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종려 가지 기사단 (5)
이틀 후, 앙투안은 예복을 주름 하나 없이 다려입고 자비관 인내의 홀에 섰다. 그와 다른 종려 가지 기사들은 평소와 달리 아롈의 뒤가 아닌 옆에 섰다. 외국의 귀족들이 로렌 기사들에게 무릎 꿇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번쩍번쩍하게 차려입은 그들과 달리 아롈은 특별히 성장하지 않았다. 시녀들이 조금 더 화려하게 꾸미시라 간언하자 아롈은 시큰둥하게 응답했다.
-신하를 만나는데 왜 치장해야 한단 말이냐?
때문에 옷차림은 지극히 수수했다. 장식도 얼마 달리지 않은 청회색 옷에 틀어올려 리본으로 묶은 머리칼,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겹쳐 낀 약혼 반지와 결혼 반지.
이윽고 전나무처럼 키 큰 남자들이 들어왔다. 세 명 모두 로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파란 눈이었다. 앙투안은 괜히 눈 근처를 만지려다가 손을 말아쥐었다.
신분 높은 아롈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남자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미리 경고받았음에도, 앙투안은 신분 낮은 이가 먼저 말을 거는 이 상황에 거부감을 느꼈다.
"Ваше имперское высочество, Царевна Арел(아롈 여대공 전하)."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무릎이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일어나는 로렌의 예의와는 명확히 달랐다. 남자들은 양쪽 무릎을 모두 땅에 대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중년을 지나 노년에 이르는 사내 수 명이 그토록 굴욕적인 경의를 표하는데도 여상하기만 했다.
-사생아?
그는 전하라 불릴 수 있는 공작이었으나 앙투안의 앞에서 무릎 꿇는 이는 없었다. 대공가 출신의 사람들은 앙투안보다 지위가 높았고, 그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에게는 클라리 경으로서 행세한 시간이 길었으므로. 앙투안과 아롈의 신분에는 그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앉아라."
북쪽 캬트 어였다. 페란토 어로 말해 통역을 거치지 않은 것은 이 자리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님을 의미했다.
코시카 귀족들은 천천히 셋을 셀 동안 기다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어리고 예쁜 소녀 앞에 줄지어 앉은 채 정자세를 취한 나이든 남성들의 모습은 어쩐지 희극적인 구석이 있었다. 시녀들이 차와 다과를 차렸지만 손을 댄 건은 아롈 뿐이었다. 아롈은 작은 종지에 담긴 잼을 홍차에 두 스푼 넣더니 휘저어 마셨다.
"리디야는 잘 지내나, 스미르노프 백."
남자의 턱이 움찔했다. 앙투안이 전달받은 바에 의하면 비통치가문의 공작인 남자였다. 아롈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아롈은 실수가 아니라는 듯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 열다섯인가? 약혼할 때로군."
"그러합니다."
앙투안은 바싹 긴장한 채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 딸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사실 북부 귀족들이 아롈을 '황태자비'가 아니라 '여대공'이라고 칭한 것, 그리고 인삿말을 생략한 것부터 신경전의 시작이었으나 앙투안은 알아채지 못했다.
"상대는 어느 가문의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직 고르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중매를 서주는 건 어떤가."
스미르노프-백작인지 공작인지 모를 남자가 마른 침을 삼켰다.
"내 시녀였던 아이이니 내가 좋은 상대를 찾아주는 것도 좋겠지. 남쪽에도 괜찮은 가문이 여럿 있네. 적응될 때까지 다시 곁에 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고."
스미르노프 백작-공작의 눈이 급하게 굴렀다.
"아시다시피 외동딸인지라, 먼 나라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양해해주시기를."
"글쎄. 나도 한동안 외동딸이었지만."
분위기가 망치로 깨부순 과자처럼 으스러졌다.
"내가 이 곳으로 온 다음에도 친애하는 폐하께서는 건재하시다 들었는데."
원래 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나는 법이고, 마음을 다잡는 것 또한 부모의 역할이겠지. 안 그런가? 빈정거리는 말에 스미르노프 백작-공작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턱수염이 부숭부숭한데다 몹시 덩치 큰 사내였다.
"전하. 폐하께서는 항시 전하를 염려하고 계십니다."
옐레나 여제와 아롈의 관계를 모르더라도 거짓말임을 알 수 있는 말투였다.
"그래?"
"그러합니다. 폐하께서 전하께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서한은 이미 받았네만."
"제게 따로 주셨습니다. 여기."
남자가 품을 뒤져 편지를 꺼냈다. 코시카의 국장인 고양이가 아니라 키옌 가문의 상징인 독수리가 보르디의 청포도 덩굴 감긴 지팡이를 발로 쥐고 있는 개인 문장이었다. 봉투는 몹시 구겨져있는 데다가 더러웠다. 귀퉁이는 황갈색 액체로 물들어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피였다. 앤이 나서서 그 편지를 은쟁반에 올리고 아롈의 옆에 받쳐들었다. 아롈은 편지에 손도 대지 않고 물었다.
"대체 관리를 어찌한 것인지는 모르겠군. 오는 길에 해전이 있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용이라도 만나서 분투하고 왔나?"
"사정이 있습니다, 전하. 사실 이 편지는 일 년 전쯤에 전하께 전해졌어야 했습니다만, 불경하고 주제 모르는 자들의 손에 한 번 들어갔다가 최근 회수되었습니다."
"도적이나 해적은 아닐 테고. 사략인가? 원해(園海)에서 코시카 군함이 털렸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어디서 발견했나?"
"할름스타드입니다."
"웨데나?"
"예. 전리품 분배 중 발견하여 회수되었습니다. 여제 폐하께 다시 올라갔고, 폐하께서 보고를 들으시고는 이건 전하의 것이니 다시 드리라 하명하셨습니다."
"하필 웨데나라. 누가 옷을 벗었지?"
"예르바초프 소장입니다. 그에 더해 할름스타드에서 잡은 모든 군 출신 포로들은 폐하의 물건을 강탈하여 은닉한 죄로 처형했습니다."
"장교만이 아니라?"
"장교는 공개 교수형, 사병은 총살이었습니다."
"엄격하시군."
대체로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탓에 앙투안은 대부분의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웨데나라면 코시카 황제를 모시는 곳도 아니었다. 앙투안은 고작 편지 하나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도시 전체의 군 포로를 처형했다는 말을 담담하게 늘어놓는 남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아롈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폐하께서 답장을 달라고 하셨나?"
"그저 전하의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아롈이 뒤를 돌아 앙투안을 흘끗 바라보았다. 분명 눈이 마주쳤다. 앙투안은 불에 데인 듯 움찔했지만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 사이 아롈은 마치 실수였다는 듯 반대쪽으로 돌려 앤을 불렀다.
"앤, 칼을 가져와라."
남부 갈리아 어로 내려진 명령에 앤이 잰 걸음으로 인내의 홀을 뛰쳐나갔다.
"할름스타드 점령이라. 나쁘지 않은 전공(戰功)이로군. 누가 지휘했지?"
"샤라보스키 중장이 폐하의 깃발 아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칭찬할 만한 일이로군. 그 일로 진급한건가?"
"예, 그리고 지금은 상트 루스카부르크 조사를 맡고 있습니다."
분홍빛 입술이 묘하게 비틀렸다.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상트 루스카부르크. 즉 생 뤼스킨. 앙투안은 해당 지명을 이번 대회의에서 몇 번이나 들었다. 용이 다시 한 번 나타났다던, 바로 그 장소.
"상트 루스카부르크라. 나도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작다면 한없이 작은 일이 아닌가. 장성이 나설 만한 일은 아닌데."
"여제 폐하께서는 그 일에 큰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주변이 꽤 시끄럽지 않은가? 들쑤시는 게 썩 좋은 판단은...... 아니,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니로군. 이리 와라, 앤."
아롈은 마침 시의적절하게 돌아온 앤에게서 페이퍼 나이프를 받아들었다. 더러운 편지에 고개 숙여 입맞추고는 인장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봉투의 옆부분을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앙투안이 서 있는 자리에서는 편지의 내용이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길어보이지는 않았다. 연녹색 시선으로 편지를 두세 번 훑어본 직후, 아롈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봉투에 다시 편지를 넣어 은쟁반에 올려놓자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폐하께 전해. 뒤늦게나마 승전을 경하드린다고."
이번에는 앙투안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답장을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니. 아롈이 말을 마치려는 듯 차를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그 때 조용히 있던 세 번째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전하. 감히 청컨대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다면 독대하고자 합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레오노프?"
"경애하는 폐하께서 전할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신을 따로 쓰시지 않고 굳이?"
레오노프라 불린 남자가 아롈의 옆에 도열해있는 기사와 시녀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있는 자들이 굳이 캬트 어를 공부할 정도로 성실하거나 명석했다면 내가 일을 다섯 배쯤은 쉽게 했을 거야. 말 해."
남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레오노프.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지금 권유가 아니라 명령하고 있다."
레오노프는 즉각 대답을 토해냈다.
"폐하께서 상트 뤼스카부르크에 전하께서 관여하셨느냐고 하문하셨고 이번 질문에는 반드시 답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풋."
코웃음이 인내의 홀에 선명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