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나들이 (2)
알렉산드르는 여동생을 다시 고쳐 업으며 끙 소리를 냈다. 옐레나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업히자마자 잠들었다. 층층이 껴입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축 늘어져서 그런 건지 제법 무거웠다.
“하귄 오늘 많이 먹귄 해쮜.”
알렉산드르는 홀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옐레나는 처음에는 이런 걸 어떻게 먹느냐고 징징거리더니 한 입 먹어보고는 깨작깨작하는 척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식기를 움직였다. 세상에 검은 빵이 있었냐고 놀랄 때는 언제고 얇게 썬 호밀빵을 우유에 적셔서 볼이 미어지게 입에 넣었다. 신나게 먹어댄 옐레나는 딱 한 조각을 남겨놓고는 고개를 팩 돌리며 별로 맛이 없었다고 투덜거려서 그를 폭소하게 했다.
뭐야, 왜 웃어. 왜 웃어. 맛없어. 빵은 당연히 희고 보들보들해야지! 정말 맛없단 말이야!
귀까지 붉히며 억지를 쓰던 옐레나는 카드놀이판에까지 따라와서는 규칙도 모르면서 알렉산드르에게 훈수를 두었다. 옥신각신하다가 그냥 져준다는 심정으로 동생이 찍은 카드를 내고 연이어 대박을 터트리자 그는 그날로 가랑이 사이의 특정 부위를 떼어 옐레나에게 붙여줘야 할 뻔 했다.
옐레나에게는 물을 쥐여 주고 흥청망청 마시다가 분위기가 폭발하기 직전까지 달아올랐을 때 사고가 일어나지만 않았더라면 좀 더 기분 좋게 들어갈 수 있었으리라.
정말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신 블라디미르는 갑자기 술 때문에 머리가 돌았는지 옐레나를 뒤에서 콱 끌어안았다. 그리고 옐레나는 조금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더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어리고 예쁜 여자애가 우는 모습을 본 도박사들은 금세 조용해졌다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블라디미르를 죽일 놈으로 만드는 데에 협조했다.
여주인은 블라디미르의 뒤통수를 나무 쟁반으로 후려쳐서 용감하게 붙잡힌 공주님을 구했고-보바 이 미친놈아! 주정을 부리려면 곱게 부릴 것이지!- 알렉산드르는 훌쩍이는 옐레나를 데리고 주점 밖으로 나가 한참 달래다가 여주인의 도움을 받아 동생을 업고 귀환길에 올랐다.
옐레나는 죽은 것처럼 숨소리도 없이 잤다. 코가 바로 그의 귓가에 있는데도 하나도 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좌?”
“아니.”
“아, 미안. 깨웠어?”
“아니. 나 내려줘. 걸을래.”
알렉산드르는 힘겹게 주저앉았다. 등에 업혀있던 아이의 무게가 사라지자 정말이지 살 것 같았다. 그는 통통 허리를 쳤고, 옐레나는 양손으로 눈을 비볐다. 눈이 새빨갰다.
“유모…….”
“뭐?”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갈래. 나 졸려.”
알렉산드르는 옐레나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그가 가진 열쇠로는 회랑이 황궁에서 뻗어나가는 데에 한계가 있었고 일단 경계선까지는 들어가야 했다.
순찰을 돌고 있던 황도 경비대의 심문에 몇 번 걸렸지만 군복을 보여주자 군말 없이 넘어갔다. 잘 넘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위조 군번이 새겨진 군용 검까지 보여주어야 했다.
잘 걷던 옐레나는 다시 피곤해졌는지 몇 번 넘어질 뻔 했고, 알렉산드르는 할 수 없이 동생을 안았다. 잘못 업었다간 목을 잡지 못 해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그는 경계선에 도달하자마자 회랑에 들어섰다. 초상화가 그려졌다면 죽상인 알렉산드르와 하도 울어 토끼처럼 빨개진 옐레나의 얼굴이 볼 만 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회랑은 하루 내에 들락날락하는 얼굴은 기록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어 얼굴은 기록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는 잠든 옐레나를 내려놓고 외투를 벗어 회랑 구석에 치워둔 다음 훈장을 달았다. 회랑에 자유자재로 드나들 권한이 있는 사람은 조부와 자신뿐이었다.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그 권한이 없었다. 회랑을 적절히만 이용하면 숨겨놓은 물건을 들킬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회랑을 좋은 창고로 쓴 사람은 알렉산드르 혼자만이 아니었다. 회랑의 길은 상당히 복잡했고-오랫동안 내려온 가계의 사람들의 엄청난 수의 초상화가 기록되어 있는 만큼- 잘 뒤져보면 이상한 물건들이 여기저기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알렉산드르는 잠시 옐레나를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레 걸어갔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안나가 있을 것이다. 회랑은 순서대로 기록되니까. 잠깐만 보고 가야지.
알렉산드르는 마치 ‘사샤’가 자기 아버지에게 압박감을 느끼는 것처럼 조부가 자신에게 황위를 물리려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랑에 드나들 수 있다는 것에는 정말 감사하고 있었다.
“안나.”
불쌍한 것. 겨우 다섯 살이었는데.
“이반.”
이반 파블로비치 키옌의 어릴 적 모습부터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이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안나도 있었고 자신도 있었고 다른 죽은 형제도 있었지만 알렉산드르는 쭉 이반만을 따라갔다. 하지만 임종한 모습이 기록된 초상화만은 차마 볼 수가 없어 중간에 멈춰섰다.
레몬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 이반은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안경을 잘 끼지 않았다. 유리알도 무겁고 안경테도 무거우니까.
이 초상화도 안경 없이 그렸다.
-이반 대공 전하라고 부르시오, 알렉산드르 대공.
-사샤. 저는 지금 바쁩니다.
지금도 그의 버릇들을 기억한다. 섬세한 눈썹 사이 미간을 꾹 문지르던 손길이며 말투 같은 것들. 알렉산드르의 형은 항상 그에게는 먼저 하오체를 썼고, 그가 좀 칭얼대면 거짓말처럼 합쇼체를 썼다. 보통은 격식을 차릴 때 존대를 하고 평소에는 반말을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오히려 극존대가 편하다고 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자기와 대등하지만 약간 아래인 알렉산드르에게 극존대를 할 수 없다고.
“바니. 아까 봐써? 걔가 우리 동생이야. 닮아찌?”
알렉산드르는 미친 사람처럼 초상화에 대고 말을 걸었다. 사실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회랑의 열쇠를 얻은 다음부터 그는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회랑을 방문했고 그의 초상화는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다.
“안나가 죽고 놘 다으메, 얼마, 얼마 안 이따가 태어나쫘나. 그 때 형이 나한테 줨 작작 징징대라고 화놰쫘나. 걔가 걔야. 정말 많이 커찌?”
옐레나를 낳기 위해 어머니가 진통하던 그 때 이반이 자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얼마 안 있어 이반의 생일이었고 그는 그 때 이반에게 화가 풀리지 않아서 생일 파티에 불참했다. 그래, 다 기억난다.
“어, 술을 많이 마셔서 구론가. 아닌데, 얼마 안 마숴눈돼.”
꽤 마셨던가. 아닌가. 얼마나 마셨지. 알렉산드르는 거칠게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근데 되게 얼굴 가쉭적이다. 나한테 화뉄 뙈는 그런 얼굴 아니었.”
정으로 깬 돌처럼 날 서 있던 눈.
“그 때 이반도 솨람이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어렸나봐.”
형도 어머니를 아끼고 사랑해서 그 때 많이 초조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지금 생각하면 팔다리와 머리를 거북이처럼 몸속에 우겨넣고 데굴데굴 굴러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너무 멍청했다.
갑자기 어지러웠다. 알렉산드르는 꼬인 혀로 열심히 이반에게 말을 걸다가 통곡을 했다. 형 왜 그랬어. 왜 죽었어. 형이 정말 죽을 줄은 몰랐지.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화해했지. 왜 스무 살도 안 됐는데 죽었어. 액자를 양손으로 붙잡고 꺼이꺼이 울던 그는 잠깐 기절까지 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손수건에 코를 풀었다.
키잉하는 소리와 함께 다량의 콧물이 묻은 손수건을 대충 옷깃에 다시 쑤셔 넣은 그는 꾸벅 허리를 숙이다가 넘어졌다.
“다시 올게.”
하지만 죽은 사람의 초상화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는 표정 그대로였다.
***
옐레나는 다행히도 그가 돌아올 때까지 자고 있었다. 혹은 자는 척 하고 있었다. 많이 취한 그는 그 둘 사이를 구분할 인지능력을 상실한 채였고 힘겹게 회랑을 통해 여동생을 방에 데려다주었다.
옐레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제 손으로 뺨을 찰싹찰싹 몇 번 쳤다. 알렉산드르는 술을 마신데다 한참 울고 나니 기분이 좋아져서 실실 웃었다.
“왜 그래?”
“많이 잤어. 이제 이틀은 안 자도 돼.”
언제부터 울다 지쳐서 기절하는 것이 잠드는 것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산드르는 그걸 물어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는 새침하게 한 발을 뒤로 빼고 우아하게 절을 했다.
“어쨌거나 추한 꼴을 보였어요. 실례했어요, 알렉산드르 대공 전하.”
“천만에요, 아롈 여대공. 정말 옆에 안 있어줘도 되겠어?”
“아롈 아니라니까! 그리고 됐어. 난 사람 옆에 있는 거 싫어.”
하긴 그렇게 말하는 알렉산드르도 태어날 때부터 혼자 자버릇 해서 옆에 시종이 지키고 있으면 뒤척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알렉산드르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을까 하다가 술 취한 상태에서도 아까의 사달을 기억하고 비틀비틀 돌아섰다.
“내일 보자!”
그는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