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조손 (2)
“예가체프의 드미트리가 폐하를 알현하며 고개 숙이나이다. 예가체프는 코시카의 것이고, 코시카는 키옌의 것입니다.”
“일어나라. 짐의 신의는 예가체프의 것이다.”
묵직한 느낌의 코시카 대원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손녀를 가르친다고 들었다.”
“그러합니다만.”
“좀 어떤가?”
“감히 여대공 전하의 일에 대해 신하로서 왈가왈부하겠습니까?”
“명이다.”
“검술 그 자체로만 말씀드린다면 재능 있으십니다.”
주름살이 깊어졌다.
“검술?”
“예. 기술적인 면으로 보면 뛰어나십니다.”
“그 자리에 중요한 것이 기술이 아니잖나. 내가 묻는 것에 대답하게.”
장군은 진중한 이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을 내놓았다.
“다정하신 분입니다.”
“마음이 약하다는 소리군.”
“폐하. 감히 말씀드리오면 육신이 자라는 데에 필요한 것처럼 마음이 여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한 줄로 아옵니다.”
호통 몇 번에 금세 울먹이고, 꽃병 좀 던졌다고 겁먹어 덜덜 떨던 얼굴이 생각났다. 이반 3세는 미간 아래 솟은 코를 꼬집듯이 눌렀다.
대체 언제부터 다정함 따위가 군주의 덕목이 되었단 말인가? 어머니인 안나 여제의 성향을 물려받아 호전적인 이반 3세는 그를 인정하기 힘들었다. 군주의 덕목은 냉정한 결단력과 패기가 아닌가. 다정함, 상냥함, 부드러움은 언제나 얕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내가 오늘 여기에 자네를 부른 것은 시킬 일이 있어 그래.”
“하명하소서.”
“그 애를 찾아가서 문서 쓰는 법 좀 가르치게. 도저히 눈뜨고는 못 보겠으니.”
장군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상관의 명령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군인이었으므로.
“명을 받잡겠나이다.”
“잠깐.”
장군이 일어나려는 순간 황제는 그를 다시 불렀다. 동작이 뚝 멈추었다.
“가서 선생처럼 하나하나 이래라 저래라 할 것 없네.”
되물음도 오지 않았다. 이반 3세는 방백을 하는 연극배우라도 된 심정으로 줄줄이 말을 읊었다.
“혼자 생각을 하는 게 있어야지. 그저 어미새가 떠먹여주듯 먹이면 뭐가 되겠나. 그냥 실마리만 주면 되네. 제발 기존 문서 양식 좀 참고해서 베낄 생각이 들도록. 이해했나?”
“명심하겠나이다.”
한 달 쯤 서류를 돌려보내길 반복하고 난 뒤, 이반 3세는 슬슬 형편없는 양식에 달관할 지경이었다. 갈비뼈가 다 붙었지만 아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의도에서 침대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다가, 손녀가 가져온 서류를 받아들었다.
읽을수록 그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한 줄, 두 줄, 한 장, 두 장. 황제는 표지부터 마지막 장까지 끝까지 읽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 양식은 적어도 사람이 볼만했다. 사람 심란하게 만들던 줄도 이제는 그럭저럭 잘 맞았다. 한 달이라는 기간은 길었지만 어린 아이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찾아낸 것이라는 걸 감안하면 봐줄 만도 했다.
“어찌 보십니까?”
“형편없다.”
기쁨이 덮여있던 얼굴에 단숨에 불이 꺼지고 시무룩해졌다. 열두 살이라고 했다. 생각보다는 나이가 많았다. 얼굴도 작고 가녀리기만 해서 영락없이 열 살이나 열한 살인 줄로만 알았다.
“반도 삼국이 어디냐.”
“웨데나, 마르카, 노르카디아입니다.”
“수도는?
“크리스티아니아, 하르게니아, 리파르겐입니다.”
“국왕은?”
“웨데나 국왕은 하펠 3세이고, 마르카와 노르카디아 국왕은 구스타프 2세 칼입니다.”
“그들의 성격은?”
의외로 술술 대답하던 소녀는 머뭇거렸다.
“그들의 성격은?”
손톱을 깨물며 안절부절 못하던 소녀는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죄송하다 하지 말랬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알면 이렇게 안 썼을 테지.”
“다시 해오겠습니다.”
말없이 손짓했다. 소녀는 무릎을 꿇어 인사하고 다시 방을 나갔다. 적막했다.
원래 아이란 저런가? 저것밖에 못하는? 미숙하고 뒤뚱거리는 아기였던가? 큰손자는 저렇지 않았는데. 황제는 눈을 감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항상 아끼던 며느리가 사뿐히 그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병중에 계시온데 어찌 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나긋하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이반 3세는 이 며느리를 정말로 아꼈다. 큰 딸이 그렇게 엇나갔는데 아들까지 그리 되었으면 정말 혀라도 깨물고 죽고 싶었으리라.
“마음은 안다. 그러니 용건을 이야기하거라.”
며느리는 남부식 차와 함께 나온 머랭 과자를 먹으며 한 텀 쉬고는 단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대공이 올해 열두 살입니다, 폐하.”
“하여?”
“약혼할 나이가 아닙니까. 사내를 고르기 전에, 혹여 폐하께서 심중에 두신 이가 있는지 여쭈러 왔습니다.”
“파블은 뭐라 하느냐.”
그저 웃었다. 그 말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고얀 놈.”
“혼사는 결국 여인들의 일이고, 딸의 혼사는 어미의 일입니다. 아비가 나서지 않는다고 하여 흠은 아니지요. 부디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황제는 습관적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 반반하니 시집갈 곳 찾기는 용이할 게다.
사실 고민조차 할 일이 아닌 것을. 이반 3세는 자신의 고민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 좋은 조건의 사내가 없나, 적당한 가문에 아들이 있던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시집을 보내도 되는가, 아닌가’였다.
-저는 안나 여제 폐하의 증손녀이며, 폐하와 소피야 황후 폐하의 손녀이며, 파블 대공 전하와 옐레나 여대공 전하의 딸입니다. 제 자격은 키예나의 가장 짙은 푸른 피, 그것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쳐주시면, 고쳐오겠습니다.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은 그 강단이었다. 키예나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그 덕목이 손녀에게도 있는가? 그럼 다시 한 번 믿어야 하는가?
“폐하?”
“당분간 약혼은 없는 걸로 해라.”
“진정이십니까?”
“그 조그마한 것을 약혼으로 묶어봐야 뭐 시집가서 아이는 낳겠느냐. 조금 더 클 때까지 지켜보도록 해라.”
“예.”
며느리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목선이 꼭 백조 같이 완벽했다.
“모두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름살이 접혔다가 다시 펴졌다.
“기회를 달라 했으니, 한 번은 줘야 공평하겠지.”
며느리의 딸이다. 어미로서 당연히 그 딸이 인정받을 기회가 오면 기뻐하겠지. 편견에 눈이 가린 황제는 아끼는 며느리가 그 딸을 증오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고칠 부분을 말씀해주십시오.”
제법 볼 만하지 않은가.
이반 3세는 얼굴을 찡그리곤 손녀를 쳐다보았다. 젖살이 빠지지 않아 뺨이 둥글었으나 여전히 눈부시게 예뻤다. 두 해 가까이 지나면서 소녀는 키가 훌쩍 컸다.
서류는 세금을 조율할 품목들을 고른 제안서였다.
“왜 이 품목들을 골랐느냐?”
“계산을 해봤을 때 이 조합이 가장 나았습니다.”
“계산 내용은?”
“여기 있습니다.”
소녀는 들고 있던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 다섯 장에 숫자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표는?”
다음 종이를 내밀었다. 가로와 세로줄을 맞추어 깨끗하게 정리해두었다. 또박또박한 문자로 수를 기록해놓았다.
“나쁘지 않구나.”
온실 구석에 심어두고 모두가 잊어버린 귀한 구근이 어느 새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듯 자라있었다.
아직은 열세 살, 봄이 오면 열네 살. 정말로 나쁘지 않다.
“이건 왜 포함시켰느냐?”
주름진 손가락이 한 단어를 가리켰다.
숯이었다. 숯은 세금을 붙이지 않는 품목에 속해있었다.
“곧 겨울인지라 넣었습니다.”
“숯은 세금을 깎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숯을 만드는 가마에 한 번 붙고, 상인에게 유통될 때 한 번, 도로세에서 한 번 붙어서 총 세 번 붙습니다.”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냐. 숯을 못 떼는 이는 목재를 가져다 뗄 것 아니냐. 대체품이 명확한 마당에 사치품 세금을 깎아 무엇에 써?”
소녀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실핏줄이 선 눈에 갈등이 스쳤다. 그러나 이반 3세는 그녀가 고민을 해서 반론을 내놓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숯만 수정해서 이대로 하라 전해라.”
“알겠습니다.”
그 순간 노인의 눈이 꿰뚫듯 무언가를 알았다. 그는 이 년 간 그 자신이 외면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오랜 세월 굳어진 관념은 스스로도 고치기 힘들었다. 그는 일흔 노인이 당연히 그렇듯 고집이 강했다.
울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아닌 척 해도 결국 그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폐하.”
소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흰 베일이 눈부신 금발을 덮고 있었다. 이마 위와 뺨 옆으로 동글동글한 진주가 늘어졌다. 얼마 전 열네 살 생일을 맞이하여, 며느리를 통해 전해주라 한 물건이었다. 선황후의 유품이니 명분도 부족하지는 않을 터였다.
베일은 땅에 끌리지 않고 발목 즈음에서 보기 좋게 늘어졌다.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의 부스러기 같던 열두 살에 비하면 눈부신 성장이라 할 만했다.
“허. 허.”
말 대신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흘러나왔다. 그 대신 옆에서 정부가 공손하게 설명했다.
“요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십니다, 아롈 전하.”
그 무슨 소리. 말은 알아듣는다. 강건한 육체에 병마가 침입하여 폐렴을 낳았으므로 말을 하기 어려울 뿐. 숨을 쉬기가 힘들고, 말을 하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입 안은 메마르고 그저 침을 삼키는 것조차 지난한 일이었다.
그는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냈다.
“너.”
“예, 하명하소서.”
“아, 아니다, 너는.”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매가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기만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는 그가 호통을 쳐도 울지 않는다 해도, 제법 사람이 눈 뜨고 봐도 괜찮은 서류를 작성해온다고 해도, 페란토 어를 비롯한 다른 외국어에 능통하다고 해도, 암기를 잘 한다고 해도, 얼굴이 서리처럼 냉랭해 보인다고 해도.
이 아이는 아니었다.
너무 상냥하고, 너무 마음이 약하다. 똑똑하지만 단호하지 못하다. 겉으로는 언뜻 근사해보여도 속은 말랑말랑해서 곁에 둘 사람을 잘못 고르면 평생 휘둘릴 것이다.
겨우 열네 살, 봄날 개나리처럼 낭창하던 가지도 시간이 지나면 단단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물려주지 못한다.
“느, 너, 너어는, 하아, 아니야아.”
창백한 입술을 깨무는 듯하더니 소녀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폐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이 년 동안 가르친 성과였다. 이반 3세는 기침을 했다. 붙은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듯 가슴이 아팠다. 유리 가루라도 들이킨 듯 흉부가 시큰거렸다.
“너, 느어, 너…….”
“말씀해주십시오. 무엇이든 고치겠습니다.”
그래도 내 무릎 아래 남은 것이 너 뿐이다.
이반 3세는 끝내 그 말만은 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예가체프.”
“예, 폐하.”
독한 약을 쓴 끝에 황제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촛불이 꺼지기 직전에 가장 밝게 빛나듯, 그는 침대에 기댄 채 삶의 마지막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가 임명하고 평생 꾸린 군의 정점이 그의 눈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그 애를 부탁하네.”
“폐하. 신은 두려워 감히 따를 수 없나이다.”
“짐은 그대를 믿어.”
“감히…….”
“평생 보라는 게 아니야. 적당한 짝을 찾을 때까지만 지켜봐주게.”
그 아비를 보고, 그 오라비를 봤을 때 사람을 잘못 사랑하면 끝내 휘둘릴 것이다. 기껏 길러낸 아이가 애정 따위에 죽네 사네 하는 꼴을 볼 생각을 하면 속에서 천불이 났다.
“알겠나이다.”
황제는 예가체프가 나간 뒤 다시 한 번 유언장을 읽어보았다. 그래, 이게 맞는 일이다. 이게 맞는 것.
버석한 손이 종이를 쓸어내리다가 툭 떨어졌다.
황제는 정신을 잃었다.
“폐하.”
그래. 내가 이 코시카의 주인이다.
“약을…….”
젠장. 난 쓴 게 싫어.
“정신을 잃으신 지 이제 사흘 째…….”
저놈의 돌팔이의 목을 당장 쳐야겠다. 누가 정신을 잃었다는 게지.
“아버지.”
네 놈 목소리 듣기 싫다, 꺼져!
아니, 반항하는 게냐? 대체 가란다고 사죄 한 번 않고 진짜 가는 법이 어디에 있어!
네놈만 조금 멀쩡했으면 내가 이리 속이 썩겠느냐?
“폐하.”
그 목소리에 황제는 이끌리듯 눈을 떴다. 할 말이 남았다.
“폐하.”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여전히 검기만 했다.
“가, 가까이 와라.”
“예.”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 소, 손.”
서늘한 손이 가랑잎 같은 손을 잡았다. 황제는 그 위에 다른 손을 겹쳤다.
“너…….”
“듣고 있습니다, 폐하.”
“짐이 새, 생각을, 흐어.”
영혼의 재질이 다르다.
군인들의 황제는 그리 판단했다.
이반은 냉정하고 알렉산드르는 격렬했다.
타고나길 잘 조각한 대리석 같았던 이반이나, 자기가 정하면 흔들림 없었던 알렉산드르와는 타고나길 다른 재료로 빚어졌다. 이반보다 더 절박하고 알렉산드르보다 더 똑똑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천성이 동정심 많고, 말랑하고, 상냥하다.
지금은 옆도 뒤도 보지 않고 달리고 있다. 이 아이를 이토록 절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원동력이 사라지는 순간 바퀴 빠진 수레처럼 넘어져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노인의 예측은 실로 비관적이고 단정적이었다. 노인은 젊은이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데에 익숙했고, 자신이 틀리거나 보지 못하는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 면에 있어서 아롈은 부적격했다.
“해, 흐어, 허, 보, 았는, 는데.”
가장 걱정되는 것은 여물기 전에 부러지는 것, 그 다음으로 걱정되는 것은 감정에 눈이 멀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그게 두려워 다그치고, 호통치고, 채찍질했다. 쓰러질 거면 일찍 쓰러지라고. 다 늙은 노인에게 기대라는 것을 심느니 ‘역시 계집아이는 안 돼’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도록 하라고.
그러나 이 아이는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제법 번듯했다. 영혼의 재질은 다르다 해도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면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예, 옐레나 1세도, 괜찮을 것, 같구나.”
어쩌면 타고나길 단단한 사람보다 훨씬 잘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은 제대로 전해졌을까? 이것도 환상은 아닐까?
“감사합니다.”
그런 의심을 하고 있을 때쯤, 흐느낌에 가까운 인사가 들려와 그를 안심하게 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신이여, 키옌의 앞날에, 그리고 이 아이의 미래에 가호를.
코시카의 이반 3세, 안나 여제와 니콜라이 대공의 차자(次子)로서 즉위하여 사십 년 가까이 치세한 황제는 짧은 기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