승권에 아직까지 미련이 없다더냐? 후환을 남겨두고 어찌 편히 잠들겠느냐.”
“폐하, 아니 아버지. 간청 드립니다.”
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선택한 사람이고, 저를 선택해준 사람입니다. 제 끝으로 삼고 평생을 존중하고 아끼겠다고 이미 결정했습니다. 제 등에 칼을 꽂을 사람도 아니지만 설령 제 목에 칼을 들이댄다고 해도 제가 알아서 피하겠습니다.”
-제 선택을 그리 믿지 못하신다면, 어찌 제게 제위를 물리려 하십니까?
약 삼십여 년 전, 루이 오귀스트는 바로 이 자리에서 그리 말했다. 그는 스물일곱 살, 검은 머리와 녹색 눈을 가진 세르였다. 한순간 아들의 모습이 옛 자신과 겹쳐보였다.
-마르그리트 역시 대공의 딸입니다. 오를레앙의 장녀가 툴루즈의 아가씨에 비해 무엇이 부족합니까?
-모든 것이!
아델라이드 선황후는 그 자리에서 세르였던 루이 오귀스트의 뺨을 후려갈겼다. 황제는 혀로 입 안쪽 살점을 더듬었다. 오래 전에 터진 자국이 아직 남아 있을 리 없건만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지는 듯했다.
모든 사람이 그의 선택을 틀렸다 말했다. 외조부가 지팡이를 집어 던지고, 아버지는 그를 폐하겠다고 했다. 총명한 미인을 버리고 발가락 없는 시골뜨기를 아내로 맞는다 공공연히 비웃음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 어떠한가. 루이 오귀스트는 옳은 선택을 했다.
“그러니……, 제발 그냥 두십시오.”
황제는 과거의 자신에게 설득 당했다.
-제 선택을 그리 믿지 못하신다면.
평생을 공들여 키운 아들이었다. 천재는 아니어도 진중하고 온유한 성품이어서 실망시켜본 적이 별로 없었다. 딸들에게 하던 것처럼 맘껏 무릎에 올리고 아껴주지는 못했으나 아비로서 얻은 지혜는 모두 가르쳐주었다. 그가 겪은 실패는 피하도록, 그가 얻은 성공은 가지도록.
문득 가슴에 응어리가 치밀었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했다. 흰 수건에 피가 묻어나왔다.
“괜찮으십니까?”
아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황제는 손을 내저었다.
그래, 이리 말하는데 믿어야 한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이미 장성한 지 오래였다. 작은 선택은 고치라 질책할 수 있어도 큰 선택은 틀을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이미 그렇게 자란 아이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결정을 했다는데 불안하다 한들 어쩌겠는가.
황제는 헐떡거리며 서너 번 잔기침을 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시큰거렸다.
이리 간청하니 몰래 죽일 수도 없고, 며느리가 제 어미에게 죽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죽으면 아들은 평생 그를 원망할 것이다. 사람은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건강이 서서히 스러져가는 지금, 후계자가 무너졌다가 재구성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알았다.”
침착하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밝아졌다.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원래 아들은 여동생이든 동생이든 어머니든 아내든 잘 챙기고 다녔지만 저리 티가 나게 감싼 적은 없었다.
세시안은 기쁨 어린 얼굴로 웃다가 문득 특유의 신중함을 발휘하여 되물었다.
“진정이십니까?”
“알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황제는 불씨를 남기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가 아들을 아는 만큼, 아들 역시 그의 성격을 잘 알 터였다.
“곤하구나. 식사는 같이 하지 못할 것 같으니 쉬어야겠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네 아내에게 알겠다고 전하거라.”
일어나려던 아들은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알겠다고,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전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알겠다고.”
“예. 그럼.”
집무실을 나서는 아들의 발걸음은 어딘가 들떠 있었다. 황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계획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 아이는 호락호락하게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설득하고 구슬릴 말을 떠올려야 했다.
그러나 생각을 얼마 이어가기도 전에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황제는 가슴을 움켜쥐고 시종을 불렀다. 시종이 아니라 공식 정부가 달려왔다.
그는 정부의 부축을 받아 침실에 가 누웠다.
아직 안 된다.
이렇게 결정한 이상, 최소한 여섯 해는 더 버텨야 한다.
손자를 보고, 그 손자가 이름을 받는 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죽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공식 정부의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누웠다. 욕망을 태우는 순간만큼은 젊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