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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종려 가지 기사단 (11)


"레르헨펠트 양 말씀이십니까?"

 "그래."

숨이 턱 막혔다.

 "싫습니다."

아롈이 무릎을 톡톡 쳤다. 벌써 세 번이나 참은 것이다. 조금만 자극했다간 머리 위로 벼락이 칠 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가슴이 미어졌다.

 "앤의 지위가 모자라는 것은 나도 안다. 경이 생각이 있다면 내가 작센 국왕에게 부탁해 맞춰줄 요량이다. 공작 작위를 얹으면 앤이 그리 부족한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위는 상관없습니다."

사실 황제나 세시안이 관여하지 않는 이상 사생아인 그에게 선뜻 딸이나 손녀를 내어줄 대공가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세시안이 루이즈 마리와 결혼했을 때처럼 중부의 가난한 공국을 뒤져보면 또 모르지만, 앙투안은 그렇게까지 구걸해서 결혼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멘 공작 작위와 전하라는 칭호에 미련이 없으니만큼 전하라 불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사실은 어떤 여자가 좋다고 막연하게조차 생각해본 일 없었다. 열아홉, 아롈을 만나기 전까지의 앙투안은 그저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여 미래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레르헨펠트 양은 물론 훌륭한 분이지만 제가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았다. 앤은 이블린에서도 알음알음 아름답다 소문나 있었다. 휘하 시녀의 혼처를 찾아주는 일은 주인의 의무다. 앙투안은 애인이 없는 미혼의 공작이었다. 게다가 아롈을 모시는 기사이기까지 하니 더없이 적당해보였을 것이다.

사실은 무척 영광스러워야 할 일이었다. 앤은 미뇽이라고까지 천명한 아롈의 측근 시녀인데다 피를 나눈 친척이기까지 했다. 아롈이 앤을 아끼고 편애하는 건 온 이블린에 유명했다. 사람을 보는 데에는 바늘 구멍처럼 통과 기준이 까탈스러운 아롈이 앤의 남편감으로 앙투안을 적절하다 여긴 것이다. 백작녀라는 지위가 멘 공작 작위에 부족하다면 맞추어주겠다 선뜻 제안할 정도로.

그저 뛸 듯이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여 따로 마음에 둔 이가 있나?"

 "없습니다."

거짓말이 마음을 엤다.

 "그럼 됐다. 당장 결혼하라는 게 아니라 그저 고려해보라는 것 뿐이다. 어차피 앤은 내 곁에 이삼 년은 더 데리고 있다가 시집보내려 했다. 여태 다투고 헤어졌다 여겨 생각을 접고 있었는데 경이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지 않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사귀다 헤어졌다고 거짓으로 고할 것을 그랬다. 0

 "게다가 마음이란 언제든 뜻하지 않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입술을 올리고 눈을 초승달처럼 뜨고 아주 잠깐 웃었다. 사랑에 빠진 청년의 눈은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지 너무나 명징했다. 속이 아팠다.

앙투안은 아롈과 감히 결혼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가 적자였다면 몰라도 사생아라는 신분은 너무 떨어졌다. 그런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이건 너무 잔인했다. 혹여 내가 적자였다면, 황후의 아들이었더라면, 루이 샤를의 쌍둥이였더라면. 그런 부질없는 희망을 잠시라도 품을까 두려워 어금니가 부스러져라 이를 악물었다.

 "그럴 일 없습니다."

억지로 힘을 주어 말을 끊어냈다. 그저 고개 숙이고 생각해보겠다고 한 뒤 나중에 좋게 돌려 거절하는 게 최선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앙투안에게는 그럴 만한 요령이 없었다. 그저 마음 둔 상대가 있냐는 물음에, 그 상대를 눈앞에 두고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단언하는군?"

아롈은 멀뚱히 앙투안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마음이라곤 한 조각도 알지 못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라 이야기하는 소녀는 잔인한 만큼 눈부셨다. 고개 숙이자 잔디밭 위로 펼쳐진 치마가 눈에 들어왔다.

형수. 형수. 이복 형수. 세시안. 형.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앙투안. 트완. 제발.

풍성한 치맛자락 가득 자잘하게 달린 꽃의 개수만큼 웅얼거리고 힘겹게 고개를 들어보았다. 여전히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그저 울고 싶었다. 사실 앙투안이야말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연정은 제멋대로 찾아와 가슴 한 켠에 머물고, 뜻한 대로 떠나주는 법 없이 가슴을 찢어놓았다.

 "굳이 공작을 원하신다면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하아."

아롈이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앙투안은 곧 내리칠 벼락을 대비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롈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우면서도 거칠지 않았다.

 "클라리 경."

 "예."

 "내가 고작 공작 하나를 못 구해서 이러는 줄 아나?"

물론 이블린에만 수십 명의 공작이 살고 있었지만 고작이라 말할 정도로 흔하지는 않았다. 아롈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정 마음 없다는데 강제로 붙일 생각은 없어. 그저 둘의 혼사가 내 책임이고 서로 잘 맞을 거라 여겨 물은 것 뿐이다."

 "저도 말씀입니까?"

 "그럼? 누구 책임이지?"

앙투안은 필사적으로 여성인 친척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어머니는 죽었다. 북쪽에서 시집왔다는 앙투안의 외조모는 어머니보다 일찍 죽었다. 외조부는 중부 출신 혼혈이었는데 작위를 이어받은 외숙부를 따라 중부로 떠나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외숙모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황후가 신경써 줄 리도, 리젤로트를 비롯한 다른 이복 누이들이 관여할 리도 만무했다. 앙투안은 아는 여자를 이잡듯 뒤져도 이복 형수밖에는 결혼을 신경써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하께서 ​형​수​.​.​.​.​.​.​.​"​

 "경이 내 ​기​사​(​c​h​e​v​a​l​i​e​r​)​잖​아​.​"​

아롈이 기어들어가던 목소리를 끊고 말을 던졌다. 고작 말 한 마디에 풀이 죽어 늘어진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나라도 신경 쓰지 않으면 앞으로도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다니다 혼삿길이 막힐 것 아닌가?"

언제 서러워했냐는 듯 발끈했다.

 "맞고 다닌 적 없습니다!"

 "모브쥬 공작은?"

 "밀치신 것 뿐입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 어디 감히 남의 기사에게 그런 막돼먹은 짓을 해?"

시숙부이자 황제의 동생인 HIH 공작에게 '감히'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롈다웠다.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쓸어넘기자 차가운 은빛이 도도하게 흘러내렸다.

나뭇가지처럼 가냘프지만 단단하고, 차갑지만 따스해보였다.

북쪽 캬트 어로 몇 마디 욕을 중얼거리던 아롈이 불현듯 앙투안을 노려보았다.

 "경도 경이야. 굳이 그 자리에 찾아가야 직성이 풀리나?"

 "죄송합니다."

망설이다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나서주신 것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 아는군?"

당연히 모를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남들이 설명해 주어 방금 전에야 안 사실이지만 앙투안은 마치 자신이 생각해서 알아낸 양 가슴을 폈다.

 "예."

 "이해했다니 다행이군. 그걸 알아내려고 이본느를 얼마나 구슬렸는지 아나?"

 "죄송합니다."

 "만에 하나 내가 안 나섰으면 어쩔 뻔 했나? 모브쥬 공작부인과 척지는 것도 모자라 주인마저 팽개친 기사에게 혼담 넣을 가문이 있을 것 같아?"

귀가 붉어졌다. 혼담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 근데 나 진짜 너랑, 딸꾹, 지금 이러고 놀고 있는 거 들키면 큰일나.

오를레앙에 있을 적에도 '서열'은 분명 존재했다. 주인조차 챙겨주지 않는 기사. 아버지조차 아껴주지 않는 자식. 뒷배가 없는 주제에 권력자에게 미움까지 받는 건 서열 최하위로 떨어지기 딱 좋은 짓이었다. 이블린에서의 지위에는 딱히 미련이 없었지만 무시받는 건 싫었다. 게다가 그가 무시당할 때 손상받는 건 자존심 뿐만이 아니었다.

앙투안은 문득 긍지가 강하기로는 짝을 찾기 어려운 아롈이 본인의 위신을 손상시킨 책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면구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경, 충고 하나 하지. 경의 지위에 걸맞는 관심을 가지는 게 경에게도 좋을 거야.

다급하게 깨우길래 옷을 입자마자 뛰쳐 나갔다. 모브쥬 공작이 왜 찾아왔을까 고민하기는 커녕 상황을 제대로 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롈은 그걸 꾸중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부끄러워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다."

한꺼번에 말을 많이 해서 지쳤는지, 아롈은 팔짱을 끼고 마른 침을 삼켰다. 앙투안은 부질없는 것을 알면서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블린 본관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달빛 고요한 정원에는 차는 커녕 물 한 모금 없었다. 숨을 고르느라 쇄골에 얹은 손가락이 부러질 듯 가늘었다. 지금 이 눈부신 소녀는 기다란 속눈썹마저 버거운 듯 보였다.

 "경이 내 기사인 이상 앞으로도 이런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너무 피곤해서 연참 실패했네요. 최대한 빨리 써왔습니다. 다음 기회에 다시 연참 시도할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다음화 쯤 외전 끝날 것 같아요. 세시안 어릴 적 외전을 부자라는 제목으로 쓸까 말까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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