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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형제 (1)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책상에 턱을 괴었다. 까닥, 까닥. 이만하면 좀 쳐다봐주지. 야속한 형은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열두 살 소년치고는 굉장한 집중력이었다. 알렉산드르는 한 소리 들을 것을 알면서도 참지 못 하고 그를 불렀다.

 "바니."

 종이를 내달리는 깃펜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알렉산드르는 좀 크게 소리쳤다.

 "바니!"

 변성기 전 소년의 목소리는 차가울 정도로 정련되어 있었다.

 "이반 대공 전하라고 부르시오, 알렉산드르 대공."

 이반은 쓰던 깃펜을 잠시 내려놓고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 올리다가 그냥 벗었다. 손수건을 집어 올려 안경알을 닦는 손가락은 악기를 다루는 것이 어울릴 정도로 희고 길었다. 물론 차차기 황제로 즉위할 대공에게 악기 따위를 가르치라는 말은 조부 앞에서 꺼내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롭겠지만. 알렉산드르는 손을 쭉 펴보았다. 누가 잘라간 것처럼 짤막했다.

 그는 입을 고니처럼 쭉 내밀었다.

 "이반."

 "알렉산드르 대공. 대공이 나와 입맞춤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입 집어넣으시오. 보기 흉하오."

 "뽀뽀해줄까?"

 "사양하겠소."

 이반은 깨끗이 닦은 안경을 다시 콧날에 얹고 책상을 더듬어 깃펜을 찾았다. 잡히는 것은 없었다. 값비싼 마호가니 책상에는 은촉을 댄 독수리 깃펜 대신 잉크자국만이 점점이 남아있었다.

 이반의 맑은 연두색 눈이 알렉산드르를 직시했다. 알렉산드르는 등 뒤로 깃펜을 숨긴 채 어깨를 움츠렸다. 

 “일 그만하고 나랑 얘기 좀 해.”

 이반은 미간을 꾹 누르다가 문질렀다. 

 “주시오.”

 “바니.”

 “사샤. 저는 지금 정말로 바쁩니다.”

 말투가 바뀌는 것은 긍정적인 징조였다. 이반은 부드러운 금발을 쓸어 넘겼다. 북쪽에서나 볼 수 있는 레몬색이었다.

 “안나의 장례식에 왔던 손님들에게 감사 편지를 써야 합니다. 돌려주십시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이반은 안 슬퍼?”

 안나 파블로브나는 그들의 여동생이었다. 부모가 미남 미녀이니 대충 어느 쪽을 닮아도 어여쁠 터인데, 어머니를 닮은 이반과 달리 알렉산드르와 안나는 조부 이반 3세를 닮아서인지 솔직히 외모가 변변찮았다. 그래도 안나는 알렉산드르의 눈에 한없이 귀엽기만 했던 여동생이었다. 아장아장 걷는 발이며 빵빵한 뺨이. 사샤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그 아이가 열병으로 숨지고 관으로 들어갔을 때 알렉산드르는 통곡했다. 나중에는 눈물이 말라서 물을 마시며 울어야 했다. 하지만 이반은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검은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하고, 지금은 편지까지 쓰고 있었다. 

 “슬픕니다.”

 “하나도 안 슬퍼 보여.”

 “사샤. 슬프다고 해서 그 마음을 모두 표출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드물게도, 이반은 입매를 끌어올리며 사샤의 이마를 만져주었다. 그 손은 차가웠다.

 “슬프다고 그냥 쓰러져서 울어버리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면 누가 국정을 보고 신민들을 다스리며 귀족들을 통솔하겠습니까? 우리의 가언이 무엇입니까?”

 “행동하라, 다만 냉정해라.”

 “예. 저도 슬픕니다. 안나는 모비(母妃)께서 낳아주신 동기입니다. 그 아이를 잃은 것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다만 황가의 장손으로서의 도리가 있기에 슬픔을 억누르고 냉정하려 노력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냉정하게 굴면 안나를 위해서는 아무도 울어주지 않잖아.”
 내 동생. 내 동생. 내 동생. 차가운 땅에 묻혀 버린 내 동생.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는걸. 아주 가끔 회랑에 들어갈 때나 그 얼굴을 볼 수 있을 거야. 회랑의 열쇠가 없는 알렉산드르는 고작 삼 개월에 한 번 정도 회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반은 어머니를 닮은 아름다운 얼굴로, 어머니보다는 훨씬 따뜻하게 웃어보였다.

 “그럼 사샤가 저 대신 울어주시겠습니까? 저는 황제가 될 몸이라 함부로 울 수가 없거든요.”


***
 깃에 풀을 바짝 먹인 예복을 예쁘게 차려입고, 성 안나 훈장까지 단 알렉산드르는 형의 손에 이끌려 쭈뼛쭈뼛 어머니의 방에 들어갔다. 병문안이 명목이었다. 

 안나 여대공이 훙서(薨逝)했을 때, 옐레나 대공비는 임신 중이었다. 대공비는 소피야 황후가 붕어(崩御)한 뒤로 제국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원체 예민한 성격이라 계절을 타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지만 역시 장례식은 마음에 짐이 되었던 모양이다. 대공비는 부른 배를 감싸 안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체사레브나를 뵙습니다.” 

 이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한 쪽 무릎을 꿇고 낭랑하게 인사했다. 알렉산드르는 긴장한 나머지 조금 늦게 무릎을 꿇고 조금 빠르게 일어나버렸다.

 “가까이 오너라.”

 이반은 어머니의 손등에 자연스레 입 맞췄다. 알렉산드르는 형을 따라했다. 

 “안녕하셨어요? 어머니.”

 옐레나 대공비는 애를 많이 가져본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게 날씬한 체구를 유지하고 있었다. 체구가 실팍한 북쪽 여인들과는 달리 남쪽 출신인 대공비는 키도 작고 뼈대 자체가 작았다. 산달이 가까운 지금도 볼록 튀어나온 배 말고 다른 부분은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그래. 무탈하다.”

 아버지를 닮아 검은 머리인 알렉산드르와 달리 이반은 어머니의 금발과 녹안을 전부 이어받은 것도 모자라 이목구비까지 빼닮았다. 성격까지도 닮았다는 평이 자자했다. 

 그래서인지 옐레나 대공비는 유독 이반을 편애했다. 

 “공부는 잘 되어가느냐?”

 “안경을 바꿨다고 들었다. 너는 어째 눈이 혼자 안 좋은지 모르겠구나. 쓸데없는 것만 외탁을 해서는. 승마를 할 때 조심하려무나.”

 “리투아니아의 작황이 안 좋아 세금이 모자라다더구나. 네가 좀 더 신경을 써주렴.”

 아직 어린 소년은 구석에 서서 한 마디도 입을 떼지 못 했다. 알렉산드르는 발로 바닥을 툭툭 찼다. 심통이 났다. 푹 숙인 얼굴이 점점 험악해졌다. 

 이반은 도란도란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다 문득 알렉산드르를 돌아보고는 급히 이야기를 마치고는 알렉산드르를 끌고 방을 나왔다. 당연히 인사를 한 뒤였다. 이반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물었다.

 “왜 화가 났습니까?”

 “몰라.”

 “사샤.”

 이반은 서류나 책을 보는 등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안경을 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눈이 그대로 다 보였다. 불꽃같은, 꽃잎같은 무늬가 아로새겨진 연두색 홍채와 새카만 눈동자가.

 “어린애처럼 굴지 말아 주십시오.”

 “난 어린애야!”

 그는 소리쳤다.

 “나는 아직 열 살밖에 안 됐어! 이반도 열세 살도 안 먹은 주제에! 어른인 척 하지 마!”

 이반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금방 다시 미간을 문질렀다. 항상 하는 버릇이지만 오늘만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아까 어머니도 저랬는데. 금세 서러워졌다.

 “열두 살밖에 안 된 게 아니라 열두 살씩이나 된 겁니다. 사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모비께서 옥체 미령하신 걸 알면서 소리 지르지 마십시오.”

 “싫어!”

 알렉산드르는 있는 힘껏 배에 힘을 주고 크게 소리 질렀다.

 “어마마마는 바니만 좋아하잖아. 잘난 첫째 아들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나는 멍청하니까 어디 나가서 죽어버려도 걱정도 안 할 거잖아! 바보! 멍청이! 이반 대공 전하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는 예쁘게 보이려고 한참 매듭을 다듬었던 붉은 새시를 휙 벗어 던져버리고 달려 나갔다. 



 이반은 알렉산드르를 쫓아 내달리는 대신 가만히 서서 일정을 가늠해보았다. 찾으면 틀림없이 울고불고 툴툴거리며 매달릴 텐데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정의 과중함과, 쫓아감으로써 살 수 있는 알렉산드르의 호의를 저울질하면 단연 전자 쪽에 마음이 쓰였다.

 “대공 전하. 쫓아갈까요?”

 알렉산드르의 시종들이 쫓아갔으니 알아서들 잘 달래 주겠지. 하루나 이틀쯤 내버려두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쫓아와 달라붙으리라. 

 “아니다. 돌아가자.”

 시종에게 도서관에 다녀오라며 책 이름을 몇 개 적어주고 가져오길 기다리는 사이, 시녀가 한 명 들어와 잼과 설탕과 차를 준비했다. 북부에서 차 준비는 여성들의 몫이어서 남자가 차에 관여하는 것은 터부시 되었다. 남성만을 휘하에 두고 있는 이반도 차 시중 시녀만은 예외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모바르에서 끓고 있는 뜨거운 물로 진득한 차 원액을 희석시킨 다음 잼 한 스푼을 넣고 거기에 또 설탕을 듬뿍 탔다. 소리도 없이 잔을 밀어놓고 그녀는 방을 나갔다. 이반은 편식을 하는 어린애의 얼굴로 차를 꾸역꾸역 들이켰다. 

 이반은 뜨거운 물로 찻잎을 짧은 시간 우려내어 먹는 남부식 차를 좋아했지만 공부 전에는 꼭 북부식 차를 마셨다. 맛은 끔찍했다. 대체 이런 걸 왜 먹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았다. 하지만 머리를 쓰려면 억지로라도 단 걸 좀 입에 넣어야 했다. 단 걸 먹는 날과 먹지 않는 날은 머리가 돌아가는 효율 자체가 달랐다. 

 알렉산드르가 쓴 약을 먹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린 이반은 잔을 내려놓고 차 원액을 약간 따라 입을 헹궈냈다. 독약처럼 쓰긴 해도 입이 텁텁하진 않아서 그나마 나았다. 얼마나 설탕을 쳤는지, 마시기 전에 시녀가 잘 휘저어서 내주었음에도 잔 밑에는 설탕이 덩어리져 있었다.

 차를 다 마실 때까지도 시종은 오지 않았다. 이반은 안경을 쓰지 않아 경계선이 뿌옇게 흐려 보이는 천장을 보며 남은 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책을 가져오면 잊어버린 부분을 찾아 복기하고, 조산사를 불러 옐레나 대공비의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명령하고, 유리예프스카야 공비에게 임신 축하 선물을 보내고, 저녁을 먹기 전에 승마 수업을 받고, 식사는 황제 폐하와 함께 하면 된다. 정식 만찬은 아니지만 엄격한 분이니 예복을 다시 다려 입고 가야겠다. 훈장을 전부 달아야지. 새시는 성 안나 훈장의 붉은 새시로, 까만 별을 달고 평소에 안 달던 성 게오르그 훈장이랑 대천사 훈장도 잊지 말아야지. 식사니까 목에 체인은 걸지 말고. 식사가 끝나면 돌아와서 잠시 쉬다가 내일 해야 할 일을 확인해야겠다.

 엄격히 컸다고는 해도 일반적인 열두 살에게는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이반은 태어났을 때부터 숨 쉬듯이 모든 것을 소화해냈다. 그는 꽉 짜여진 할 일들로부터 정신적인 압박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생활을 즐겼다. 계획대로 모든 것이 착착 맞아 떨어지는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우면 묘한 쾌감이 일었다.

 문 밖에서 시종이 고했다.

 “대공 전하. 알렉산드르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렸다. 안경을 쓰지 않아 청각에 신경을 쓰고 있던 이반은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를 듣고 이미 자세를 바로 잡은 뒤였다. 알렉산드르임에 분명한 작은 덩어리가 들어왔다. 남동생은 탁자에 책을 쾅 내려놓았다. 

 시종에게 가져오라 시킨 책을 중간에 빼앗아 왔나보다. 생각보다 화가 빨리 풀린 모양이다. 이반은 계획을 약간 수정했다. 아버지의 정부에게 보낼 선물을 고르는 일정은 뒤로 미뤄야겠다. 

 “알렉산드르 대공.”

 그는 얼굴에 배어 있는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왜 안 따라왔어?”

 다 쉰 목소리였다. 울었나? 알렉산드르의 형상은 꼬물꼬물하더니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크게 코푸는 소리가 들렸다. 이반은 무심코 인상을 썼다가 미간을 문질렀다. 요즘 얼굴을 너무 자주 찌푸린다는 반성도 곁들였다. 열두 살부터 미간에 주름이 지면 얼마나 얼굴이 험악해 보일까. 

 “바빴습니다.”

 “지금은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잖아.”

 “사샤가 가지고 온 책이 오길 기다리며 쉬고 있었습니다. 쉬는 것도 업무의 연장입니다.”

 “나보다 책이 더 중요해?”

 이반은 ‘사샤보다 책이 더 중요하지는 않지만 당장 내 한정된 감정 자원을 소모해가면서 사샤의 화를 풀어주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게 ​중​요​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알렉산드르는 이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맨 위에 있는 책을 아무렇게나 펼쳤다.

 “이게 중요해? 친동생보다 중요해?”

 “사샤.”

 “그래서 안나를 위해 울어주는 것보다 편지 쓰는 게 더 중요했어?”

 알렉산드르는 다시 소리치지는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이 아이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놀랄 정도로 차분했다.

 "내가 죽어도 그럴 거야?"

 아마도. 아니, 분명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리 오십시오."

 그의 남동생은 냉큼 와서 안기는 대신 그 자리에 서서 원망을 내뱉었다.

 "이반 대공 전하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

 뚜벅뚜벅 퇴장하는 발소리, 그리고 문이 닫혔다. 이반은 머릿속에서 계획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며칠 뒤에 알렉산드르의 화를 풀어준다는 애매모호한 일정을 추가했다.

 감정 노동도 엄연한 노동이었다. 그는 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눈물처럼 번져 있던 세상의 윤곽선이 금세 또렷해졌다. 그의 눈에 알렉산드르가 대충 펴 놓은 책의 구절이 들어왔다.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안아주거나 아니면 아예 짓밟아 뭉개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을 하려고 하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를 꿈꿀 생각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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